연암 박지원의 세상만물과 우주 섭리 이해하려는 듯한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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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세상만물과 우주 섭리 이해하려는 듯한 글쓰기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10.06 0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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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③ 동심(童心)’의 미학⑧
 

[한정주=역사평론가] 호기심과 상상력을 어떻게 작동시켜야 다시 동심으로 돌아가 글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여기에서 다시 박지원의 『열하일기』 속에 등장하는 코끼리 이야기, 즉 ‘상기(象記)’를 읽어보겠다.

“장차 괴상하고 진기하고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것을 보려거든 먼저 선무문(宣武門) 안으로 가서 코끼리 우리를 살피면 될 것이다. 내가 황성(皇城)에서 코끼리 16마리를 보았으나 모두 쇠로 만든 족쇄로 발이 묶여 있어 그 움직이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이제 열하(熱河)의 행궁(行宮)의 서편에서 코끼리를 보매 온몸을 꿈틀대며 움직이는데 마치 비바람이 지나가는 듯하였다.

내가 일찍이 새벽에 동해가를 가다가 파도 위에 말 같은 것이 수도 없이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모두 봉긋하니 집과 같아 물고기인지 짐승인지 알지 못하겠기에 해 뜨기를 기다려 자세히 보려 했더니 막상 해가 바다 위로 떠오르려 하자 파도 위에 말처럼 섰던 것들은 하마 벌써 바다 속으로 숨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제 열 걸음 밖에서 코끼리를 보고 있는데도 오히려 동해에서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김새가 몸뚱이는 소인데 꼬리는 나귀 같고, 낙타 무릎에다 범의 발굽을 하고 있다. 털은 짧고 회색으로 모습은 어질게 생겼고 소리는 구슬프다. 귀는 마치 구름을 드리운 듯하고, 눈은 초승달처럼 생겼다. 양쪽의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름이나 되고, 길이는 한 자 남짓이다.

코가 어금니보다 더 길어서 구부리고 펴는 것은 자벌레 같고, 두르고 말고 굽히는 것은 굼벵이 같다. 그 끝은 누에 꽁무니처럼 생겼는데, 마치 족집게처럼 물건을 끼워가지고는 말아서 입에다 넣는다. 혹 코를 주둥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어 다시금 코끼리의 코가 있는 곳을 찾기도 하니 대개 그 코가 이렇게 길 줄은 생각지도 못하는 것이다.

간혹 코끼리는 다리가 다섯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혹은 코끼리 눈이 쥐눈과 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 온 마음이 코와 어금니 사이로만 쏠려서 그 온 몸뚱이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을 좇다 보니 이렇듯 앞뒤가 안 맞는 비유가 있게 된 것이다. 대개 코끼리의 눈은 몹시 가늘어 마치 간사한 사람이 아양을 떨 때 그 눈이 웃음을 먼저 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 어진 성품이 바로 이 눈에 담겨 있다.

강희(康熙) 때에 남해자(南海子)에 사나운 범 두 마리가 있었다. 오래되어도 능히 길들이지 못하자 황제가 노하여 범을 몰아다가 코끼리 우리로 들여보낼 것을 명하였다. 코끼리가 크게 놀라 한 번 그 코를 휘두르매 범 두 마리는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코끼리가 범을 죽일 마음은 없었는데, 냄새 나는 것을 싫어하여 코를 휘두른다는 것이 잘못 맞았던 것이었다.

아아! 세간의 사물 가운데 겨우 털끝같이 미세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일컫지 않음이 없으나 하늘이 어찌 일찍이 일일이 이름을 지었겠는가? 형체를 가지고 ‘천(天)’이라 하고, 성정을 가지고는 ‘건(乾)’이라 하며, 주재함을 가지고는 ‘제(帝)’라 하고, 묘용(妙用)을 가지고서는 ‘신(神)’이라 하여, 그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이고 일컬어 말하는 것도 몹시 제멋대로이다.

이에 이기(理氣)로서 화로와 풀무로 삼고, 펼쳐 베풂을 가지고 조물주라 여기니, 이것은 하늘 보기를 교묘한 장인(匠人)으로 보아 망치질하고 끌질하며, 도끼질과 자귀질 하기를 잠시도 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주역』에서 ‘하늘이 초매(草昧), 즉 혼돈을 만들었다(天造草昧)’고 하였는데, 초매라는 것은 그 빛이 검고 그 모습은 흙비가 쏟아지는 듯하여 비유하자면 장차 새벽이 오려고는 하나 아직 새벽은 되지 않은 때에 사람과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캄캄하여 흙비 내리는 듯한 가운데에서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이 과연 어떤 물건인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

비유컨대 국수집에서 밀을 갈면 가늘고 굵고 곱고 거친 것이 뒤섞여 땅으로 흩어진다. 대저 맷돌의 공능은 도는 데 있을 뿐이니, 애초부터 어찌 일찍이 곱고 거친 것에 뜻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말하는 자들은 ‘뿔이 있는 놈에게는 윗니를 주지 않는다’고 하여 마치 사물을 만듦에 모자란 것이라도 있는 듯이 여기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감히 묻는다. ‘이빨을 준 것은 누구인가?’ 사람들은 장차 말하리라. ‘하늘이 주었다.’

다시 묻는다. ‘하늘이 이빨을 준 것은 장차 이것으로 무엇을 하게 하려 한 것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리라. ‘하늘로 하여금 물건을 씹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묻는다. ‘이로 하여금 왜 물건을 씹게 하는가?’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대저 이치이다. 새나 짐승은 손이 없으므로, 반드시 부리나 주둥이로 숙여서 땅에 닿게 하여 먹을 것을 구한다. 때문에 학의 다리가 높고 보니 목이 길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도 혹 땅에 닿지 않을까 염려하여 또 그 부리를 길게 만든 것이다. 진실로 닭의 다리를 학처럼 만들었더라면 반드시 뜰 가운데서 굶어 죽었을 것이다.’

나는 크게 웃으며 말하리라. ‘그대가 말하는 이치란 것은 소나 말, 닭이나 개에게나 해당할 뿐이다. 하늘이 이빨을 준 것이 반드시 고개를 숙여 물건을 씹게 하려는 것이라고 치자. 이제 대저 코끼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어금니를 심어주어 장차 땅으로 숙이려고 하면 어금니가 먼저 걸리게 되니, 이른바 물건을 씹는 것이 절로 방해되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리라. ‘코를 의지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나는 말한다. ‘그 어금니를 길게 해 놓고 코를 의지하느니, 차라리 어금니를 뽑아버리고서 코를 짧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제서야 말하던 자는 처음의 주장을 능히 굳게 지키지 못하고 배운 바를 조금 굽히게 되리라.

이것은 마음으로 헤아려 미치는 바가 오직 소나 말, 닭이나 개에만 있지, 용이나 봉황, 거북이나 기린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쳐서 이를 죽이고 마니 그 코는 천하에 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우러르며 서 있는다. 그렇다고 해서 장차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말한다면 앞서 말한 바의 이치는 아닐 것이다.

대저 코끼리는 직접 눈으로 보는데도 그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데, 또 하물며 천하 사물은 코끼리보다 만 배나 됨에랴! 그런 까닭에 성인께서『주역』을 지으실 적에 ‘상(象)’을 취하여 이를 드러내었던 것은 만물의 변화를 다하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박지원, 『열하일기』, ‘코끼리에 관한 기록(象記)’ (정민 지음,『비슷한 것은 가짜다 -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미학』, 태학사, 2000, p11〜15. 인용)

코끼리는 조선을 벗어나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는 동물이다. 한 마디로 미지(未知)의 동물이다. 따라서 코끼리를 구경하려고 일부러 찾아가는 박지원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호기심’이다. 호기심이 없다면 결코 자청해서 코끼리를 구경하러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코끼리 구경에 나선 박지원은 마치 ‘우물’을 막 벗어난 개구리처럼 이제 미지(未知) 혹은 미답(未踏)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실제 코끼리를 본 순간 박지원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어마어마한 몸집과 괴상하고 진기한 생김새에 놀란다.

만약 박지원이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거기에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박지원은 스스로 상상력을 작동시켜 ‘세상 만물이 존재하는 천리(天理)’와 ‘세상 만물이 변화하는 이치’의 세계로 들어간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철학과 지식의 근본 문제, 즉 세상만물과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려는 듯한 글쓰기라고 하겠다.

박지원의 아들인 박종채는 아버지의 생전 언행(言行)을 기록한 『과정록(過庭錄)』이라는 책에서 박지원이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지극히 미미한 사물, 예를 들자면 풀과 꽃과 새와 벌레도 모두 지극한 경지를 갖추고 있어서 하늘과 자연의 묘한 이치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의 감정과 마음을 대개 사소하고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박지원의 주장대로라면 지극히 미미한 ‘동심’을 통해 ‘세상 만물과 우주의 묘한 이치와 변화’까지도 깨우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동심의 미학’을 통해 문장의 오묘한 이치와 글쓰기의 지극한 경지에 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겠다. ‘동심의 미학’이 글을 지을 때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가를 철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다. 여기에서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프리드리히 니체 저, 정동호 옮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3. p41)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순진무구’는 진정성을 말하고, ‘망각’은 예전의 것은 잃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뜻하며 ‘스스로의 힘에 돌아가는 바퀴’는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의미하고 ‘최초의 운동’은 이탁오가 말한 ‘최초의 본심(本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니체는 어린아이의 놀이를 가리켜 ‘창조의 놀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곧 새로운 가치의 창조이며 문학적으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새로운 것의 창작(創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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