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운대 꽃구경에 취한 18세기 문사(文士)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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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운대 꽃구경에 취한 18세기 문사(文士)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1.15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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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 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⑦
▲ 정선의 ‘필운대상춘’ 27.5x33.5cm.

[한정주=역사평론가] 북학파의 일원인 유득공은 한양의 세시(歲時)와 풍속(風俗)을 자세히 연구해 『경도잡지(京都雜誌)』라는 책을 남겼다. 이 책은 조선의 세시와 풍속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최초의 개인 저작이라고 할 만큼 사료적 가치가 높다.

여기에는 모두 19가지의 풍속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중에는 유상(遊賞), 곧 ‘놀이와 구경’에 관한 한양의 풍속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필운대(弼雲臺)의 살구꽃, 북둔(北屯)의 복사꽃, 동대문(東大門) 밖의 버들, 천연정(天然亭)의 연꽃, 삼청동(三淸洞)과 탕춘대(蕩春臺)의 수석(水石)에는 산보객이 모두 여기로 몰린다.”

인왕산 아래 필운대는 오늘날 서울 종로구 필운동 88번지 일대로 현재 배화여고가 들어서 있는 자리다. 이 필운대 옆의 언덕이 육각봉(六角峰)인데 필운대와 육각봉은 봄날 한양에서 꽃구경을 하기에 가장 빼어난 장소였다고 한다.

한양에서 나고 자란 수많은 문사(文士)들은 매년 봄이 되면 필운대와 육각봉을 찾아 서촌(西村), 북악(北岳), 궁궐 그리고 북촌(北村)을 가득 덮은 살구꽃과 복사꽃을 한 눈에 담아볼 수 있는 풍류를 누렸다.

특히 연암(燕巖) 박지원, 다산(茶山) 정약용, 청장관(靑莊館) 이덕무는 물론이고 정조대왕에 이르기까지 18세기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이들이 하나같이 ‘필운대의 꽃구경’에 관한 시편을 남겼을 정도로 필운대의 산수 풍광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나비가 꽃을 희롱함을 어찌 극성맞다 나무라는가 / 사람들이 오히려 나비 따라 꽃과 인연 맺으려고 달려드네 / 아지랑이 아롱대는 저 너머 한낮 봄은 푸르고 / 마을은 떠들썩하고 도성 큰 길 앞에 먼지가 자욱하네 / 새 울음과 모양새 각각인 건 제 뜻이지만 / 도처에 만발한 꽃은 저 하늘 하고 싶은 대로네 / 이름난 정원에 앉아 둘러보니 어린애는 없고 / 백발의 노인들만 즐기니 작년과 달라진 게 가련하구나.” 박지원, 『연암집』, ‘필운대의 꽃구경(弼雲臺賞花)’

“대나무 사립문은 대낮에도 항상 아니 열어놓고 / 계곡의 다리 내버려두니 푸른 이끼 길게 자랐네 / 갑자기 성 밖에서 손님이 찾아와서 / 꽃구경 하려고 필운대로 간다네.” 정약용, 『다산시문집』, ‘봄날 체천에서 지은 잡시(春日棣川雜詩)’

“구름 개인 서쪽 성곽에 봄 옷 차려입고 거니니 / 눈에 아른대는 아지랑이 백 길이나 날아오르네 / 연일 해 저물도록 늦어지는 것 사양 말라 / 꽃피어 이 놀이 얼마나 행복한가 / 물고기 비늘 같은 만(萬) 채의 가옥에 꽃향기 피어오르고 / 연꽃처럼 솟아 있는 세 봉우리 햇무리를 품었네 / 경복궁의 땅 밝아 백조(白鳥)가 날아오르니 / 내 마음 너희와 더불어 노닐며 모든 걸 잊었네.” 이덕무, 『청장관전서』, ‘필운대(弼雲臺)’

특히 정조는 국도(國都) 한양의 승경(勝景) 여덟 가지를 시로 노래하면서 그중 ‘필운대의 꽃과 버드나무(弼雲花柳)’를 첫 번째로 꼽았다.

필운대와 더불어 정조가 꼽은 한양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풍경이란 압구정의 뱃놀이(狎鷗泛舟), 삼청동의 녹음(三淸綠陰), 자하각의 등불 관람(紫閣觀燈), 청풍계의 단풍놀이(淸溪看楓), 반지의 연꽃감상(盤池賞蓮), 세검정의 얼음 폭포(洗劍氷瀑), 광통교의 비 갠 뒤 달(通橋霽月) 등이다.

“필운대 곳곳마다 번화함을 자랑하니 / 만 그루의 수양버들에 세상 온갖 꽃이네 / 아지랑이 살짝 끼여 좋은 비를 맞이하고 / 새로 지어 빤 비단은 밝은 노을 엮어 놓고 / 백 겹으로 곱게 꾸민 이들 모두 시(詩)의 반려자고 / 푸른 깃대 비껴 솟은 곳 바로 술집이네 / 홀로 문 닫고 글 읽는 이 누구의 아들인가 / 춘방(春坊)에서 내일 아침 다시 조서 내리겠지. (이상은 필운대의 꽃과 버드나무를 읊은 것이다.)” 정조, 『홍재전서(弘齋全書)』, ‘국도팔영(國都八詠)’

유득공의 큰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활동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던 유본학은 ‘유육각봉기(遊六角峰記)’라는 글을 통해 봄날 한양도성과 궁궐과 민가(民家)에 가득 곱게 피어 있는 살구꽃과 복사꽃을 구경하는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다.

“계해년(癸亥年: 1803년·순조 3년) 봄, 나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으나 잘 낫지 않았다. 춘삼월 늦봄, 꽃은 흩어져 날리건마는 여전히 지게문을 걸어 닫은 채 누워 지냈다. 이번 봄처럼 밖에 나가 놀지 못한 적은 처음이었다.

3월10일 선비 한대연(韓大淵)을 찾아갔다. 과거에 떨어진 대연은 하는 일 없이 지내면서도 나처럼 밖에 나가 놀지 못하였다. 함께 서대문 성곽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기로 했다. 하지만 북산(北山: 인왕산)의 육각봉(인왕산 아래 필운대 옆의 언덕)까지 갈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때마침 밤새 내린 비가 아침나절 개어 성곽을 등진 인가마다 복사꽃과 살구꽃이 한창 곱게 피었고, 성 밑으로 호젓하게 이어진 오솔길은 향기로운 풀이 뒤덮었다. 따사로운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서 너무도 즐거웠다.

우리는 함께 골짜기 시냇물을 건너고 솔숲을 뚫고서 잰 걸음을 뽐내며 놀다보니 저도 모르는 새 벌써 육각봉에 이르렀다. 잔디 위에 앉아 잠깐 쉬면서 서울 북쪽 동네에 피어 있는 꽃을 구경했다.

또 오씨(吳氏) 집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노닌 사람 모두가 술에 취했다. 나만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해서 혼자 취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연이 강권하여 억지로 술 세 종지를 마셨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기에 오히려 크게 취했다. 이날의 봄놀이에 나보다 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대문 성곽부터 육각봉까지는 서울에서 꽃을 구경하기에 가장 빼어난 장소이다. 이제 모조리 찾아가 구경했으므로 곳곳을 찾아다니며 봄놀이를 즐긴 해가 올해보다 나은 때는 없을 것이다.

함께 논 사람은 누구인가? 한대연과 강인백(姜仁伯)이다. 강인백의 자(字)는 유경(酉敬)으로 대연의 조카이다. 계행(季行)은 내 막내 동생이다.” 유본학, ‘육각봉에서 노닌 기록(遊六角峰記)’ (안대회 지음,『고전 산문 산책』, 휴머니스트, 2008. p516〜517.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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