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로움을 만나야 비로소 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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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움을 만나야 비로소 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0.14 0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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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⑨…역설(逆說)의 미학②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⑨…역설(逆說)의 미학②

[한정주=역사평론가] ‘다급하게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오히려 보이지 않고 멈춰서야 비로소 보일 것이다’는 뜻을 담아 ‘식파정(息波亭: 물결을 잠재우는 정자 곧 근심을 내려놓고 쉬는 곳이라는 뜻)’이라 이름붙인 정자에 기문을 써준 조선 전기의 대표 문인 양촌 권근의 ‘식파정기(息波亭記)’ 또한 ‘역설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개성 서북쪽의 여러 산골짜기 물이 모여 기다린 강이 되어 바다로 흐른다. 그 건너다니는 곳을 벽란도(碧瀾渡)라고 부른다. 개성과 가까워 건너다니는 사람이 많다. 산과 가까워 물살이 빠르고 바다 근방이어서 조수가 거셌다. 건너다니는 사람들이 큰 낭패로 여겨 나라에서 벼슬아치를 두어 관리하도록 했다. 강기슭 언덕 아래에는 예전부터 초루(草樓)가 있는데 벽란 나루를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 기거하는 곳이다.

강은 바다와 하늘에 맞닿아 있고 산은 들판 언덕을 가로질러 구불구불하고 아득해 아무리 보아도 끝이 없으니 진실로 빼어난 풍경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서둘러 바삐 건너다니는 나루터이지 풍경을 유람하는 곳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모두 다급하게 건너려고만 하고 올라가 아름다운 풍경을 눈여겨 여유를 찾지 못한다.

그런데 임오년 가을 철성 이공(李公)이 우도(右道) 관찰사로 있을 때 여기 와서 머물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빼어난 풍경에 푹 빠져 버렸다. 그리고 벼랑 위에 올라가 괜찮은 자리를 보고 가시덤불을 베어내고 사토를 깎아 새로운 정자를 세웠다. 이 정자의 이름을 ‘식파정(息波亭)’이라고 붙여 내걸었는데, 이것은 풍경이 빼어난 곳에 정자를 지어 건너다니는 사람들의 고단함과 괴로움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벽란 나루를 맡아 관리하는 사람들이 순찰하는 여가에 반드시 와서 쉬곤 했는데 일단 발을 들여 놓으면 며칠 밤씩 묵으면서 시를 읊조리고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또한 예전 초루시(草樓詩)의 시운을 빌려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곤 했다. 그런데 정자의 경치가 빼어나 예전 초루를 읊은 시보다 훨씬 더 나았다.

그 이듬해 여름 이공이 다른 벼슬자리를 맡아 돌아와서는 내게 식파정에 관한 글을 부탁했는데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이공은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두터워 선을 베풀기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그 뜻과 절개가 곧아 ‘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세상의 즐거움은 나중에 찾는다’는 말을 항상 마음에 두었다. 항상 이 구절을 스스로 외우고 읊조려 자신도 그처럼 되기를 바랐다.

천하절경이라는 중국의 악양루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슬픔과 즐거움 역시 모두 그 자신의 감정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공은 이미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즐기고 다른 사람들의 근심을 식파(息波), 곧 물결을 잠재우듯 하려고 했다. 이는 이공의 마음 속 근심과 즐거움이 모두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데 있었지 자신의 감정에 달려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마음속의 재주와 덕성이 갖춰져 있어 밖으로 나타나는 것 역시 그와 같다’고 했는데 세상을 위해 근심하고 즐거워한 공덕이라 할 만하다.” 권근, 『양촌집(陽村集)』, ‘식파정기(息波亭記)’

우리나라 문인들의 작품 중 명문(名文) 만을 선별해 엮어 놓은 『속동문선』에 실려 있는 강희맹의 여러 글 중 ‘벼루를 기피하는 설(忌蚤說)’은 지극히 하찮고 해로운 벼룩이라는 벌레를 빌어 “해로움을 만나야 비로소 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반어(反語)의 수사법을 기가 막히게 구사한 한 편의 쾌작(快作)이자 희작(戱作)이다.

“나는 본래 벼룩을 꺼려하지 않았다. 여름날 항상 다 헤진 대나무 자리에 누워 있으면 벼룩이 떼로 몰려와 나를 공격했다. 그래도 태연하게 누워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내 옆 사람은 몸부림을 치며 무릎을 침상에 대지 못했지만 나는 코까지 골며 자곤 했다. 날이 밝아 쳐다보면 옆 사람은 벼룩에 물린 자욱이 온몸을 덮고 있는데 유독 나는 몸에 붉은 자욱 하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세상에 벼룩이 어디 있느냐?’면서 다른 사람들이 벼룩에 물렸다고 하면 비웃곤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여관에 묵으면서 한밤중에 앉아 있는데 벼룩 떼가 먼지 속에서 나와 쉴 새 없이 나를 공격하며 물어뜯었다. 날카로운 송곳 끝으로 찌르는 듯 괴로워 한시도 손을 멈추지 않고 온몸을 긁어댔다. 그리고 시중드는 사내아이를 불러 불을 켜 보면 홀연 사라졌다가 다시 누우면 곧장 처음처럼 온몸을 물어뜯었다.

세 번이나 시중드는 사내아이를 불러 잠자리를 옮겼지만 벼룩 떼의 공격을 모면할 수 없어 옷을 모두 벗고 맨몸으로 이불에 꿇어 앉아 날을 지새웠다. 그렇게 날을 지새우고 나니 온 정신과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했다.

벼룩에게 혹독한 고통을 겪고 난 다음부터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독충 중에 벼룩보다 더한 놈은 없다. 뱀과 호랑이 정도야 방 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조심스럽게 움직이면 얼마든지 모면할 수 있다. 그런데 벼룩이란 놈은 잠자리에 들어박혀서 온몸을 물어뜯는다. 칼날로도 위협할 수 없고 그물로도 잡을 수 없다. 사람의 몸에 들어붙어 해로움이 더욱 깊으니 벌레의 독으로 친다면 세상에 벼룩보다 더한 놈은 없다.’

이때부터 벼룩을 보면 늘 오래도록 눈살을 찌푸리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내가 예전에 그토록 벼룩을 꺼려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데 지금 와서는 왜 이렇게 벼룩을 꺼리게 되었는가? 벼룩이 예전에는 내게 너그럽게 대하다가 이제 와서는 재앙을 주는 것일까 아니면 벼룩을 대하는 내 마음이 달라진 것인가?’라고 말하곤 했다.

단정하게 앉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나는 젊었을 때 잠이 많았다. 그래서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잠자리에 들어 인시(寅時: 오전 3~5시)에 일어났다. 그때는 누우면 곧장 잠이 들어서 죽은 송장마냥 온몸의 기운이 멈추고 호흡이 희미해 누가 불러도 들리지 않고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으며, 추워도 추운 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 몰랐다.

기운이 고요히 가라앉고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이 잠잠해 제 아무리 천둥벼락이 이마를 지나치고 물불이 앞을 막아도 두려워할 줄 몰랐다. 하물며 하찮은 벌레에 지나지 않는 벼룩 때문에 근심했겠는가! 이것은 내 기운과 감정이 잠과 더불어 한가지이고 뜻이 나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운과 감정이 잠과 한가지이기 때문에 바깥의 사물이 해를 입히지 못하고, 뜻이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잠자는 일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근심과 걱정이 가슴에 가득 차 정신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예전에 내게 해를 끼치지 않았던 일도 때때로 나를 덮쳐 해를 입히는 것이 너무도 심하다. 그래서 마음이 한번 고통을 느끼면 마침내 원수처럼 여겨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방어하고 교묘하게 피하려고 해도 벗어나지 못한다. 기운이 온전하지 않고 뜻이 이미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사물이 나를 찾아와 해를 입히고, 뜻이 이미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온갖 사물이 내 근심과 걱정이 됨을 알 수 있다. 온전히 잠에만 빠져도 바깥의 사물이 감히 내게 해를 입히지 못하는데 하물며 내 기운과 감정을 잘 다스리고 길러 닦는 데 있어서랴!

내가 벼룩을 꺼리면서부터 양생(養生: 건강 관리)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기쁨·분노·욕심·두려움·근심의 다섯 가지 성정을 타고 나 바탕을 이루고 모든 지각을 모아 마음이 된다. 그래서 남녀가 거처하는 집, 음식의 맛과 영양, 부귀공명은 사람에게 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을 해롭게 한다.

어찌 벼룩만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고 하겠는가?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 한가지로 뚜렷하면 온갖 사물을 부릴 수 있고 모든 해로움에서 벗어나 홀로 설 수 있다. 반면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누어져 있으면 온갖 사물이 나를 부리고 모든 해로움이 한꺼번에 생겨난다.

남녀가 거처하는 곳에 욕심이 침범하면 주색(酒色)에 빠지는 해로움이 생겨나고 음식의 맛과 영양에 대한 욕심이 침범하면 사치와 호사에 빠지는 해로움이 생겨나고 부귀공명에 대한 욕심이 침범하면 영화로움과 욕됨이 교차하는 해로움이 생겨나고 마음이 온갖 생각으로 나누어지면 이익과 손해가 드러나면서 근심과 걱정이 생겨난다.

또 근심과 걱정이 생겨나면 은혜와 원한이 자라나고 은혜와 원한이 자라나면 적과 원수가 나타나고 적과 원수가 나타나면 사람의 원기가 좀먹게 되고 원기가 좀먹게 되면 반드시 오래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노자는 ‘하늘은 한가지로 얻어 맑고 땅은 한가지로 얻어 편안하다. 귀신을 한가지로 얻어 신령스럽고 곡신(谷神)은 한가지로 얻어 가득 차고 만물은 한가지로 얻어 낳고 왕후는 한가지로 얻어 천하를 곧게 한다’고 했다.

또한 ‘덕을 두텁게 품고 있는 자는 어린아이와 비슷하다. 독벌레도 쏘지 못하고 사나운 짐승도 잡아가지 못하며 날쌘 새도 채갈 수 없다’고 했다.

참으로 한가지로 얻어 덕을 두텁게 품고, 덕을 품어 온갖 사물이 해를 입히지 못하면 양생(養生)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강희맹, 『속동문선』, ‘벼룩을 기피하는 일에 관한 설(忌蚤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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