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과 웃음 속에 칼날이 감춰져 있고 분노와 꾸짖음 속에 진심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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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과 웃음 속에 칼날이 감춰져 있고 분노와 꾸짖음 속에 진심이 숨어 있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0.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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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⑨…역설(逆說)의 미학④
▲ 예헌 김진자 화백의 풍속화. <전남완도수목원 제공>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⑨…역설(逆說)의 미학④

[한정주=역사평론가] 또한 강희맹은 ‘훈자오설’ 중 ‘오줌통에 관한 설(溺桶說)’에서는 아버지 덕택에 부귀와 권력을 누리던 양반가의 자식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대개 세상의 인심이란 “농담과 웃음 속에 칼날이 감춰져 있고, 분노와 꾸짖음 속에 진심이 숨어 있다”는 또 다른 역설의 가르침을 준다.

“큰 저잣거리의 으슥한 곳에는 관가에서 설치해놓은 오줌통이 있다. 저잣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급하게 볼일을 봐야 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인데 양반사대부의 신분으로 몰래 그곳에다 오줌을 누는 사람은 ‘불결지죄(不潔之罪)’를 당했다.

저잣거리 근처에 사는 양반 가문에 평소 행동이 변변치 못한 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몰래 드나들며 그곳에다 오줌을 누었다. 이 사실을 그 아버지가 알고 심하게 호통치고 금지시켰으나 그 자식은 말을 듣지 않고 매일같이 거기다 오줌을 누었다.

이 오줌통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 양반가 자식의 행동을 제지하고 싶었으나 그 아버지의 위세가 두려워 감히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불쾌하게 여겼으나 양반가의 자식은 오히려 즐거워했다. 그리고 무슨 대단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 생각해 간혹 사람들이 두려워 감히 오줌을 누지 못하면 오히려 ‘겁쟁이구만. 왜 그토록 두려워한단 말인가? 나는 매일같이 오줌을 눠도 아직까지 아무런 탈이 없는데 말이야.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하면서 비웃곤 했다.

자식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그를 불러 ‘저잣거리는 수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며 여러 사람의 눈이 지켜보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너는 양반가의 자손으로 공공연히 대낮에 저잣거리 속으로 들어가 오줌을 누고 있다. 부끄럽지도 않느냐? 다른 사람의 눈에 미천하고 사악하게 보일 뿐 아니라 자칫 화가 따를 수도 있는데, 무슨 이로울 게 있다고 감히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나무랐다.

그러나 그 자식은 ‘저 또한 처음에는 양반가의 자식이 그곳에다 오줌 누는 모습을 보면 얼굴에다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가 오줌이 너무나 급해 짐짓 모른 척하고 그 오줌통에다 오줌을 누니 참 편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거기에 오줌을 누지 않으면 마음이 편안치 못했습니다. 처음 저잣거리 사람들은 제가 그곳에 오줌 누는 모습을 보고 모두 비웃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점차 비웃는 자도 줄어들고 또한 제지하는 자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제가 오줌 누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비난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오줌을 눈다 하더라도 양반가의 체통이 상할 리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자식의 황당한 대답에 아버지는 ‘슬픈 일이로다. 네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버림받은 존재가 되어 버렸구나. 처음에 사람들이 모두 비웃은 것은 너를 양반가 자식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네가 비웃음을 당하면 스스로 멈추기를 바랐던 것이다. 중도에 점차 비웃음이 줄어든 이유는 오히려 양반집의 자식으로 여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옆에서 보면서도 아무런 비웃음이나 나무람이 없는 것은 너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거라, 개돼지 새끼가 길바닥에 오줌을 싼다고 해도 사람들이 비웃더냐.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데도 비웃지 않는 이유는 개돼지와 같은 부류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라고 했다.

이 말에 자식은 ‘옆에 있는 사람들은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는데 아버지만 잘못되었다고 나무라십니다. 소원한 사람은 공정하고 친한 사람은 사사로이 감정이 앞서는 법입니다. 그런데 왜 소원한 사람은 공정하다고 하는데 아버지께서는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저를 꾸짖으십니까?’ 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공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의 잘못을 보고도 너를 내다 버린 물건 취급하듯 거들떠보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도 않는다. 나는 오직 사사로운 감정이 있기 때문에 네 잘못을 보면 마음이 쓰리고 머리가 아파서 혹여 잘못을 고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사사로운 감정이 슬프지 않느냐? 부모가 없는 사람은 또한 나무라고 깨우쳐 주는 사람도 없는 법이다. 내가 죽고 나면 내 말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고 난 후 자식은 바깥에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늙은 아버지가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만 나무라고 꾸짖는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윽고 그 양반가의 자식이 평소처럼 오줌 누던 곳에 가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뒤에서 바람이 일 듯 혹독한 매가 이마를 때려 정신없이 쓰러져 기절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후 때린 자를 붙들고 ‘어떤 죽일 놈이 감히 나를 때렸느냐? 내가 이곳에 오줌을 눈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온 저잣거리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떤 죽일 놈이 감히 나를 건드리느냐?’며 화를 냈다.

그러자 매를 때린 자가 말하기를 ‘온 저잣거리 사람들이 10여년을 참고 지내다가 이제야 분풀이를 한 것이다. 네가 아직 주둥아리를 놀리는구나’라고 했다. 그리고 그를 꼼짝달싹 못하게 묶어서 저잣거리 한복판에 두고 다투어 기왓장과 자갈을 던졌다.

호되게 혼이 나고 그 자리에 쓰러진 양반가의 자식을 그 집 사람들이 떠메고 돌아갔는데 한 달이 다 지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 다음에야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슬프게 울면서 스스로를 나무랐다. ‘아버지 말씀이 꼭 들어맞는구나. 농담과 웃음 속에 칼날이 감춰져 있고 분노와 꾸짖음 속에 진심이 숨어 있다는데 이제 아무리 그 지극한 이치를 들으려고 해도 얻을 수가 없구나.’

그 자식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의 위패 앞에서 이마를 조아리며 예전 버릇을 고치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리고 마침내 훌륭한 사대부가 되었다고 한다.” 강희맹, 『사숙재집』, ‘훈자오설’ 중 ‘오줌통에 관한 설(溺桶說)’

더욱이 사람의 어리석음이란 “인생에 지극한 즐거움이 있어도 즐거움으로 여기지 않고 지극한 병이 있어도 병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라는 반어(反語)의 수사법을 통해 사람의 병이란 참으로 쉴 줄 모르는 데 있다고 한 ‘만휴정기(萬休亭記)’ 또한 역설의 방식으로 휴식의 이치를 잘 표현하고 있는 글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의 수많은 문인 중 역설의 수사법과 반어의 작법을 가장 적절하게 구사할 줄 알았던 이는 강희맹이라고 하겠다.

“나의 벗 홍군(洪君)은 금양의 별장에서 산다. 이곳은 산수의 풍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임오년 여름날 나는 같은 고향 사람으로 활 쏘는 재주를 겨루고 술잔을 기울이는 향사(鄕射)의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 그때 술이 서너 차례 돌자 홍군이 술잔을 치켜들고 ‘나는 대를 이어 이곳에 살아서 정자의 나무가 이제 큰 나무가 되었네. 그런데 아직껏 정자의 이름조차 써 붙이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내 내가 ‘서글프구나. 그대는 인생에 지극한 즐거움이 있어도 즐거움으로 여기지 않고 지극한 병이 있어도 병으로 여기지 않음을 아는가?’ 하고 물으니 홍군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사람의 병이란 쉴 줄 모르는 것인데 세상은 쉬지 않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긴다. 사람의 생명은 그다지 길지 않아 백 년의 수명을 누리는 사람은 만 명 중 하나 혹은 둘에 불과하다.

가령 백세를 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어렸을 때와 늙고 병든 햇수를 제외하면 건강하게 산 시간은 불과 40~50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 사이에 성공과 실패, 영화로움과 욕됨, 즐거움과 슬픔, 이로움과 해로움이 내게 병이 되고 정신과 기운을 해친 경우를 제외하면 웃으며 즐겁고 쾌활한데 쉴 수 있었던 날 역시 몇 달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러한데 백 년도 못 살면서 끝도 없는 근심과 걱정을 감당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에 골몰하느라 끝내 쉴 날을 기약하지 못한다.

옛날 당나라 시대 말기의 시인 사공도(司空圖)가 왕관곡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삼휴정(三休亭)’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첫째는 재주를 가늠해 보니 쉬는 것이 마땅하고, 둘째는 분수를 헤아려 보니 쉬는 것이 마땅하고, 셋째는 늙어서 망령이 들고 귀까지 멀었으니 쉬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데 일의 기미와 단서가 만 가지나 되는데 어찌 쉬어야 할 까닭이 특별히 이 세 가지뿐이겠는가?

지금 그대가 백 리를 다스리는 지방 수령이 되어 세상 권력에 맛을 들여 잘 모르겠지만 다섯 말의 곡식을 탐내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쉬는 것에 비교한다면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또한 손에 홀을 공손히 쥐고 허리를 조아리고 얼굴에 억지웃음을 짓는 일과 쉬는 것을 비교한다면 어느 것이 더 나은가?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몸을 굽혀 따르고 갖은 애를 다 쓰면서 속을 태우면서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일과 쉬는 것을 비교한다면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마음속으로 이로움과 해로움을 따져보고 스스로 뜻을 높게 가져 늙어 죽은 다음에야 그치는 것을 쉬는 것과 비교한다면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하겠는가? 인간 세상의 즐거움 가운데 휴식보다 더한 것은 없는데도, 반대로 쉬는 것을 병이라고 여기니 수긍하기 어렵다.

금양은 비록 작은 고을이지만 산과 숲이 있고 강과 호수도 있다. 또한 논밭은 생계를 유지할 만하고 손님과 벗이 있어서 충분히 즐길 만하다. 이것은 그대와 내가 모두 알맞다고 여기는 일이다.

그대와 더불어 산과 숲 사이에서 거닐고 우주 안을 곁눈질하며 사물과 다투지 않고 정신을 모아 생각을 맑게 하여 가만히 나를 잊고 만 가지 일을 모두 내려놓는다면 병은 스스로 물러가고 즐거움은 스스로 나를 찾아올 것이다.

저 사공도의 ‘세 가지 휴식’과 비교해 보아도 쉴 이유가 너무나 많지 않은가? 그러므로 정자의 이름을 ‘만휴정(萬休亭)’이라고 붙이길 권한다.” 강희맹, 『속동문선』, ‘만휴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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