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하는 사람이 정상인가 아니면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정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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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하는 사람이 정상인가 아니면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정상인가?”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0.07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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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⑨…역설(逆說)의 미학①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⑨…역설(逆說)의 미학①

[한정주=역사평론가] 역설(逆說)의 미학은 전복(顚覆)의 미학이다. 이것을 뒤집어 저것이라고 하고, 저것을 거꾸로 이것이라고 하는 반어(反語)의 수사법(修辭法)과 작법(作法) 그리고 논리를 구사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과 견해와 주장을 직설(直說)의 화법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역설의 미학을 얼마나 적절하게 구사하느냐 하는 것이 문인의 역량과 자질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글을 쓰려면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할 화법이자 작법이다.

먼저 살펴볼 글은 허균이 자신의 서실의 이름을 ‘통곡헌(慟哭軒)’이라고 붙인 조카 허친에게 써준 ‘통곡헌기(慟哭軒記)’이다.

조카 허친이 출세와 이욕을 좋아하고 부귀영화를 즐거워하는 세태에 따르지 않겠다는 뜻에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버리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통곡(慟哭)’을 선택해 자신의 서실 이름을 ‘통곡헌’이라 짓고, 여기에 다시 허균은 기문(記文)을 지어 ‘세상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과 싫어하고 슬퍼하는 것의 관계’를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내 조카인 친(親)이 서실을 짓고 통곡헌(慟哭軒)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를 본 세상 사람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즐거운 일이 아주 많다. 그런데 어찌하여 통곡(慟哭)으로 집의 이름을 삼는단 말인가? 더욱이 통곡이란 부모를 잃은 사람이나 남편을 떠나보낸 아녀자가 아니면 하지 않는 법이다. 또한 사람들은 그 울음소리를 아주 싫어한다. 그대 홀로 세상 사람들이 꺼려하는 일을 구태여 이름으로 삼아 걸어놓을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 물음에 내 조카 친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세상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로 하는 사람이다. 세상 유행이 기쁨을 즐기므로 나는 슬픔을 좋아한다. 세상 사람들이 즐거움을 누리므로 나는 또한 근심을 즐거워한다. 부귀영화를 얻으면 기뻐하지만 나는 내 몸을 더럽히는 것처럼 여겨 내팽개친다. 가난하고 천박하며 궁색한 삶을 본받아 몸을 거처할 뿐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일과 반대로 하려고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선택하자면 통곡보다 더한 것은 없다. 이것이 내가 서실의 이름을 통곡헌이라고 지은 까닭이다.’

나는 이 얘기를 듣고서 조카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통곡에서 도(道)가 있다.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 중에 가장 쉽게 느껴 마음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슬픔만한 것이 없다. 마음속에 슬픔이 일어나면 반드시 통곡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슬픔이 일어나는 이유 또한 한 가지가 아니다. 때를 만나 일을 시행하지 못해 상심하여 통곡한 사람으로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한나라 때 학자 가의가 있고, 흰 실이 본래 색깔을 잃은 것을 슬퍼해 통곡한 사람으로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묵적(묵자)이 있고, 동쪽과 서쪽으로 나뉜 갈림길을 미워해 통곡한 사람으로는 전국시대에 위아설(爲我說: 나만을 위한다)을 주창한 양주가 있다. 길이 막혀 통곡한 사람으로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학자인 완적이 있고, 불우한 운명을 슬퍼해 자신을 세상 밖으로 내팽개쳐 통곡한 사람으로는 당나라 때 문장가인 당구가 있다. 이들은 모두 품은 뜻이 있었기 때문에 통곡했지, 이별에 상심하거나 억울한 마음 혹은 하찮은 일 때문에 통곡하지 않았다.

오늘날은 그들 시대와 비교해 보면 더욱 말세이고, 나랏일은 나날이 잘못돼 가고, 사대부의 행실 또한 야박하다. 친구 간에 서로 배척해 내달림이 갈림길이 나뉜 것보다 더 심하고 어진 사람이 곤란을 겪음이 단지 길이 막혀 있는 것에 비할 수 없다. 모두 세상 바깥으로 내달릴 마음만 품고 있다. 만약 오늘날의 시대를 옛사람에게 보여준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알 수 없다. 아마 통곡할 틈도 없이 모두 은나라의 어진 사람인 팽함이나 초나라의 지사인 굴원처럼 돌을 끌어안거나 모래를 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할 것이다. 내 조카가 서실의 이름을 통곡이라고 한 이유 역시 이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통곡이라는 이름에 대해 비웃어서는 안 된다.’

마침내 비웃던 사람들이 깨우치고 물러갔다. 이에 내가 기록을 남겨 여러 의혹들을 풀었다.” 허균, 『성소부부고』, ‘통곡헌기(慟哭軒記)’

허균이 조카인 허친에게 써준 ‘통곡헌기’에는 그의 남달랐던 사회비판 의식이 담겨져 있다. 허균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꺼려하는 통곡(慟哭)을 서실(書室)의 이름으로 삼아 내건 조카 허친의 행동을 비웃는 이들을 오히려 통렬히 나무란다.

허균의 글을 읽다 보면 마치 나라의 정치가 어지럽고 양반 사대부의 행실은 야박하고 파당을 지어 싸우느라 친구 간에도 서로 배척하고 어진 사람은 곤란을 겪고 뜻이 있는 사람은 모두 은둔할 생각에 여념이 없는 세상을 보고서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정상인가 아니면 통곡하는 사람이 정상인가 하고 묻는 듯하다.

세상 모든 일과 반대로 하겠다는 자신의 뜻을 밝히고 나서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통곡(慟哭)’이므로 서실의 이름을 ‘통곡헌(慟哭軒)’으로 하겠다는 허친의 생각 또한 위선과 허식 그리고 독선과 편견에 휩싸여 있는 양반 사대부 사회의 윤리나 도덕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비판의식이 담겨져 있다. ‘그 삼촌에 그 조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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