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개혁적?…정약용에 관한 오해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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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개혁적?…정약용에 관한 오해와 진실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4.05.08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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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사상가였던 정약용 대한 믿음은 오늘날 거의 절대적이다.

개혁적, 진보적, 근대적이었던 그의 학문과 사상은 합리적, 과학적, 반미신적 측면에서 해석되고 소개된다. 학계에서도 정약용의 이른바 ‘탈주자학적’ 논리가 지배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정약용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단순화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간 정약용연구가 제시해 온 ‘탈주자학’ ‘근대적’ ‘개혁적’ 등의 주된 경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정약용을 본 것이다.

김영식 서울대 동양사학과 명예교수는 신간 『정약용의 문제들』(혜안)에서 그동안 도외시됐던 정약용의 보수적인 측면들을 끄집어낸다.

김 명예교수에 따르면 정약용은 18세기 후반의 다양한 학문적, 사상적 조류들의 영향을 받았다.

우선 ‘서학’인 기독교와 서양 학문 외에도 중국의 경학 및 고증학 그리고 일본 고학파를 비롯한 여러 사상적 조류를 들 수 있다. 또 조선 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주자성리학과 북학파를 비롯한 여러 사상적 조류들도 당연히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정약용의 주된 지적 관심은 유가 학문 전통 안에 머물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정약용은 주자학의 폐단을 인식하고 원시유학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였으며, 그 과정에서 주자학의 개념들이나 주장들로부터 벗어나는 경우들이 많았다.

그간 정약용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많은 연구는 주로 이 측면을 대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많은 학자들이 이를 대체로 원시유학으로의 복귀 또는 ‘탈주자학’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김 명예교수는 정약용에게 ‘탈주자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정약용이 주자에게서 여러 불만스러운 점들을 보고 그를 고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주자학 이외의 많은 사상적 조류들과 학문적 경향들을 종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주자학 그 자체를 배격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자와 주자학의 틀은 여전히 그의 사상 전반의 기초로 남아 있었으며 그가 시도한 것은 이에 대한 수정·보완이었다.

정약용이 기본적으로 유가 전통에 속한 학자로서 유가 전통을 유지하고 그에 바탕한 조선 양반사회를 보존하는 데 주된 관심을 지녔던 것이기에 이는 당연했다고 김 명예교수는 생각한다.

물론 정약용이 조선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개선의 방안들을 제시했으며 그 같은 개선방안들에서 ‘근대적’ 성격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에게서 볼 수 있는 ‘근대적’ 요소와 측면들은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일원이었던 정약용이 서양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출연한 근대사회의 특성이 된 요소들을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주교, 과학기술, 술수와 미신 등 당시 조선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정약용의 태도는 이론적, 이념적이기보다는 현실적, 실용적이었다는 것이 김 명예교수의 생각이다.

오히려 조선 양반사회의 일원으로 그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목도하면서 흔들리는 사회의 근간을 유지, 지탱한 채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그의 희망이 이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특히 생애 후반 조선 양반사회의 중심으로부터 추락한 상황에서 그로부터 영영 낙오되어 배제될 것을 걱정하는 처지에서 정약용은 자신에게 남겨진 유일한 길인 학문적 작업을 통해 그 사회를 지탱할 길을 제시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능력과 성취를 인정받으려는 현실적인 태도를 보였음을 김 명예교수는 지적한다.

따라서 김 명예교수는 “근대적, 개혁적이라는 성격 대신 오히려 정약용의 학문과 사상에서 일관적이고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실용, 실천, 현실, 합리를 중시하고 추구하는 경향”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실용주의적’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지칭한다.

실용주의적 경향을 지녔기에 정약용이 근본주의자, 원칙주의자, 교조주의자가 될 수 없었고 주자학, 서학, 술수, 개혁정책 등 그의 여러 가지 관심사들을 두고서 쉽게 독단론에 빠지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실용주의자였기에 개혁적 성격을 띠게 되었지만 또 한계도 드러낼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김 명예교수는 정약용의 개혁적, 진보적, 독창적 면모를 무시하거나 깎아내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학문적 깊이나 폭 양쪽 모두에서 정약용이 당대 조선에서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정약용과 같은 세대인 서유구와 비교해 더 광범위한 지적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후속세대인 이규경이나 최한기보다 더 치밀하고 체계적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약용이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과 상관없이 갑자기 돌출한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상황과 배경 속에서 출현했음을 전제로 한다.

당시 조선 사회의 여건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사람으로 이해될 때 오히려 그의 성취와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그 같은 성취들을 가능하게 한 당시 조선 사회의 잠재력과 활력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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