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실학과 경제학의 거두 성호 이익…② 실학·경제학의 백과전서 『성호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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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실학과 경제학의 거두 성호 이익…② 실학·경제학의 백과전서 『성호사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8.24 0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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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체제 꿈꾼 경제학자
▲ 성호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성호사설』 30책 완질본의 별본(別本) 3책.

[조선의 경제학자들]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체제 꿈꾼 경제학자

[한정주=역사평론가] 숙종 시절 노론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남인들은 권력의 핵심부에서 배제당한 채 벼슬살이를 하거나 재야 지식인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이 같은 정치 상황으로 어느 당파보다 남인 계열에서 비판적인 현실 인식과 사회 개혁론이 많이 나왔고, 또한 주류 유학(성리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서양의 과학 기술이나 신문물 그리고 천주교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 상황 이외에 실학파 중 남인 계열의 인물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로는 단연 이익의 활약(?)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은 모두 이익이 닦아놓은 학문과 사상을 먹고 자랐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이익의 학문과 사상 세계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류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성리학의 틀에 안주한 채 사대부 권력을 옹호하고 사회 현실을 외면하기보다는 나라의 부강함과 백성의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실제 학문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익이 자신의 조카이자 제자인 이병휴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는 이미 실학(實學)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마땅히 실무에 뜻을 두고 헛된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 것이나 80세 되던 해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사람과 만나 대화할 때 일찍이 유술(儒術; 유학의 학술)을 갖고 말하지 않았네. 아무런 이익이 없기 때문이네’라고 한 것만 보아도 그가 추구하는 학문이 주자 성리학과는 크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탓에 이익은 ‘조선이 개국한 이후로 시무(時務)를 안 사람은 아무리 손꼽아 봐도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 두 사람’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부국강병과 사회 개혁론이야말로 이익이 추구하는 실제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정통성에 얽매이지 않았던 이익의 학문 세계는 서학(西學), 즉 서양의 천주교와 과학 기술에 대해서도 아주 개방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훗날 남인 계열에서 서학 혹은 천주교에 매혹당한 학자들이 다수 나온 배경에는 이러한 이익의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학풍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주자 성리학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익의 학문 세계는 경제, 풍속, 문화, 천문, 지리, 문학, 종교, 음악, 과학 기술 등 학문의 전 분야로 뻗어 나갈 수 있었다.

또 자신의 직전(直前) 제자들이나 후대에 자신을 사숙한 제자들에게 ‘지식과 정보, 문헌과 기록의 무궁무진한 보고(寶庫)’를 남겨줄 수 있었다. 그 보고가 다름 아닌 『성호사설(星湖僿說)』이다.

이익은 40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책을 읽거나 사색하면서 느낀 점 혹은 제자들과 묻고 답한 내용을 기록해두었는데, 그의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집안의 조카들이 이것들을 정리해 편찬한 책이 『성호사설』이다. 당시 이익은 이 책에 스스로 지은 서문(序文)을 썼다.

“『성호사설』은 성호 노인의 희필(戱筆; 자신의 글을 낮추어 일컫는 말)이다. 성호 노인이 이것을 지은 것은 무슨 뜻에서일까? 특별한 뜻은 없다. 뜻이 없었다면 왜 이것이 만들어졌을까? 성호 노인은 한가로운 사람이다. 독서의 여가를 틈타 전기(傳記), 제자백가서, 문집, 문학, 해학이나 혹은 웃고 즐길 만해 두고 열람할 수 있는 것을 붓이 가는대로 적었다. 이렇게 많이 쌓였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처음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권책에 기록하게 되었는데 훗날 제목별로 그대로 나란히 늘어놓고 보니 다시 두루 열람할 수 없어서 다시 문별(文別: 만물문·인사문·경사문·시문문 등)로 분류해 드디어 한 질의 책을 만들었다. 이에 이름이 없을 수 없어서 ‘사설(僿說)’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익, 『성호사설』 ‘자서(自序)’

비록 이익은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도 ‘자질구레하고 번잡한 글’이라는 ‘사설(僿說)’을 책의 제목으로 삼았지만 실제 이 책은 당시의 학문, 사상은 물론 사회 현실과 실생활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총망라되어 있는 ‘백과전서(百科全書)’였다.

이익의 학문과 사회 개혁론이 완숙한 수준에 이른 40세부터 죽음을 맞이하기 3년 전까지 저술한 글들이 모두 담겨 있는 만큼 18세기 조선 실학과 경제학의 ‘종합 보고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 책에서 이익은 반계 유형원의 ‘농업 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한 중농주의’ 사회 개혁론을 계승한 자신의 경제사상을 드러냈는데, 그것은 크게 ‘한전론과 상공업 억제 그리고 화폐 철폐’로 요약할 수 있다.

유형원이 주장한 균전론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익의 한전론은 기본적으로 대토지 소유의 폐해를 개혁하기 위한 토지제도라는 진보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유형원이 상공업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고 더욱이 화폐 유통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반면 이익은 화폐 유통과 상공업의 발달을 농업 중심의 경제 체제를 파괴하는 원인으로 보고 대단히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이렇게 본다면 유형원이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한 토지 개혁론이 이익에 이르러 한발 더 나아갔지만 상공업 발달과 화폐 유통에 관한 인식은 오히려 후퇴한 측면이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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