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와 기회는 항상 함께 다닌다”…조선사 최고의 거상 임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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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와 기회는 항상 함께 다닌다”…조선사 최고의 거상 임상옥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1.03 08: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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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③ “상황 불리하고 불확실할수록 공격적 투자가 큰 뜻 이룬다”
▲ 임상옥 상상도.

[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③ “상황 불리하고 불확실할수록 공격적 투자가 큰 뜻 이룬다”

[한정주=역사평론가]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최상의 방법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사마천은 “농업이 공업만 못하고, 공업이 상업만 못하다”면서 비단에 수를 놓는 일보다는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최하류의 생업이라고 하는 상업이 가난한 사람들이 부를 얻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마천의 이론은 고대 중국의 수많은 부자와 상인에 관한 사례를 분석해 얻은 결과였다.

‘상업이 최상’이라는 사마천의 부자론은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나라의 개국과 멸망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경제력을 과시한 부자들은 대부분 토지(농업) 부자가 아닌 상인(상업) 부자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고구려 황후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과 신라 출신의 동아시아 해상왕 장보고이다.

조선시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토지 부자는 만 석 이상의 재물을 소유하기 힘들었지만 중국 혹은 일본과의 국제 무역과 도고 활동에 나선 역관 혹은 거상 등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제력을 과시했다.

이 때문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남쪽으로는 일본과 무역하고 북쪽으로는 중국의 연경(북경)과 무역해 수백 만금의 재물을 모은 사람이 한양에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개성, 평양, 안주상인의 순서라고 지적했다.

이렇듯 국제무역으로 거대한 재물을 쌓은 조선 상인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임상옥은 청나라와의 인삼 무역권을 독점해 부의 규모면에서 어느 누구도 오르지 못한 독보적인 위치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당시 그가 쌓은 부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관한 기록이 황현의 『매천야록』에 남아 있다.

“의주 사람인 임상옥은 재물을 모으는 일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조선과 청나라 양국에서 이득을 얻어 쌓은 부가 왕실과 견줄 만 했다. 북경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이름을 들먹인다.”

임상옥이 태어난 의주는 만상(灣商: 의주상인)의 본거지로 조선·청나라 간 국제무역의 거점 도시였다. 그이 아버지 또한 만상이었는데, 이 때문에 임상옥은 어렸을 때부터 청나라 언어를 배울 수 있었고, 또한 청나라에 관한 정보와 지식에도 해박했다.

임상옥이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북경에 드나들며 본격적인 대청(對淸) 무역에 나선 나이는 18살이었다. 그러나 임상옥이 만상을 따라 연경을 드나든 첫 10년간은 뼈아픈 실패와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는 그러한 쓰라린 경험들을 통해 국제무역에서는 무엇보다 신용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상도(商道)와 더불어 국제무역 시장이 움직이는 원리, 곧 상리(商理)를 깨달았다.

당시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조선 상인들이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삼이라는 막강한 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인삼을 선호한 청나라 상인들 때문에 인삼 거래는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었다.

임상옥은 누구보다도 뜻과 야망이 컸던 인물이다. 임상옥은 만약 자신이 대청 인삼 무역권을 독점할 수만 있다면 조선의 상인들 중 어느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재력을 차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작은 부자는 한 사람의 노력으로도 이룰 수 있지만 큰 부자는 나라의 도움이 있어야 이룰 수 있는 법이다.

◇ 부의금 5000냥의 승부수
임상옥은 이러한 상업의 이치를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임상옥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박종경의 도움을 받는다면 자신이 소원하는 인삼 교역 독점권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때 박종경은 자신의 누이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인 데다가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실세였다. 그러나 박종경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숱한 상인들을 나 몰라라 하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임상옥에게 막대한 이득이 남는 인삼 독점권을 선뜻 내줄 리가 만무했다. 임상옥의 구상과 계획은 누가 보더라도 무모하고 터무니없어 보였다.

임상옥은 먼저 자신의 뜻과 재력이 어느 누구도 좇아오지 못할 정도로 크다는 사실을 박종경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자신이 그만한 능력과 재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나라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때마침 박종경의 집안에 초상이 나자 임상옥은 주저하지 않고 부의금으로 5000냥을 내놓았다. 만약 임상옥의 계산대로 박종경이 그의 뜻과 재력을 알아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파산당할 위기에 몰릴 수도 있는 거액이었다. 그러나 임상옥은 “위기와 기회는 항상 함께 다닌다”는 자신만의 경영 철학으로 일을 밀어붙였다.

결국 임상옥의 계산대로 5000냥의 부의금을 받아든 박종경은 조선에도 이처럼 배포 큰 상인이 있었던가 하고 감탄했고 이후 임상옥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임상옥은 조선 상인 최초로 대청 인삼 교역권을 독점할 수 있었다.

당시 임상옥이 장악한 대청 인삼 무역 규모는 은자 100만 냥이 넘었고, 그가 나라에 낸 한 해 세금만 해도 자그마치 4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임상옥의 나이 갓 서른을 넘겼을 때 일이다. 이로써 임상옥은 나라 안에서 명성을 뽐내는 거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한편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상옥이 박종경의 정치적 후원에 힘입어 거상과 거부에 올랐다는 설과 함께 그가 우연한 기회를 통해 백삼(白蔘)을 홍삼(紅蔘)으로 제조하는 기술을 얻은 다음 홍삼 무역을 독점해 거상과 거부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19세기 중·후반 때 문신 이유원이 저술한 『임하필기(林下筆記)』 가운데 ‘홍삼의 시원(紅蔘之始)’에 이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전자의 이야기든, 후자의 이야기든 임상옥이 인삼을 통해 거상과 거부에 올랐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 인삼불매 동맹을 깨뜨리고 최고의 거상이 되다
그러나 임상옥이 나라 안의 거상을 넘어 북경에까지 크게 이름을 알리고 또한 왕실과 견줄만한 부를 얻은 사건은 그의 나이 마흔이 넘어 찾아왔다.

43세 때인 1821년 임상옥은 대규모 인삼 거래를 성사시킬 목적으로 청나라로 가는 사신 길에 동행했다. 당시 인삼은 청나라 상인들이 가장 탐낸 조선의 특산품이었다. 그만큼 많은 이득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상인들에게 인삼은 한 해 사업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거래였다. 청나라 사신 길을 따라 사행무역(使行貿易)에 나선 조선 상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인삼이 가져다주는 이득은 막대했다. 그것은 한 해 사업의 성패는 물론 자신의 상업 활동 전체를 좌지우지할 만큼 큰 거래였다.

임상옥은 이때 특히 사업의 명운을 걸만한 대규모 거래를 성사시킬 생각으로 엄청난 물량의 최상품 인삼을 사들여 북경에 들어갔다. 그런데 북경에 막상 도착해보니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 인삼을 싼 값에 매입하기 위해 일제히 ‘불매 동맹’을 맺어 일체의 인삼 거래가 중단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청나라 상인들은 사행무역이 지닌 특수성, 곧 사신이 돌아갈 때가 되면 인삼을 다시 조선으로 가지고 갈 수밖에 없는 약점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을 놓고 벌이는 보이지 않는 싸움이자 협상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상황의 주도권은 청나라 상인들이 쥐고 있었다. 인삼을 그대로 조선으로 가지고 돌아가면 큰 손해를 입는 조선 상인들은 불리한 입장에서 거래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조선 상인들은 크게 동요했다.

그러나 임상옥은 사신이 돌아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조선 상인들 못지않게 청나라 상인들도 초조해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만약 조선 상인들이 인삼을 팔지 않는다면 그들은 한 해 사업을 완전히 망치게 되고 결국 파산할 위기에 내몰릴 수도 있었다.

임상옥은 먼저 조선 상인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 청나라 상인들의 불매 동맹에 맞서려고 했다. 그러나 큰 손해를 볼까봐 전전긍긍하는 조선 상인들은 어떻게든지 더 값이 떨어지기 전에 인삼을 팔 생각에만 빠져 있었기 때문에 임상옥의 뜻에 따라 주지 않았다.

이에 임상옥은 아직 팔지 않은 조선 상인들의 인삼을 자신이 모두 사들여 버렸다. 그런 다음 그는 방심에 빠져 느긋해져 있는 청나라 상인들을 흔들어 놓을 목적으로 “모월 모일 모시에 인삼을 모두 불태워 버리겠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며 유포시켰다.

임상옥의 이 말은 청나라 상인들의 심리를 크게 동요시켜 불매 동맹을 약화시켰다. 어떤 사람은 한 번 해보는 협박이나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반면 어떤 사람은 자칫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드디어 약속한 모월 모일 모시에 이르러서 임상옥은 ‘설마 인삼을 모두 불태우겠어’하는 심정으로 나타난 청나라 상인들을 상대로 실제 쌓아 둔 인삼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제 임상옥이 내뱉은 말이 단순한 협박이나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청나라 상인들은 한편으로는 놀라고 한편으로는 혼란에 빠져 너나없이 임상옥을 만류하며 불매 동맹을 깨고 종전대로 거래를 하자고 제의해왔다.

▲ 충남 금산군 인삼박물관에는 청나라 북경상인들의 불매동맹에 맞서 임상옥이 홍삼을 불태우는 장면이 재현돼 있다.

임상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청나라 상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래 조건을 내놓으며 만약 자신이 제시한 가격에 인삼을 살 생각이 없다면 인삼을 모두 불태워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미 기세가 꺾일 대로 꺾여 버린 청나라 상인들은 임상옥이 내세운 조건을 무조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임상옥은 종전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인삼을 모두 처분했다. 자신이 조선에서 가져온 인삼에다가 조선 상인들의 인삼까지 사들여 비싼 가격에 팔았으니 이때 그는 천문학적인 이득을 얻었다.

그것은 손해를 보더라도 한 번 내뱉은 말에 대한 신용은 반드시 지킨다는 상도와 인삼을 살 수밖에 없는 청나라 상인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뛰어난 장사수완 곧 상리에다가 “상황이 불리하고 불확실할수록 공격적으로 투자해야 큰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경영 전략이 빚어낸 승리였다.

이 사건으로 천문학적인 이익을 얻은 임상옥은 일찍이 조선 상인 중 어느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부의 단계에 올랐고, 청나라 사람들이 오래도록 그의 이름을 회자할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 “재물이란 물과 같이 평등해야 하고 사람은 저울처럼 올바라야 한다”
임상옥은 박물군자(博物君子)라고 불릴 정도로 해박한 정보와 지식을 자랑했다. 문일평의 『호암전집(湖岩全集)』에 기록되어 있는 임상옥이 남긴 시 구절을 보면 그가 남 못지않은 학문 실력과 경영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경영 철학을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으로 나타냈다. 이 말은 “재물이란 물과 같이 평등해야 하고 사람은 저울처럼 올바라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상도』의 작가 최인호는 이를 “평등하여 물과 같은 재물을 독점하려는 어리석은 재산가는 반드시 그 재물에 의해서 비극을 맞을 것이며 저울과 같이 바르고 정직하지 못한 재산가는 언젠가는 그 재물에 의해서 파멸을 맞을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지나치게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경영 전략은 한 순간의 승리는 가져다줄 수 있지만 그렇게 얻은 이익과 재물은 오랫동안 유지하기 힘들다. 상황이 불리하고 불확실할수록 공격적으로 투자한다는 임상옥의 경영 전략은 지나치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행동하지 않는다는 경영 철학, 곧 중용(中庸)의 도리와 함께 했기 때문에 끝까지 성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임상옥의 말년을 보면 그가 재물과 이익만을 좇은 단순한 상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임상옥은 자신의 재물로 굶주린 백성과 수재민을 구제한 공적을 인정받아 상인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나이 54세가 되는 1832년 곽산군수(郭山郡守)가 되었고 1835년에는 종3품에 해당하는 구성부사(龜城府使)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그가 사재(私財)를 털어 공적 이익과 빈민 구제를 위해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문헌과 기록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세도 가문과 갈등을 빚다가 비변사의 논척(論斥)을 받아 사퇴한 다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자그마한 집에 거처하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임상옥의 호는 ‘가포(稼圃)’다. 이 호 역시 조선을 넘어 중국에서까지 이름을 날린 최고의 거상이자 부자였던 사람의 호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청빈하고 소박하다. 그 호에는 채마밭에서 곡식이나 채소를 가꾸며 살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말년의 임상옥은 대저택을 버리고 수많은 사람의 빚을 탕감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은 재산을 빈민 구제에 쓰게 한 뒤 자신은 자그마한 집에 살면서 채마밭을 가꾸며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호에 담긴 뜻과 지향처럼 살다가 세상을 떠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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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ㅎ오냐 2023-05-31 11:27:43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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