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속 백성 모습 묘사한 이옥의 시기(市記)…동심·기묘·진경의 종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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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속 백성 모습 묘사한 이옥의 시기(市記)…동심·기묘·진경의 종합판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2.19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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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⑫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⑫

[한정주=역사평론가] 시기(市記)는 이옥이 정조의 문체반정 때 소품체를 썼다는 죄로 경상도 삼가현으로 충군(充軍: 죄인을 군역에 복무하도록 하는 제도)으로 나가 있을 때 적은 것이다.

이 글 속에도 나타나 있지만 이옥은 당시 머물고 있던 주막에서 “너무도 무료해 종이창의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다가” 우연히 장이 서는 풍경을 접하고 재미삼아 붓이 가는대로, 마음이 가는대로 ‘시장 속 백성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동심의 미학’과 ‘기묘의 미학’과 ‘진경의 미학’이 종합적으로 한 편의 글 속에 어우러져 있는 희필(戱筆)이자 희작(戱作)이다.

소품체 때문에 죄를 뒤집어쓰고 처벌을 받는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소품체를 썼으니 이옥의 남다른 문기(文氣)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그 덕분에 우리는 18세기 말 조선의 시골 시장 풍경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글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주막은 시장에서 가깝다. 2일과 7일이면 어김없이 시장의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시장 북쪽은 바로 내 거처의 남쪽 벽 밑이다. 벽은 오래전부터 창이 없었다. 내가 햇볕을 받아들이기 위해 구멍을 뚫고 종이창을 만들었다. 종이창 밖으로 열 걸음을 채 못 가서 낮은 둑방이 있어 그리로 시장을 출입한다. 종이창에는 또 구멍을 내어 겨우 눈 하나를 붙일 만 했다.

12월27일 장이 섰다. 나는 너무도 무료해서 종이창의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하늘에서는 여전히 눈이 쏟아질 태세여서 구름인지 눈기운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으나 대략 정오는 이미 넘긴 때였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자가 있고, 소 두 마리를 몰고 오는 자가 있고, 닭을 안고 오는 자가 있고, 팔초어(八梢魚: 문어)를 들고 오는 자가 있고, 돼지의 네 다리를 묶어서 들쳐 메고 오는 자가 있고, 청어를 묶어서 오는 자가 있고, 청어를 주렁주렁 엮어서 오는 자가 있고, 북어를 안고 오는 자가 있고, 대구를 손에 들고 오는 자가 있고, 북어를 안고 대구인지 팔초어인지를 손에 들고 오는 자가 있고, 연초(煙草)를 겨드랑이에 끼고 오는 자가 있고, 미역을 끌고 오는 자가 있고, 섶과 땔나무를 등에 메고 오는 자가 있고, 누룩을 등에 지기도 하고 머리에 이기도 한 채 오는 자가 있고, 쌀부대를 어깨에 메고 오는 자가 있고, 곶감을 안고 오는 자가 있고, 종이 한 묶음을 겨드랑이에 끼고 오는 자가 있고, 접은 종이 한 묶음을 들고 오는 자가 있고, 대광주리에 무를 담아 오는 자가 있고, 미투리를 손에 잡고 오는 자가 있고, 짚신을 들고 오는 자가 있고, 큰 동아줄을 끌고 오는 자가 있고, 무명베를 묶어서 휘두르며 오는 자가 있고, 자기를 안고 오는 자가 있고, 동이와 시루를 등에 메고 오는 자가 있고, 자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오는 자가 있고, 나뭇가지에 돼지고기를 꿰어 오는 자가 있고, 오른손에 엿과 떡을 쥐고서 먹고 있는 어린아이를 업고 오는 자가 있고, 병 주둥이를 묶어서 허리에 차고 오는 자가 있고, 짚으로 물건을 묶어서 손에 잡고 오는 자가 있고, 고리짝을 등에 지고 오는 자가 있고,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오는 자가 있고, 바가지에 두부를 담아서 오는 자가 있고, 주발에 술과 국을 담아서 조심조심 오는 자가 있고, 머리에 짐을 얹어서 등짐까지 지고 오는 여자가 있고, 어깨에 짐을 메고 아이를 머리에 이고 오는 남자가 있고, 머리에 이고 또 왼쪽 겨드랑이에 물건을 낀 자가 있고, 치마에 물건을 담아 옷섶을 든 여자가 있고, 서로 만나 허리를 구부려 인사하는 자가 있고, 서로 말을 주고받는 자가 있고, 서로 화를 내며 떠들썩한 자가 있고, 손을 잡아당기며 희롱하는 남녀가 있고, 갔다가 다시 오는 자가 있고, 왔다가 다시 가는 자가 있고, 갔다가 또다시 오며 바삐 서두는 자가 있고, 넓은 소매에 긴 옷자락의 옷을 입은 자가 있고, 위에는 저고리 아래에는 치마를 입은 자가 있고, 좁은 소매에 긴 옷자락의 옷을 입은 자가 있고, 좁고 짧은 소매에 옷자락이 없는 옷을 입은 자가 있고, 방갓을 쓰고 흉복을 들고 있는 자가 있고, 승복과 중모자를 쓴 중이 있고, 패랭이를 쓴 자가 있고, 여자들은 모두 흰 치마를 입었는데 간혹 푸른 치마를 입은 자가 있고, 의관을 갖춘 어린아이가 있다. 남자는 삿갓을 썼는데 자주색 휘항을 십중팔구 썼고 목도리를 한 자가 열 중 두셋이다.

패도(佩刀)는 동자들 같이 어린 것들도 찼다. 나이 서른 이상 되는 여자는 모두 검은 조바위를 썼는데 그중 흰 조바위를 쓴 자는 복(服)을 입은 사람이다. 늙은이는 지팡이 짚고, 어린이는 손을 잡고 간다. 행인 가운데 술에 취한 자가 많은데 가다가 넘어지기도 한다.

급한 자는 달려간다. 구경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땔나무 한 짐을 진 자가 나타나 종이창 밖의 담장 정면에 앉아 쉰다. 나도 그제야 안석에 기대 누웠다. 세모라서 시장은 한결 붐빈다.” 이옥, ‘시기(市記)’ (안대회 지음,『고전 산문 산책』, 휴머니스트, 2008. p381〜383 인용)

18세기 말 시골 시장의 활기찬 풍경을 묘사한 이옥의 글과 비교해 볼 만한 글을 이가환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은 간결한 필치로 18세기 말 구획과 위치에 따라 제각각 달랐던 한양도성 안의 풍경과 풍습 및 풍속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상말에는 ‘천 리마다 풍습이 다르고, 백 리마다 풍속이 다르다’는 말이 있거니와 천 리 백 리마다 다른 데 그치겠는가? 지척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현재 도성은 사방 10리로 뻗어 있는데 북쪽은 백악(白岳: 북악)이요, 남쪽은 목멱산(木覓山: 남산)이며, 중간에는 개천(開川: 청계천)이 있다.

개천의 북쪽에는 운종가(雲從街)가 횡으로 나 있고 길을 끼고 저자가 늘어서 있다. 이 지역에 사는 백성들은 시정인(市井人)으로 이익의 추구에 능하다.

개천의 남북 쪽에는 모두 역관(譯官)과 의원들이 거주한다. 높은 벼슬아치가 되는 길이 막혀 있는 그들은 이익을 중시하고 문학을 가벼이 여긴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대를 이은 명가 집안이 있어 자중자애할 줄을 안다.

경복궁의 남쪽은 육조(六曹) 거리이고 그 서쪽은 빈 땅이다. 따라서 그곳에는 이서(吏胥)가 많이 사는데 업무에 노련하기는 하지만 질박하고 성실한 자가 적다.

도성의 동남쪽은 땅이 비습(卑濕)하고 평탄하고 넓기 때문에 군인들이 거주한다. 남새밭을 가꾸고 수예(手藝)로서 먹고 살기 때문에 시골 사람과 비슷하다.

도성의 동북쪽은 성균관 지역으로 유생들과 더불어 친하기 때문에 완악하면서도 의기(義氣)가 있다.

서북쪽에는 내시(內侍)가 살고 있어서 깊은 건물과 꼭 닫힌 문으로 집안을 단속한다. 서남쪽은 삼문(三門)에 가까워서 미천한 백성들이 조그만 이익을 영위하기 좋아한다.

사대부들은 곳곳에 섞여 산다. 각 지역 사람들은 제각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어 그 기호가 심하게 다르다. 그들의 차이는 복식과 언어, 행동거지로서 구별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백악(白岳: 북악) 아래 지역이 가장 외진데 생리(生理)를 영위할 것이 드문 대신에 시내와 바위, 숲의 경물이 아름답다. 따라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생업에는 큰 관심이 없고 결사를 맺어 동료들과 운을 나누어 시 짓기를 좋아한다. 곧잘 맑고 빼어난 시가 지어져 후세에 전할 만하다. 이 시권은 그 중의 하나다.” 이가환, 『금대집』, 『옥계청유권(玉溪淸遊卷)』 서문(序文) (이용휴‧이가환 지음, 안대회 옮김,『나를 돌려다오』, 태학사, 2003. p173〜175 인용)

따라서 여기에서 “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라는 필자의 주장은 바로 자연 풍경에서부터 삶의 풍경에 이르기까지 글은 모름지기 사실주의적 묘사와 표현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진경의 미학’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리얼리즘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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