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학(家學)으로 전수받은 농학(農學)…조선 현실과 환경에 맞는 실용 강조
상태바
가학(家學)으로 전수받은 농학(農學)…조선 현실과 환경에 맞는 실용 강조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2.08 0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의 경제학자들] 농업·생활 경제학 완성한 경제학자…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①
▲ 풍석 서유구와 동아시아의 농서(農書)들을 총망라한 저서 『임원경제지』.

[조선의 경제학자들] 농업·생활 경제학 완성한 경제학자…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①

[한정주=역사평론가] 조선시대 중반 이후 권력을 좌지우지한 사림(士林) 세력은 대개 지방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예를 들면 퇴계 이황은 경북 안동, 남명 조식은 경남 합천, 우암 송시열은 충북 괴산(옥천)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고 또한 정치적 활동을 했다.

이 때문에 사림을 일컬어 영남사림·근기사림·호남사림 등 재지사림(在地士林)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중앙 관직에 있을 때는 도성에 머무르다가도 관직에서 물러나면 즉시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가 학문 연구(제자 양성)와 정치활동을 했다.

그런데 이들 재지사림과는 다르게 누대(累代)에 걸쳐 서울(한양)에 살면서 중앙의 핵심 관직에 중용되어 정치권력과 경제적 부를 동시에 획득한 양반 사대부가(兩班士大夫家)가 있었다. 경주 김씨, 반남 박씨, 풍산 홍씨, 달성 서씨 등이 그들인데 역사에서는 이들 가문을 ‘경화거족(京華巨族)’이라고 부른다.

이들 경화거족은 재지사림과는 다른 독특한 학풍과 고급스럽고 세련된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사제(師弟) 관계를 통해 학문과 사상을 전수한 재지사림과 다르게 이들은 가학(家學)을 통해 학문을 다지고 사상을 전수했다.

18~19세기에 홍석주·홍길주와 같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를 배출한 풍산 홍씨가 ‘문장학(文章學)’을 가학으로 삼았다면 서명응·서호수를 배출한 달성 서씨는 ‘농학(農學: 농업 경제학)’을 가학으로 전수했다고 할 만하다.

19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의 농서(農書)들을 총망라한 『임원경제지』를 저술해 조선의 환경과 제도에 맞는 ‘농업 경제학’을 구축한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는 바로 ‘농학’을 가학으로 전수한 달성 서씨 가문의 자손이다. 서명응은 서유구의 할아버지고, 서호수는 그의 아버지다.

서유구의 가문은 정조 시대에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서명응은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내고 규장각 창설을 주도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서호수 역시 규장각 직제학의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국가적 편찬 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학자 관료였다.

정조 시대 국가의 싱크탱크였던 규장각의 창설과 정비는 이들 부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른 말이 아니다.

또한 이 두 사람은 모두 우리나라 농서의 고전이라고 부를 만한 서적을 남겼는데 서명응의 『고사신서(攷事新書)』 ‘본사(本事)’와 서호수의 『해동농서(海東農書)』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서유구는 할아버지인 서명응이 말년에 저술하고 서적을 편찬하는 작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고사신서』 ‘본사’는 함께 편찬한 책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서유구는 이미 가학인 ‘농학’의 핵심 사항들을 익힐 기회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훗날 이 편찬 작업과 서호수가 저술한 『해동농서』는 서유구의 ‘농업 경제학’의 기본 뼈대를 이루게 된다. 『고사신서』나 『해동농서』는 특별히 우리나라의 농학을 중국의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이해할 것을 강조해 서유구가 우리 현실과 환경에 맞는 농업 경제학을 완성해 나가는 데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지식과 문물 및 제도를 받아들일 때 반드시 우리나라의 현실과 환경에 맞게 채용하는 것, 이것은 바로 달성 서씨 가학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집안은 당시 조선을 뒤덮은 주자성리학의 지배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실학의 기풍을 갖출 수 있었다.

1782년(정조 6년) 서명응이 박제가의 『북학의』에 붙인 ‘서문(序文)’을 보면 당시 북학파 학자들이 주창한 ‘실학(이용후생)’에 그가 얼마나 적극적인 지지와 찬사를 보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북학의』)에서는 규격에 대한 기술이 상세하고 제작법에 대한 규명이 명료하다. 게다가 뜻을 같이 하는 동료의 견해까지 첨부하여 덧붙였다. 한번 책을 펼쳐서 읽으면 그 내용을 현실에 적용하여 시행할 만하다. 아! 그(박제가)의 마음 씀이 어쩌면 이렇게도 주도면밀하고 또 진지하단 말인가!” 서명응, 『북학의』 ‘서문’ 중에서

이렇듯 우리나라의 현실과 환경에 맞는 실용적 학문을 강조하는 가풍 속에서 성장한 덕분에 서유구는 일찍부터 ‘실학의 대가’로 거듭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하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