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관료 경제 이론가 김육…③ 대동법 vs 호패법의 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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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관료 경제 이론가 김육…③ 대동법 vs 호패법의 격돌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6.01.20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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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백성의 삶과 생업 안정을 통한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 주창”
 

[조선의 경제학자들] “백성의 삶과 생업 안정을 통한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 주창”

[한정주=역사평론가] 대동법은 기존의 조세 수취 체제에서 두 가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경제개혁정책이었다.

그 하나는 지방 군·현의 가구 단위로 부과하던 공물을 토지 소유량을 기준으로 부과하도록 바꾼 것이다. 가구 단위로 조세를 부과하는 방식은 토지의 소유 여부 혹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공물을 납부하도록 했기 때문에 토지를 많이 소유할수록 이익을 얻는 폐단을 낳았다.

또 다른 하나는 지방 토산물을 거두어들인 조세 방식을 일정한 수량의 베나 쌀로 통일해 납부하도록 바꾼 것이다. 이것은 지방 토산물(현물) 납부에 따른 점퇴와 방납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 주었다.

이 같은 이유로 대동법은 토지가 없거나 혹은 적은 토지를 소유한 일반 백성들의 삶과 생업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공물 납부의 부담을 일반 백성들에게 전가시켰던 부농이나 지주, 방납 활동으로 막대한 이득을 누린 상인, 공물 수납 과정에서 부정한 이득을 취한 지방 관리들에게 대동법은 얻을 것은 하나도 없고 잃을 것밖에 없는 개혁정책이었다.

특히 지방의 부농·지주나 관리들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한편 자신들 스스로가 대토지 소유자였던 중앙의 고위 관료들 역시 대동법 시행으로 이로울 것이 전혀 없다고 여겼다. 이들은 거대한 정치사회 세력을 이루어 김육 등이 내세운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 김육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와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보수파 간에 ‘대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논쟁은 단순히 대동법의 시행 여부에 관한 찬반 논쟁으로 그치지 않았다. 김육 등은 양대 전란 이후 국가 경제를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백성들의 삶과 생업을 안정시키는 방식에서 찾았다. 대동법은 그러한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에서 핵심을 차지하고 있던 개혁정책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보수파 관료들은 신분 질서를 더욱 강화해 백성들의 불만과 저항을 다스리고 유랑민이나 도적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더욱 확대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안정을 되찾으려고 했다. 때문에 이들은 대동법을 반대하는 대신 호패법의 시행을 전면에 들고 나왔다.

가구 단위로 조세를 부과하는 기존의 징세 방식은 토지의 소유 여부 혹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공물을 납부하도록 했기 때문에 토지를 많이 소유할수록 이익을 얻는 폐단을 낳았다.

대동법과 호패법을 둘러싼 개혁파 대 보수파의 최초 논쟁은 김육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기 15년 전인 인조 원년(1623년)에 일어났다.

당시 유공량·최명길 등 보수파 관료들은 백성들의 유랑민화·도적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호패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육·조익 등 개혁파 관료들은 호패법은 사회적·정치적 불안과 위기감을 한층 조장할 뿐이라며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길만이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일이라며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했다.

특히 김육은 호패법을 철폐하자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호패를 지니고 다니는 자에게 죄를 주라는 급진적인 주장까지 내세웠다. 백성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민생의 안정도, 나라 경제의 복원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김육 등 개혁파 관료들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김육이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대동법의 시행을 다시 건의하자 개혁파 대 보수파 관료를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 세력 간의 대논쟁이 재연되었다.

김육은 충청도를 관할하는 최고 책임자가 되자마자 평소 자신의 신념과 정책을 현실에 적용한 정치를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건의는 지방 토호 세력과 양반계층 그리고 방납 활동을 하는 상인과 관리들이 중앙의 관료들과 결탁해 완강하게 반대한 탓에 결국 좌절되고 만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인조 24년(1646년)에 또 한 차례 대동법 시행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지만, 이 역시 보수파 관료들의 반대와 조세 징수량의 감소를 염려한 인조의 우유부단함이 겹쳐 중지되고 말았다. 결국 인조 재위 기간 동안 대동법에 관한 논의는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

효종 시대에 들어서자 김육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관료들은 또 다시 삼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의견을 상소했다. 이에 조정은 다시 개혁파 대 보수파로 나뉘어 ‘대논쟁’을 치르게 된다.

이때 대동법 시행을 반대한 보수파 관료의 수장은 김집이었다. 이 논쟁으로 말미암아 조정은 공납제를 개혁해 대동법을 시행하자는 김육의 개혁 세력(한당)과 대동법을 반대하고 공납제의 일부 개선과 호패법의 실시를 주장하는 김집의 보수 세력(산당)으로 분열하고 만다.

온 조선을 들썩이게 만든 이 대논쟁의 결말은 ‘호서 지역(충청도) 실시, 호남 지역 불가’라는 절충안으로 매듭지어진다. 그후 5년이 지나 김육이 다시 효종에게 호남 지역에도 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청해 해안 주변의 마을에서나마 대동법이 시행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듯 김육은 온갖 반대와 저항에 굴하지 않고 수십 년에 걸쳐 끈질기고 집요하게 자신의 개혁사상을 현실의 경제정책에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이와 같은 그의 신념과 노력 덕분에 비로소 대동법은 국가 조세 체제로 자리를 잡아 나갈 수 있었다.

김육에 의해 뿌리를 내린 대동법은 단순히 조세 체제의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대동법은 조선 후기 상공업과 시장경제 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방 토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던 공납제 시절에는 중앙관청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만드는 관영 수공업 이외의 민간 수공업은 발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베나 쌀만을 조세로 수취하는 대동법이 실시되면서부터 중앙관청은 소요 물품에 대한 일정 비용을 지출해 공인(貢人)이라고 하는 민간 상인에게 조달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공인 계층은 관청과 민간 수공업을 중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보통 관청에 납품할 물품을 한양의 시전이나 지방의 장시들을 통해 조달하는 한편 민간 수공업자들과 거래하거나 혹은 직접 수공업장을 개설하기도 했다. 농민들 역시 쌀이나 베를 마련해 조세를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생산한 여러 다른 농산물이나 물품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상업적 농업을 경험하거나 상품 교환 경제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것은 다시 시장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동법은 이렇듯 조선 후기 농업, 수공업, 상업의 생산 및 교환 활동을 자극하면서 시장경제의 싹을 틔웠다.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들어와 조선이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대동법과 같은 경제정책으로 양대 전란의 후유증을 말끔히 털어 내고 새로이 사회적·경제적 활력을 되찾은 17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17세기를 들여다보면 훌륭한 경제 관료 한 사람과 좋은 경제정책 하나가 국가 경제와 백성들의 삶을 백 년 정도는 거뜬히 부유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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