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하지 않는 0.1%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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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하지 않는 0.1%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 한정곤 기자
  • 승인 2014.03.3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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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집중과 불평등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불편한 진실
 

‘지배계층이란 아무도 그들의 사회학에 대해 감히 글을 쓰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성서 외전(外典)의 말처럼 슈퍼부자들의 실체는 좀처럼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유는 ‘그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적 가치가 분배되는 현장에서 몸을 가린 채 그들이 사회 전체 노동자에 의존해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한다. 또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전체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선행을 베푸는’ 그들에게 의존해 있다는 사회적 인식을 심어주려 한다.

이를 두고 프랑스의 사회학자 마테 도강은 ‘그들은 다스리지 않고, 정책을 추진하지도 않으며, 문화를 생산해내지도 않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다스리게 하고, 분배하게 하고, 고안하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지배현상은 금력 엘리트를 중심으로 계층적으로 구성된 ‘금력복합체’라는 엘리트 네트워크를 염두에 두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금력복합체 내에서 금력 엘리트 집단의 바로 하위 계층을 이루는 집단은 금융 및 거대 기업집단 엘리트들이다. 주로 은행가와 거대기업 최고경영자로 이루어진 이들 집단에서는 슈퍼부자들에게서 돈을 받아 끊임없이 새로운 자본축적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고객과 스스로의 이익을 챙기는 역할을 한다.

그 하위 계층으로는 정치 엘리트 집단이 있다. 이들은 주로 각 국가의 정부와 의회에서 사회적 합의를 지나치게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아래에서 위로’ 사회적 부를 이전해주는 분배모델을 만들어낸다.

금력복합체 제일 주변부에는 기능 및 지식 엘리트 집단이 있다. 주로 정치관료나 언론계 거물, 싱크탱크 등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이들 집단에서는 금력 엘리트에 의한 지배체제의 정당성을 대중에게 퍼뜨리고 인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부실한 금융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막대한 세금이 투여되는 정책이 시행되고, 잘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공부문의 운영이 민간기업의 손에 넘어가고, 싱크탱크 같은 연구기관과 언론매체들이 개미들이 손해를 보고 물러난 금융시장을 향해 ‘호황이 이어질 듯’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이유가 모두 ‘단기이익 확대’라는 모토 아래 여러 엘리트 집단들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네트워크에서는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필연적으로 ‘부패와 부조리함’이라는 특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특히 ‘권력이 돈으로 치환될 뿐 아니라 돈의 가치가 권력화 된다’는 금력 엘리트들의 인식이 더 강하게 구축된다.

이로 인해 0.1%의 금력 엘리트와 그 가족에 의해 세상은 지배되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돈이 마치 블랙홀에 빠져들 듯 점점 더 그들의 세계에 집중되고, 나머지 99%의 영역에서는 실업이 증가하고 중산층이 사라지는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2012년 SBS의 특집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은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수많은 이민자들에게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게 했던 미국이라는 나라가 오늘날 그 어떤 나라보다도 1%와 99%의 차이가 극심하게 벌어진 곳이 되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조명해주었다.

하지만 비단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으로 그 뒤에는 이를 조장하는 0.1% 억만장자 제국의 실체가 가려져 있다.

오늘날 돈의 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슈퍼부자들, 즉 슈퍼금력(金力) 엘리트들은 과거의 부자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과거의 부자는 제조와 생산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본연의 자본주의 구조를 통해 돈을 번 반면 금력 엘리트들은 생산하지 않는 경제, 즉 돈이 돈을 만들어내는 금융세계에서 대부분의 재산을 축적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폴 크루그먼은 단적인 사례로 2012년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경쟁했던 밋 롬니와 그의 아버지 조지 롬니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를 묘사한다.

조지 롬니는 자동차를 생산하는 기업을 운영하고 세금도 성실히 납세해가며 재산을 축적한 반면 아들 밋 롬니는 대부분의 재산을 금융기법을 통해 벌었다. 또 자신의 부를 어디에 이용했는지를 밝히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줄기차게 부자감세를 주장했다.

부자들이 세금을 포함한 사회적인 책임들을 회피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 과정에서 최근 등장한 새로운 부자문화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적을 버리고 유목민 생활을 선택하는 부자들이 증가하는 현상이다.

페이스북의 공동창업자인 에두아르두 사베린은 페이스북의 주식을 상장할 때 내야 하는 수억 달러의 세금을 피하기 위해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 이들 두고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에서는 그들은 마치 ‘애초부터 자신들에게 국적 따위는 없었다는 듯 산다’고 표현했다.

물론 이들의 유목생활은 양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돌아다니는 유목민들과는 당연히 차원이 다르다. 이와 관련 ‘파이낸셜 타임스’는 ‘슈퍼부자들은 전형적으로 주된 거주국가에 1~2채의 부동산을 갖고 있으며 런던이나 뉴욕 아니면 다른 세계적 도시에 머물 곳을 반드시 하나 더 갖고 있다. 여기에 필수적인 두 가지 유형의 휴가지가 포함된다. 하나는 태양이 빛나는 곳이고, 또 하나는 눈이 내리는 곳이다’고 쓰고 있다.

그들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곳’과 그 돈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곳’ 사이에서 움직이는 새로운 버전의 유목문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거의 섬 크기에 가까운 슈퍼요트의 제조가 증가하고 케이맨제도 등 소위 조세회피처에 50조 달러에 달하는 돈이 감쳐져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유목문화가 앞으로 더욱 확산되고 발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기부문화 역시 다르지 않다.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의 기부서약으로 대표되는 부자들의 기부문화로 많은 돈이 모였지만 그들의 돈이 실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액수는 그리 많지 않다.

이에 대해 과거 클린턴 정부에서 노동부장관을 지낸 로버트 레이치는 ‘모든 자선 기부금의 약 10%만이 실제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쓰인다’고 말한 바 있다.

부자들의 기부금 중 상당 부분은 그들이 세운 재단의 몫이다. 자선보다는 주로 세금회피나 그들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이용된다. 후자의 경우 조지 소로스나 찰스 코크 등의 억만장자들이 만든 재단에서 세계적인 싱크탱크나 민간연구기관, 국제기구 등에 거대자금을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기부에 동참한 상당수 부자들이 교육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실제 그들이 교육기회를 갖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전 세계 차원의 교육 프로젝트 같은 문제에는 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에서는 부자들의 기부에 의지하기보다는 그들의 조세회피와 조세포탈을 원천적으로 막고, 국제적인 금융이전에 대한 세금을 부과해 거둬들인 돈으로 그러한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독일 뮌스터대학 교수였던 한스 위르겐 크뤼스만스키는 그의 저서 『거대한 불평등의 근원 0.1% 억만장자 제국』에서 이처럼 기부를 통해 사회적인 신망을 얻는 한편 세금회피 등을 이용해 더 많은 이익을 챙기는 부자들의 기부문화를 두고 ‘기부서약은 1급 해적질’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가 점점 더 ‘돈이 권력이 되고, 권력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체제’로 규정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있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분노한 사람들(Indignados)’ 등과 같은 99%의 저항운동과 부조리하고 부패한 권력지도를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한 마크 롬바르디(Mark Lombardi)의 예술세계, 전 세계 차원의 지배․권력구조를 거대한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한 탕자트대학 연구팀 같은 소규모 풀뿌리 연구자 그룹들의 프로젝트 등의 사례가 그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권력과 지배현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덕분에 지금까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슈퍼부자들의 실체가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또한 억만장자 제국에 혐오감을 느껴 스스로 낙오하거나 제국 안에서 몸을 가린 채 내부고발자로서 활동하는 지식 엘리트 계층을 통해서도 이러한 실체들이 드러나고 있다.

한스 위르겐 크뤼스만스키는 “이 모든 노력에도 우리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돌리려는 슈퍼부자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새로운 계급투쟁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계급투쟁에 알몸으로 나서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누구’와 싸워야 하며, 또 ‘누구와 함께’ 싸워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인터뷰에서 노암 촘스키의 말처럼 ‘대중은 항상 쓰라린 계급투쟁을 하고 있으며, 투쟁에서 물러난다면 결국 세상은 기득권이 원하는 대로 굴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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