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시작된 갑신정변…경제사상의 계승자들
상태바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시작된 갑신정변…경제사상의 계승자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2.03 08: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의 경제학자들] 근대 개화파 경제학의 효시…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⑤
▲ 박규수의 재동 집 사랑방에 모여 갑신정변을 주도한 박영효(왼쪽부터),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조선의 경제학자들] 근대 개화파 경제학의 효시…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⑤

[한정주=역사평론가] 박규수의 토지개혁론은 박지원와 서유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아버지 박종채가 쓴 『과정록』를 읽고 『연암집』을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박규수는 할아버지 박지원의 토지개혁론인 한전론(限田論)을 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서유구과 박규수의 인연에는 박지원이 자리하고 있다. 어렸을 때 박지원의 집을 드나들며 학문을 배운 서유구는 평생토록 박지원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말년의 서유구는 박규수에 대해 남다른 기대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박규수 역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큰 감명을 받고, 그곳에 담긴 진보적인 경제사상에 깊은 존경심을 표현했다. 이러한 까닭에 박규수는 모든 토지의 국가 소유와 경자유전을 원칙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를 이상으로 삼은 박지원과 서유구의 경제사상에 깊게 공감한 듯하다. 아울러 두 사람이 현실적인 토지개혁안으로 주장한 한전론 역시 적극 수용했다.

박규수가 약관의 젊은 나이에 저술한 <상고도설(尙古圖說)>에 따르면 그가 정전제와 균전제(均田制)를 토지제도의 근본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평소 정전제와 균전제 하에서 경작자로서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발발하면 병사가 되어 싸우는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를 시행하면 모두 생업을 잃지 않기 때문에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의 삶은 안정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대토지 소유의 폐단을 없애고 균전제를 통해 실제 농민(경작자)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병농일치제로 경제와 군사제도를 개혁한다면 부국강병과 경제적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박규수는 자신의 토지개혁론을 공론의 장에서 정면으로 제기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시행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삼정(三政) 가운데에서도 전정(田政)과 환곡(還穀)의 문제를 중심으로 부분적인 경제 개선책을 찾았을 뿐이다.

더불어 통상개국을 통한 체제 개혁과 부국강병론을 중시한 탓에 토지 소유의 개혁 문제에 대한 관심과 문제제기를 부차적으로 여겼지 않나 싶다.

훗날 중농주의 경제학자들의 토지개혁사상을 계승한 사람들이 ‘농민이 주도하는 토지혁명’을 통해 근대의 길을 열고자 한 반면 북학파와 박규수의 통상개국과 부국강병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상층 계급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정치혁명’을 통해 근대화의 길을 걷고자 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다.

박규수는 68세가 되는 1874년 우의정을 사임한 후 조정에서 완전히 물러나 재동의 자택에 칩거한다.

그는 쇄국정책을 버리고 서양에 문호를 개방할 것을 내세운 자신의 요청이 흥선 대원군에게 거듭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더 이상 조정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음을 깨닫고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양반층 자제들을 중심으로 신진 개혁 세력을 길러 자주적인 개국과 근대화의 힘을 준비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당시 박규수의 재동 집 사랑방에 모여든 인물들은 김옥균, 박영효, 박영교, 김윤식, 서광범, 홍영식 등이었다. 모두 훗날 개화당(開化黨)을 이루어 조선을 근대적인 체제와 국가로 개혁하기 위한 정치혁명 곧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들이다. 따라서 개화당과 갑신정변의 큰 뜻은 이미 10여 년 전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박규수는 이들에게 북학파의 실학사상에서부터 자신이 보고 배운 중국의 근대화 노력에 대한 견문과 지식 그리고 서양의 근대 제도와 선진 문물은 물론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까지 자세하게 가르쳤다.

박규수가 이들 개화파 지식인들에 얼마나 큰 사상적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는 1931년 이광수가 박영효와 나눈 인터뷰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인터뷰에 관한 기록에 앞서 이광수는 갑신정변에 대해 “조선을 구미식의 새로운 정치사상-자유민권론, 오늘날 말로 봉건에서 부르주아에 이래(移來)하는 신사상으로 혁신하려던 대운동이다. 그것이 실패했기 망정이지 만일 프로그램대로 되었다고만 하면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상당하는 의미를 가져 조선사의 진로는 실상 밟아온 것과 다른 방향을 취했을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제 박영효가 개화사상에 대해 말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면 당시(갑신정변)의 혁명가들이 이러한 신사상에 감염되게 된 경로는 어떠한가? 이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춘고(박영효)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내 백형(필자 왈. 백형이라 함은 영교를 가리킴)이 재동 박규수 집 사랑에 모였지요.’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서 이유원이 영의정이었을 때 우의정으로 있다가 이유원과 불합하여 괘관(卦冠: 사직)하고 재동 집에서 김옥균 등 영준한 청년들을 모아놓고 조부의 『연암문집』을 강의도 하고 중화 사신들이 들고 오는 신사상을 고취하기도 했다. ‘『연암집』에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 하고 춘고(박영효)는 당시 신사상이란 것은 평등론, 민권론이라고 말했다.” 이광수, <박영효 씨를 만난 이야기> 중에서

이처럼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시작된 신사상은 조선의 자주적인 개국과 근대화를 주창하며 ‘위로부터의 정치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길을 활짝 열고자 한 개화파(開化黨: 개화독립당)의 조직화로 발전해갔다. 그리고 북학파와 박규수의 사상이 서재(書齋)나 재야(在野)에 머문 반면 이들 개화파의 신진 개혁가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해 일거에 조선을 자신들이 구상한 체제로 개변(改變)하고자 했다.

앞서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북학파와 개화파는 박규수를 매개로 해 사상적 사제(師弟)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북학파 학자들이 봉건 왕조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꿈꾼 반면 박규수 사상의 계승자들은 봉건체제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근대체제의 혁명을 꿈꾸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성향을 강하게 띤 이유 역시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때 박규수는 북학파와 개화파의 중간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봉건 왕조체제의 개혁을 통해 통상개화와 부국강병을 이루려고 한 점에서는 북학파에 가깝지만 관직에서 물러난 말년에 이르러서는 훗날 젊은 개혁가들이 봉건 왕조체제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근대화 혁명을 모색할 수 있도록 사상적 기초를 닦아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광수의 지적처럼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성공해 조선이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어 독립국가로 우뚝 섰다면 분명 박규수는 ‘근대화의 선구자’ 혹은 ‘근대 국가의 아버지’로 추앙받지 않았을까? 그것은 19세기 후반 조선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꿈꾸었던 젊은 개혁가들의 사상적 뿌리가 모두 박규수에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메이지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근대화 모델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연암집』과 박규수의 가르침을 통해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 모델을 모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