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제 세력 없는 상인 권력의 폭주…『왜 상인이 지배하는가』
상태바
견제 세력 없는 상인 권력의 폭주…『왜 상인이 지배하는가』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6.07.10 10: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대인들은 사회를 직군(職群)의 총합으로 보았다. 각각의 직군은 고유한 성격과 관습이라는 에토스(ethos)를 조성한다고 믿었다.

중세 인도에서는 카스트(caste)라는 단어로 직군 체계를 명명하고 있었다.

카스트는 사회 집단들을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는 자기 이익에 충실한 조직으로서뿐 아니라 사상 체계와 생활양식의 총화로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이런 조직들은 특정 직업과 경제 구조가 변해도 지역과 역사를 불문하고 살아남는다.

신간 『왜 상인이 지배하는가』(원더박스)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근대사를 가르치는 데이비드 프리스틀랜드가 카스트라는 고대의 틀을 소환해 인류 역사의 동력을 이해하는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안한다.

저자는 인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군대, 상업조직, 관료제 등과 같이 권력 행사에 있어 높은 성과를 달성하는 네트워크들, 즉 상인·군인(전사)·현인이라는 세 카스트의 역할과 가치를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업적이며 경쟁적인 동기를 앞세운 상인 집단, 귀족적이며 군국주의적 동기를 앞세운 군인(전사) 집단 그리고 관료제적 또는 사제적 성향의 현인 집단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 세 카스트는 서로 대립하거나 협력하면서 평등을 지향하며 장인적 가치를 표방하는 노동자 집단을 억누르거나 구슬리며 권력을 쟁취하고 지배 질서를 형성해 왔다.

오늘날 상인 집단은 은행업과 교역 같은 비즈니스의 영역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은 복잡한 산업조직에서는 그리 강하지 않다. 이런 조직에서는 오히려 현인-테크노크라트 집단이 경영관리자로서 상인 집단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처음 세계적 패권을 쥐기 시작한 상인 집단은 자신들의 가치와 방식에 맞서는 세력과 맞닥뜨렸고 대응에 있어 강경책과 유화책으로 나뉘었다. 경쟁 세력이 심각한 위협을 가하면 강경하고 호전적으로 맞서며 필요할 경우 강한 무력을 지닌 귀족 집단과 손잡았다.

그러나 평소에는 온건파가 득세했다. 이들은 안락과 넘치는 소비를 약속하며 반대자를 포섭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19세기 말이 되자 전사 집단이 다시 지배자의 위치로 돌아왔다. 강경파 상인과 손잡은 전사 집단이 전 세계적으로 득세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귀환한 전사 집단은 현인-테크노크라트 집단의 지지도 등에 업었다. 대규모 군대까지 갖추고 이전보다 강력해진 전사 집단은 전무후무한 파괴적 과업에 나섰다. 세계 대전의 발발이다.

저자가 엮어 내는 권력 투쟁사를 따라가 보면 대개 카스트들은 동맹을 통해 힘을 키우고 서로를 견제해 왔지만 특정 집단이 패권을 잡을 때 그리고 그 실력 행사가 도를 지나치면 결국 격변의 시점이 찾아왔다. 이러한 격변의 결과물은 경제위기·전쟁 또는 혁명이었고, 그 뒤에는 다시 새로운 집단이 권력을 획득했다.

이제 상인 집단의 공세에 맞설 카스트들의 힘은 미미하다. 중국에서 거대한 노동력이 공급되는 바람에 서구 세계에서 노동조합은 힘을 잃었다. 무엇보다 상인 친화적 경제학 분파가 대세를 잡기 시작했다. 시장의 효율성을 맹신하는 이른바 ‘합리적 시장 가설’이 경제학자들의 굳은 신뢰를 얻으며 시장근본주의가 종교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지난 30년간 마땅한 견제 세력 없는 상인 집단의 패권이 지속되면서 경쟁·유연성·이윤을 맹신하고 다른 여러 가치를 희생시키는 질서가 확고히 자리 잡았고 그 결과 극심한 부의 격차·불평등·불안정이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상인 지배 체제의 맹점은 극명히 드러났지만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처방과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이제 상인집단을 제어할 적수는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됐고 대안으로 떠오를 법한 주요 카스트들은 이미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세계는 그저 공포감에 사로잡힌 채 다가오는 미래를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