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강병 위해서라면 오랑캐라도 섬기고 배워야”
상태바
“부국강병 위해서라면 오랑캐라도 섬기고 배워야”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0.17 08: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의 경제학자들] 북학과 중상주의 경제학의 리더 박지원(朴趾源)①
▲ 연암 박지원의 영정.

[조선의 경제학자들] 북학과 중상주의 경제학의 리더 박지원(朴趾源)①

[한정주=역사평론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북학파, 즉 중상주의 경제학파의 핵심 사상가였다. 북학파 학자들을 ‘연암 그룹’이라고 부르는 이유 역시 이들이 박지원을 중심으로 사상적인 사제(師弟)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북학파는 ‘청나라의 선진 문명과 과학기술을 배우고 받아들여 조선을 부국강병의 나라로 개혁하는 것’을 학문의 모토로 삼았다.

당시 조선의 지배계층인 성리학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청나라는 오랑캐인 여진족이 세운 야만국에 불과했다. 그들은 “오늘날 중국을 통치하는 자는 오랑캐다. 그들에게 학문을 배운다는 것이 나는 부끄럽다”고 여겼다.

더욱이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춘추의리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는다는 북벌론에 사로잡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청나라의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러나 박지원이 활동한 18세기 중·후반 청나라는 이미 ‘강희제-건륭제의 융성기’를 거치면서 세계 제일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물론 선진 문명과 과학기술까지 보유한 초강대국이었다.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는 이렇듯 세계적인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풍조가 조선을 더욱 궁색하고 누추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오히려 “보잘 것 없고 조그마한 이 외진 나라를 한번 크게 개혁하여 중국 수준으로까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청나라를 배우는 ‘북학(北學)’에 뜻을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즉 조선을 크게 한번 개혁해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비록 오랑캐라고 하더라도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기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 박지원과 북학파 학자들의 큰 뜻이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우리나라를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사회경제 수준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원대한 비전과 포부를 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박지원은 1781년 북학의 동지이자 제자인 박제가가 저술한 『북학의』에 서문을 써 주면서 자신이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쓴 내용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아 마치 같은 사람이 지은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박지원은 박제가가 청나라에 들어가 눈여겨보고 또한 열심히 배워온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하게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또한 박지원이 청나라 연행(燕行)길에서 배워온 것이기도 했다(박제가는 1778년, 박지원은 그보다 늦은 1780년에 청나라에 다녀왔다).

“내가 연경(북경)에서 돌아왔더니 초정(楚亭: 박제가)이 직접 지은 『북학의』 내편과 외편 두 권을 보여주었다. 초정은 나보다 앞서 연경에 다녀왔다. 당시 그는 농사, 누에치기와 가축 기르기, 성곽 축조와 집짓기, 배와 수레의 제작에서부터 기와와 삿자리, 붓과 자 등을 제작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눈여겨보고 마음속으로 비교하고 따져보았다. 자신의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없으면 반드시 저들에게 물어보았다. 또한 마음속으로 비교해 따져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반드시 그들에게 배워서 익혔다.” 박지원, 『북학의』 ‘서문’ 중에서

박지원과 박제가가 연행을 통해 보고 배워온 것은 다름 아닌 ‘이용후생(利用厚生; 산업을 잘 다스려서 민생의 일용에 이롭게 하며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모든 일)의 학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박지원의 북학이 청나라의 선진 문명과 과학기술을 숭상하는 곳에 있지 않고 오로지 조선의 경제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