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서구 도시개발 프로젝트의 산물 ‘서울’…『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상태바
일본식 서구 도시개발 프로젝트의 산물 ‘서울’…『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6.12.20 1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 안국동에서 이화동에 이르는 율곡로 일부 구간은 종묘와 창덕궁·창경궁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 도로는 1932년 완공됐다. 당시 도로 부설을 두고 조선 황실(순종)과 전주 이씨종약소를 중심으로 한 조선 지배세력과 일반 식민지 조선인의 시각은 달랐다.

일반 조선인들은 ‘종묘의 존엄’보다는 ‘교통의 편리’라는 근대적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교통의 편리라는 근대적 기준을 식민지 권력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출산업단지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영등포와 경인지역은 일제의 전쟁을 위한 공업지대 개발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30년대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이들 지역에 대한 도시개발을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현한 것이다.

신간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이데아)은 1910년 병합부터 시작된 식민지 수도 ‘경성의 탄생’과 도시 개발의 과정을 통해 지금에 이르는 현대 ‘서울의 기원’을 풀어낸다.

지금의 현대 서울을 이해하기 위해 식민지 시기 경성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실제 현대 서울은 식민지 시기 경성의 청사진과 겹쳐진다. 많은 변화가 있어왔지만 기본 골격과 변화의 방향은 해방 이전인 1910~1945년 설계돼온 바탕에서 기원한다.

당연히 설계자들은 ‘우리’가 아닌 ‘일본 제국’이었다. 식민지 시기 경성은 수도로서 특별한 지위를 잃었다. 공식적으로는 일제의 일개 지방도시, 구체적으로는 일제의 ‘외지’인 식민지 조선, 더 나아가 경기도 도청 소재지로 격하됐다.

그러나 조선시대 500여년간 수도였던 서울의 ‘역사성’을 일제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통치의 핵심 기구가 밀집한 도시로서 경성은 식민지 ‘수도’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가운데 일제는 경성의 도시공간을 개조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지속했다. 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다양한 갈등과 결과의 방대함은 다른 도시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탓에 20세기 한국 도시의 발달은 전국 도시의 ‘서울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식민지 시기 경성의 변화는 8·15 이후 서울의 변화로 연결된다. 나아가 현대 한국 도시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책에서는 식민지 시기 경성 도시계획을 가상의 공간에서 행해진 도상 연습이 아니라 식민통치의 여러 국면에 조응해 그 일환으로 시행됐거나 또는 식민통치라는 제약 속에서 굴절을 거듭한 역사적 과정을 그린다.

때문에 식민지 권력이 시도한 일련의 공간 개조 프로젝트와 함께 이런 시도의 목적 혹은 결과인 공간구조의 변화 양상, 그것이 주민 생활에 미친 영향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