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이 심한 사람은 스스로 병든 사실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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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심한 사람은 스스로 병든 사실을 알지 못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1.18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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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⑨…역설(逆說)의 미학⑦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⑨…역설(逆說)의 미학⑦

[한정주=역사평론가] 정약용 또한 반어(反語)의 작법과 역설(逆說)의 수사법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던 대표적인 문인이다. ‘깨어있는 삶’과 ‘취해 있는 삶’ 사이의 관계를 역설적으로 묘사한 ‘취몽재기(醉夢齋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면 누구라도 필자의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즉 병이 정말로 심한 사람은 자신이 병든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병이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대개 병이 심하지 않으며, 정말로 미친 사람은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짜 미친 사람이 아니다.

또한 자신의 삶을 가리켜 스스로 깨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깊이 취했거나 잠들어 있는 사람인 반면 스스로 ‘취몽(醉夢)’, 곧 술에 취해 잠들어 꿈속에 있는 듯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깨어서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머리가 젖은 채 토하다가 웃다가 화내다가 욕설을 퍼부으면서 비칠비칠 길거리를 지나간다. 이는 술에 취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 중에 술에 취했다고 하면 크게 원통하다고 하면서 스스로 취하지 않았다고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눈을 감고 코를 골면서 때때로 빙긋이 웃다가 잠꼬대 한다. 이것은 꿈에서 높은 벼슬에 오르거나 평소 탐내던 금은보화를 한아름 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잠에서 깨지 않는 한 그는 스스로 꿈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병이 심한 사람은 스스로 병든 사실을 알지 못한다. 스스로 병이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대개 병이 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친 사람은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쉽게 알지 못한다. 스스로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짜 미친 것이 아니다. 사악하고 음란하며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스스로 그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잘못을 고칠 수 있다.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은 취한 사람이다. 그는 비분강개하고 강직한 성격이 몸을 망치고 뛰어난 재주가 끝내 재앙을 부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가 취한 것이 비록 술에 취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분명 크게 취한 사람이다.

이 때문에 그는 크게 원통해하며 울분을 쏟아냈고 자신이 취하지 않았음을 변명하려고 ‘나 홀로 깨어 있다’고 했던 것이다.

장자는 이미 깨어 있던 사람이다. 그래서 장수한 팽조 같은 사람과 어린 나이에 죽은 사람을 다르게 보지 않고 오래 살고 짧게 삶을 동일하게 보았다. 이것은 환하게 깨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때문에 장자는 ‘꿈에서 또 꿈을 꾼다’고 말했던 것이다.

대개 스스로 본 사실을 돌이켜 관찰하면서 깨달았거나 깨우쳤다는 뜻을 지닌 ‘성성(惺惺), 각(覺), 오(悟)’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깊이 취했거나 잠들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서재에 ‘취몽(醉夢: 술에 취해 자면서 꾸는 꿈)’이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이 있다면 분명 술과 꿈에서 깰 기미가 있는 사람이다.

황군(黃君)은 어려서부터 자신을 닦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비록 세상사에 젖어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꿋꿋이 분발하여 볼수록 맑고 깨끗했다. 모습은 순수하고 찌꺼기가 없고 말은 신중해 꾸밈이 없었다. 세상에서 파리 마냥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사람이나 돼지 마냥 게으르게 쉬기만 하는 사람과 비교한다면 분명 깨어서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겠다.

하루는 그가 나를 찾아와 ‘저는 취생몽사(醉生夢死 : 술에 취한 듯 살다가 꿈을 꾸듯 죽는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 서재의 이름을 취몽(醉夢)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글을 지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라고 했다. 나는 취몽(醉夢)에 대해 본래 하고자 하는 말이 있었으므로 글을 써서 건네주었다.” 정약용, 『다산시문집』, ‘취몽재기(醉夢齋記)’

또한 정약용은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중에도 독서하고 섬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서실(書室)인 사촌서실(沙村書室)에 부친 글에서 ‘조그마한 것과 큰 것’과의 관계를 역설적으로 표현하면서 ‘조그마한 것 속에 큰 것이 있고, 큰 것 속에 조그마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흑산도와 같은 조그마한 섬의 백성들도 한양과 같은 큰 땅의 백성들과 다르지 않지 때문에 조그마한 땅의 백성을 가르치는 일을 조롱하고 큰 땅의 백성을 가르치는 일을 부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마치 박지원이 지은 『예덕선생전』에서 이덕무가 말한 “깨끗한 가운데 깨끗하지 않는 것이 있고, 더러운 가운데 더럽지 않은 것이 있다”는 역설적 표현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는 글처럼 보인다.

역설의 방법을 통해 박지원이 ‘신분 차별’을 비판하고 있다면 정약용은 ‘지역 차별’을 비판한다고나 할까!

“누에치는 집에는 여러 종류의 잠박(蠶箔: 누에치는 데 사용하는 채반)이 있다. 그 중 큰 것은 넓이가 잠실(蠶室)을 온통 차지하고 작은 것은 잠실(蠶室)의 4분의 1 정도 된다.

더러 잠실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나눈 다음 그 중 한 부분에 잠박을 놓곤 하는데 누에들은 좁은 상자 안에서도 편안하게 자라며 여유롭게 산다. 지나가다가 이러한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대개 큰 잠박을 보고는 아주 부러워하면서도 좁은 상자 안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누에를 보고서는 은근히 비웃음을 지곤 한다.

그러나 현명한 아낙네가 질 좋은 뽕잎을 골라 법식에 따라 먹이면 누에는 세 번 자고 세 번 깨어나서 다 자란 후에는 실을 토해내어 고치를 만들어낸다. 이 고치를 켜서 실을 만드는데 조그만 잠박의 누에 또한 큰 잠박의 누에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아아!! 어찌 누에만 그렇겠는가. 세계도 모두 잠박이라 할 만하다. 하늘이 백성을 여러 섬에 퍼뜨려놓은 것은 마치 누에치는 아낙네가 여러 잠박에 누에를 펼쳐놓은 이치와 같다. 만약 우리들이 섬을 잠박에 비유해보면 큰 것은 중국이나 서역의 대하국(大夏國: 서하)라고 할 수 있고 작은 것은 일본이나 유구국(琉球國)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것은 추자도․흑산도․홍의도․가가도의 여러 섬이라고 하겠다.

지나가면서 보는 사람이 큰 땅을 부러워하고 조그만 땅을 비웃는 것은 잠박을 보았을 때와 똑같다. 그러나 진실로 박학(博學)한 사람이 있어서 옛 기록과 서책을 많이 익힌 다음 법식에 따라 가르치면 옳고 그름을 따져 사물의 이치를 분명하게 분별하고 해석하게 될 무렵에는 학업을 공경하고 여러 사람과 더불어 잘 어울려 성인도 되고 현인도 되며 문장학도 익히고 경세학(經世學)도 익힐 수 있다. 그러므로 조그마한 섬의 백성들도 큰 땅의 백성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내 형님 손암선생(정약전)께서 머나먼 남녘 조그마한 섬인 흑산도(黑山島)에서 유배생활을 한 지 7년이다. 그곳의 어린아이 5~6명이 형님을 따라서 서사(書史)를 배웠다. 형님은 이미 초가집 두어 칸을 짓고 사촌서실(沙村書室)이라고 이름 붙여 방(榜)을 써서 달았다. 그리고 내게 그 서실에 대한 글을 지어달라고 하기에 누에치는 잠박에 비유하여 이렇게 쓴다. 정약용,『다산시문집』‘사촌서실기(沙村書室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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