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吾園) 장승업…“너희만 원(園)이냐. 나도 원(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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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吾園) 장승업…“너희만 원(園)이냐. 나도 원(園)이다”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4.1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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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⑧…조선 대표 화가의 삼원(三園))③

▲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하선’은 조선후기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렸다.
단원이나 혜원처럼 ‘원(園)’이라는 한자를 취해 호를 지은 인물 중 단연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는 장승업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를 거론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삼재(三齋)’와 ‘삼원(三園)’이다.

여기에서 삼재(三齋)는 진경산수화를 창시한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말한다. 그리고 삼원(三園)은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을 가리킨다.

특히 미술사(美術史)에서 ‘삼원(三園)’이라는 용어는 장승업이 스스로 오원(吾園)이라는 호를 지으면서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장승업이 이 호를 지은 이유가 다시없이 재미있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화가로 성공할 수 있는 탄탄한 배경을 애초부터 갖추고 있었다.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였던 스승 강세황이 존재했고, 신윤복은 도화서의 궁중화원으로 일찍이 임금의 초상화를 그릴 만큼 막강한 위치에 있던 아버지 신한평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승업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거지처럼 떠돌며 살다가 중국어 역관(譯官) 출신으로 종2품 당상관(堂上官)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까지 오른 이응헌의 집에서 하인 노릇을 하며 연명할 정도로 그 신세가 비참했다.

또한 당시 산수화의 대가로 명성을 떨친 혜산(蕙山) 유숙(劉淑)이라는 사람과의 한때 인연 이외에는 그가 누구로부터 어떻게 그림을 배웠는지에 대한 기록이나 이야기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장승업은 힘겹게 그림을 익히고 터득했다. 그러나 장승업이 그린 그림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천재적 솜씨에 매료되었다.

▲ 장승업이 그린 고종황제 어진
혜성과 같은 장승업의 등장은 19세기 중후반 조선의 화단(畵壇)을 충격에 빠뜨렸다. 19세기 말 개화기의 인물과 역사를 가장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로 유명한 매천(梅泉) 황현은 장승업의 그림에 열광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오원 장승업의 그림은 근대의 신품(神品)이라고 추앙받고 있어 웬만한 유력자(有力者)가 아니면 소장할 수 없다. 나는 금사(錦士) 박항래(朴恒來)에게서 이 그림을 얻어 간신히 소장해 병풍으로 꾸몄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공교로움과 묘함을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필치가 대단히 소방(疎放)하고 계산하지 않은 듯 가볍게 점철했는데도 자연스러운 가운데 그윽한 운치가 있다. 이런 것을 일컬어 신품(神品)이라고 하는가 보다.” (이재광 저, 『이달의 문화인물-조선 최고의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에서 재인용)

장승업이 사망한 후에도 그의 기구한 운명과 더불어 그림에 대한 찬사는 멈추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 때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썼던 언론인 위암(韋庵) 장지연은 『일사유사(逸士遺事)』의 ‘장승업’편에서 ‘신(神)이 모였다’거나 ‘신(神)이 도왔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일찍이 황현이 그랬던 것처럼 장승업의 그림을 가리켜 ‘신이 만든 작품’이라고 추켜세웠다.

“(장승업은)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집도 매우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없었다. 총각 때 떠돌아다니다가 한양으로 와서 수표교(水標橋)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응헌의 집에 붙어서 밥을 얻어먹고 살았다. 장승업은 어렸을 때 배우지 못해 문자(文字)에 어두웠다.

그러나 총명하고 지혜롭고 민첩하게 깨달아서 주인집의 글 읽는 아이들을 따라 다닐 적에 옆에서 듣기만 해도 거의 요령을 이해했다. 이응헌은 집에 원(元)나라와 명(明)나라 이래 명인(名人)들의 서화(書畵)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림을 익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관람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장승업이 매번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살펴보다가 마치 전생(全生)에 화가였던 듯이 문득 깨달음이 일어나니 신(神)이 모이고 뜻이 맞았다.

평생 붓 자루를 쥐는 방법도 몰랐는데, 하루는 홀연히 붓을 잡고서 손이 가는 대로 휘두르고 뿌려대니 매화가 되고, 난초가 되고, 바위가 되고, 대나무가 되고, 산수(山水)와 영모(翎毛 : 새나 짐승을 그린 그림)가 되었다. 모든 그림이 자연스러워서 하늘이 이루어놓은 듯 신운(神韻)이 있었다.

주인 이응헌이 이 그림들을 보고 크게 놀라서 ‘누가 이것을 그렸느냐?’고 묻자 장승업은 사실대로 말하였다. 이응헌은 ‘이는 신이 돕는 것이다’고 하며 종이, 붓, 먹 등 여러 기구들을 제공해주고 오직 그림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그림에 대한 명성이 세상에 날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장승업의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거마(車馬)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

또한 20세기 초 서예가이자 비평가로 명성을 떨친 위창(葦滄) 오세창은 1117명에 달하는 우리 역사 속 역대 서예가와 화가들을 집대성해 평론해놓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라는 책에서 장승업이 그린 ‘산수화와 인물화’를 두고서 보배로 여길 만하다고 극찬했다.

“오원 장승업은 그림에 있어 능숙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문자(文字)를 알지 못했으나 명인(名人)의 실물 그림이나 글씨를 두루 보고 또한 한 번 본 것은 잘 기억하여 비록 몇 해가 지난 후에 보지 않고 그려도 가느다란 털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고 행동에 거리낌이 없어서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술상을 차려놓고 그림을 청하면 곧바로 옷을 벗어젖히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절지(折枝)와 기명(器皿)을 많이 그려 주었다. 그 밖에 산수(山水)와 인물(人物) 또한 정교하고 치밀하게 그려서 더욱 보배로 여길 만하다.”

장승업은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자신의 그림에는 “신운(神韻)이 생동한다”고 떠들었다.

▲ 장승업의 ‘화조영모도 10폭 병풍’
그가 자신의 호를 ‘오원(吾園)’이라고 지은 것도 남다른 자부심 때문이었다. 장승업은 당시 사람들이 최고의 화가로 추앙하던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을 가리켜 자신도 그들 못지않은 천재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단원과 혜원을 향해 마치 “너희만 원(園)이냐. 나도 원(園)이다”고 일갈하듯 그는 ‘오원(吾園)’이라는 호를 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남다른 자부심 탓에 장승업은 돈과 권력, 명예는 물론 심지어 가정과 사랑마저도 하찮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어느 곳에도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은 채 평생 자신의 그림을 구하는 후원자의 사랑방과 술집을 전전하며 자유롭게 살았다. 궁중화원이나 임금이 내린 벼슬의 영예도 그에게는 구속이었고, 그림을 그려준 대가로 받은 엄청난 규모의 금전 역시 그를 주저앉히지 못했고, 어렵사리 얻게 된 가정의 울타리도 그리고 한때 사랑했던 기생의 품안도 그를 붙잡아둘 수 없었다.

호사가(好事家)들은 이러한 장승업의 삶을 가리켜 ‘순수한 예술적 정열’ 혹은 ‘자유로운 예술혼’이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실제 그의 삶은 간난신고(艱難辛苦) 그 자체였다.

장승업은 ‘취명거사(醉暝居士)’라는 또 다른 별호(別號)를 갖고 있었다. 이 별호처럼 술은 그의 삶과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이 술 때문에 그는 평생 ‘천재’와 ‘광인(狂人)’ 사이를 넘나들며 살았다.

술 때문에 바뀐 그의 운명은 앞서 소개했던 장지연이 지은 『일사유사』의 ‘장승업’편에도 자세하게 나와 있다. 여기에는 장승업이 고종(高宗)에게 정6품 감찰(監察)이라는 관직을 임명받아 출세할 기회를 얻었는데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에 수차례 달아났다 이내 잡혀오기를 거듭하다가 끝내 관직을 버리고 도망가 버린 일화가 실려 있다.

“장승업의 그림에 대한 명성이 궁궐에까지 퍼지니 임금이 불러들이라 명령하여 궁중에 조용한 방 하나를 마련해주고 병풍 십수첩(十數疊)을 그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음식을 감독하는 자에게 경계하기를 술을 많이 주지 못하게 했다. 하루 두서너 번에 걸쳐 두세 잔만 주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자 장승업은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에 견딜 수가 없어서 달아나 숨을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경계가 엄중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그림물감과 도구를 구하러 나갔다 오겠다고 문지기를 속이고 밤을 틈타 도주했다. 임금이 이 사실을 듣고 즉시 장승업을 잡아오게 하여 더욱 더 엄중하게 경계를 세우고 그림을 완성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승업은 자신의 두건과 도포를 벗어버리고 금졸(禁卒)의 갓과 의복을 훔쳐 입고서 다시 달아났다. 이렇듯 달아났다 붙잡히고 또 달아나기를 두 세 번이나 되풀이하였다.

마침내 임금이 크게 노하여 포도청에 명을 내려 장승업을 잡아 가두도록 하였다. 당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이 임금을 곁에서 모셨는데 아뢰기를 ‘신이 본래 장승업을 잘 아니 저의 집에 가두어 두고 그림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임금이 이를 허락하자 민영환은 이내 사람을 시켜 장승업에게 그 뜻을 알려주게 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의관(衣冠)을 벗겨 감춘 다음 별실 안의 처소에 가두고, 시중을 드는 자에게 매우 엄중하게 감시하고 지키라고 하였다. 매일 술과 음식을 풍성하게 제공하되 다만 지나치게 취하지 않도록 하였다.

장승업은 민영환이 잘 대우해주자 처음에는 감사하게 여겨 정신을 집중하고 고요히 앉아 그림 그리는 일에 온전히 뜻을 두는 듯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민영환이 궁궐에 들어가고 하인이 잠시 감시를 소홀히 하자, 장승업은 홀연히 상가(喪家) 가에서 염불하고 귀신과 술을 대작하여 쓰러지도록 마시고 미친 듯이 노래를 불러대는데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문지기가 낮잠에 깊이 빠져든 틈을 타 다른 사람의 방립(方笠)과 상복(喪服)을 훔쳐 입고 마침내 술집으로 달아나 숨어버렸다.

민영환이 여러 사람을 시켜 수색해 장승업을 잡았다가 아주 깊숙한 곳에 가두었지만 다시 예전처럼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 끝내 그림 그리는 일을 마칠 수 없었다.”

더욱이 평생 그를 따라다닌 술 때문에 오늘날에도 미술평론가와 감정가들은 그의 작품의 ‘진위(眞僞)’ 여부를 판별하는 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술만 있다면 장승업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려주었다. 게다가 술에 취하면 부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줬다고 한다. 종이와 먹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 때문에 장승업이 생전에 그린 작품이 수천 점에 달했는데, 이 그림들에는 수많은 종류의 낙관들이 찍혀있고 또 낙관 이외에 이름만 써넣은 것도 많다고 한다. 술에 취해서 낙관을 잃어버리기 일쑤여서 그림에 다양한 낙관이 찍히게 되었고, 또 아무 장소에서 아무에게나 그림을 그려주다 보니 낙관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보니까 낙관을 찍지 않고 이름만 써 준 사례도 숱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더욱이 술에 취해 미처 완성하지 못한 그림은 다시 청탁자들의 강압에 못 이긴 제자들이 그려주는 웃지 못할 해프닝까지 다반사여서 오늘날 장승업 그림의 ‘진위’를 가리는 게 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 장승업의 ‘호취도’
어쨌든 현재 장승업의 진짜 작품으로 확인된 것만 해도 140여 점에 달한다고 한다. 조선의 화가 중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장승업의 삶은 마치 ‘천재’와 ‘광기(狂氣)’ 사이를 넘나들며 힘겹게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간 빈센트 반 고흐와 닮아 있다. 다만 장승업은 살아 있을 때는 인정을 못 받다가 죽은 다음에야 명성을 얻었던 고흐와는 달리 생전이나 사후 모두 ‘천재 화가’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렇다면 장승업을 가리켜 천재 화가이니 안견, 김홍도, 정선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3대 화가 혹은 4대 화가라고 극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장승업이 앞서 소개했던 김홍도처럼 한두 가지 분야의 그림에서가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독보적인 솜씨와 재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났고, 꽃과 풀 그리고 나무 등을 배경으로 새와 동물을 그리는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에 출중했고, 도자기나 청동기 등 각종 기명(器皿 : 그릇)에다가 화초·과일·어물(魚物) 등을 그려 넣는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붓의 선이 갖는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백묘법(白描法), 그림의 소재와 대상을 세밀하고 정교하게 묘사하는 공필(工筆) 채색화법(彩色畵法), 이와는 정반대로 간략하고 대담하게 필묵을 사용하는 감필법(減筆法), 수묵의 농담을 여러 단계로 조절하여 입체감과 공간감을 표현하는 파묵법(破墨法) 등의 회화기법은 물론 근대적 회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선염(渲染) 담채법(淡彩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묘사와 표현 기법을 보여주었다. (이준구·강호성 편저, 『조선의 화가』, ‘장승업’ P151 참조)

이렇듯 조선 회화의 전통 기법과 근대적인 회화 기법을 동시에 보여준 장승업의 필력(筆力)은 그의 문하생(門下生)들에게 전해졌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심전(心田) 안중식과 소림(小琳) 조석진이다. 특히 이 두 사람은 장승업의 화풍과 화법을 배우고 익혀 20세기 초 근대 한국화의 문을 새로이 연 대가(大家)의 반열에 올랐다.

이들은 1911년 설립된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과 1919년 결성된 서화협회(書畵協會)를 통해 수많은 화가들을 길러냈다. 현대 한국화의 거장인 이상범, 변관식, 허백련, 김은호 등은 모두 이들의 손을 거쳐 장승업이 남긴 전통 화법과 근대 화풍을 배우고 익혔다. 그래서 미술사적으로 볼 때 장승업은 조선 회화와 근대 회화를 잇는 징검다리이자 토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장승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회화 전통이 근대 회화, 곧 한국화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오원(吾園)이라는 호에 남긴 남다른 자부심만큼 장승업이 한국 미술사에 남긴 족적은 높고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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