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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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
  • 한정곤 기자
  • 승인 2014.05.30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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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사회를 바꾸려면』…‘선거가 끝나면 노예로 돌아간다’
 

2011년 3월11일 동일본의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 물질이 유출되는 사상 초유의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6월29일 일본 수상관저 앞으로 대략 10만에서 20만명으로 추정되는 시민들이 몰려들어 평화적으로 원전의 ‘재가동 반대’를 소리 높여 외친다.

대규모로 이어진 탈원전 데모는 일본에서는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30~40대 남녀가 주류를 이루고 외국인과 해외언론도 함께 이 데모에 참가했다.

이는 과거의 ‘운동’이나 ‘데모’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조직 동원이 없는 순수 자유참가자들이 거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천재(天災)’에 그치지 않는다. 공업화 사회와 경제성장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원자력발전은 현대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오히려 원전은 일본 사회문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정경유착, 안전문제, 경제적인 비용문제 등 그전부터 일본 내에서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었고 이미 시민들은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원전 사고 이후 사람들의 분노를 산 것은 일본 정부의 정보제공과 대응방식이었다.

20여년에 걸친 장기 경제침체 속에서 정부정책에 대한 불만이 고조돼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터에 원전 사고가 터졌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규모의 사고에서 그 대응을 잘못하면 국가를 망가뜨려버릴 정도의 엄청난 충격을 안긴다.

이것은 비단 원전 사고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동안 쌓여 있던 문제와 불만은 시민들의 분노를 표출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후 정부의 의사결정 방식이 국민의 안전을 지켜줄 마음도 국민의 뜻을 반영할 생각도 없고 정계의 기득권층에서 결정하려 했기 때문에 불만의 수위가 올라갔다.

신간 『사회를 바꾸려면』(동아시아)은 일본, 더 나아가 전 세계에서 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갖고 있는 사회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 게이오대(慶應大) 역사사회학과 오구마 에이지 교수는 ‘탈공업화’(‘리스크 사회화’ 또는 ‘글로벌화’)의 조류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모두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고용과 가족의 불안정화, 격차의 확대, 정치의 기능부전, 민주주의의 한계봉착, 공동체의 붕괴, 노조의 약체화, 편협한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의 증대, 이민자 배척운동이나 원리주의의 대두 등은 전 세계 각국에서 발견된다.

2011년 12월30일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지진 후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답한 사람이 약 71%, 데모에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44%였다.

그러나 데모에 참가하는 것은 저항감이 든다고 답한 사람이 63%,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답한 사람 중 ‘세상은 간단히 바뀌지 않는다’고 한 사람이 67%였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인들에게 맡기면 된다고 한 사람은 전체의 3%에 불과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은 누구나 갖고 있다. 때문에 현재의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실제로 바꿀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정치인들에게 맡기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정치에 관여해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는다.

오구마 에이지 교수는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직접행동과 참여를 강조한다.

‘데모를 해서 무엇이 바뀌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데모를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대화를 해서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하면 대화를 할 수 있는 사회, 대화가 가능한 관계를 만들 수 있고, 참가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하면 참가할 수 있는 사회, 참가할 수 있는 자신이 탄생한다고 말한다.

그는 단순히 데모를 비롯한 사회운동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태동부터 그것이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로 발전된 역사적 흐름을 짚으며 사회운동의 가능성과 행동을 모색한다.

데모라는 말의 어원인 데모스 크라토스(demos cratos)는 민중의 힘, 즉 피플즈 파워(people’ power)라는 의미다. 이것은 다시 말해 민중에게 힘이 깃들어 있는 상태다.

피플즈 파워에는 참가하는 사람들 모두가 고조되는 것이 중요하다. 똑같은 숫자의 사람들이 참여한 데모일지라도 참가자들에게 힘이 깃들어 있는 데모와 그저 일당을 받고 참가한 데모는 질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난다.

오구마 에이지 교수는 데모에는 사회를 바꾸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데모 등의 사회운동을 통한 직접행동과 참여는 ‘나의 생각이 대표된다’는 의식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소수일지라도 행동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크다.

숫자가 많을 필요도 없고 한 사람의 행동, 한 장의 사진, 한 편의 시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데모보다 투표가 낫다’나 ‘로비를 통해 정치가를 움직인다’는 등의 사고방식은 대단히 협소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은 ‘나는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해서 의원이나 정당을 선택하고 법률을 통과시키는 것이 사회를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18~19세기의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에 입각한 사고방식일 뿐이다.

원래 자유주의, 대의제, 민주주의 세 가지를 조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대의제는 ‘선거에 의한 귀족정’이며 자유주의는 권력의 개입을 가능한 한 줄이자는 입장, 민주주의는 모두 함께 결정하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때문에 대의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을 때 데모나 사회운동이나 국민투표를 비롯한 직접민주주의로 보완해나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데모나 국민투표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파괴행위’라는 일련의 주장도 있지만 대의제가 원래 봉건제의 산물이기에 데모가 봉건제의 파괴행위일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의 파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오구마 에이지 교수는 선거에 대한 사고도 다른 접근방식을 제시한다.

투표를 통해 대표가 선출되는 체제는 유력자나 대규모 조직을 등에 업은 사람이 승리하게 된다. 이것은 루소가 말한 것처럼 ‘선거가 끝나면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탈공업화 사회에서는 고용 및 가족은 불안정해지고 격차는 심화된다. ‘나’는 정당에 의해 대표되지 못하고 갈수록 정치 또한 불안정해진다. 이런 가운데 돌발적 인기를 얻는 정치가나 극우정당이 보수정당이나 노동정당을 위협하기도 한다.

때문에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나 세계금융공황 등이 발생했을 때 실업자나 불안정한 노동자의 증가는 폭동 등의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것은 유럽 등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현상이다.

오구마 에이지 교수가 데모나 사회운동 등 직접행동과 참여를 강조하는 이유는 현대 사회가 탈공업화 사회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탈공업화 사회는 자유롭고 선택 가능성과 다양성이 증대된 사회다. 현대는 인터넷을 이용해 전 세계 어디서나 수많은 선택지와 다양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간혹 고용 및 가족의 불안정, 범죄의 증가, 데모 및 사회운동을 인터넷의 영향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지만 기술은 사용자의 세계관과 사회기반의 변화가 없으면 사회를 바꾸는 원인으로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같은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

대의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또한 공개와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기든스의 표현에 따르면 ‘대화민주제’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자치회와 공청회, 집회·데모 등 직접민주주의의 활력을 통해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그러나 일부는 대화에 의한 조정보다 ‘강한 리더’가 필요하다는 성향을 보인다. 그것은 종래의 ‘조정형’ 정치가 대화가 아닌 이해관계자들끼리 사전교섭을 통해 ‘조정’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형태를 바꿔야 정치부재와 포퓰리즘을 막을 수 있다.

근대과학·정치·경제는 주체가 객체를 조작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정치 또한 민중을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체’와 ‘객체’는 서로 만들고 만들어지는 관계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조작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개와 대화에 의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나가야 한다.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를 도입하려는 데모와 사회운동은 정권과 대립하는 상태라면 ‘대립하는 목소리’가 되지만 정권이 거기에 응해주면 ‘대화하는 목소리’가 된다고 오구마 에이지 교수는 말한다.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생각이 전혀 없는 정부가 자신들을 무시하고 기득권을 장악한 세력끼리만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황을 용서할 수 없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일본의 탈원전 데모에서 사람들이 바랐던 것이라고 그는 분석한다.

이것은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느 시대에서나 품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문제’가 세상에 드러나는 형태는 다르지만 이런 보편적인 생각과 연결될 때 일어나는 운동은 커다란 힘을 지닌다고 말한다.

‘인간은 개체가 아니라 행위와 관계와 역할의 연결체’이고 가만히 있으면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어떻게든 알아서 해준다는 감각이 통하는 시대가 아니다.

비록 정치가나 관료나 대기업이 부정행위를 벌일지라도 유능하기 때문에 맡길 수 있고 사회 구조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체념한 채 무관심하게 지내도 괜찮다고 여길 수 있는 시대도 역시 지났다.

 
‘차가운 벽에 둘러싸여 목소리를 낼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타인의 눈으로 볼 때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 ‘벽’의 일부일 수 있다.

관계는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관계는 기다리거나 나서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사회를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꿔야 하고 사회는 이미 바뀌고 있고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오구마 에이지 교수는 주장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도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Still, let us not disarm, even in unsatisfactory times. Social injustice still needs to be denounced and fought. The world will not get better on its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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