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 이황② ‘나아감’과 ‘물러남’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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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 이황② ‘나아감’과 ‘물러남’의 딜레마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6.16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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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⑪
▲ 서울 남산의 퇴계 이황 동상

[헤드라인뉴스=한정주 역사평론가] 이황은 34세 때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당시 현달(顯達)한 사람들이 과거에 급제해 첫 관직에 나서는 평균 연령이 20대 중·후반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참 늦은 나이였다.

왜 그랬을까? 이황이 본래 벼슬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황은 8남매의 막내였는데, 그의 아버지 이식(李植)은 그가 걷기도 전인 2세 때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이황의 어머니는 직접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면서 남은 자식들을 양육했고, 이 때문에 집안은 가난했고 살림은 궁색했다.

그러나 이황의 어머니는 배우지 못한 과부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가난 속에서도 자식들의 공부만은 한 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신유년(辛酉年 : 1501년)에 아버지께서 진사에 급제하고 다음해 여름 6월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맏형님이 겨우 혼인을 했을 뿐 그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어렸다. 어머니께서 많은 아들을 두고 일찍 과부가 된 것을 몹시 마음 아프게 생각해 장차 가문을 유지하지 못하고 마침내 여러 자식들이 혼인을 하지 못하게 될까봐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했다.

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치자 제사는 맏형님에게 맡기고 그 옆에다 방을 만들어 거처하면서 더욱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누에를 쳤다. 갑자년(甲子年 : 1504년)과 을축년(乙丑年 : 1505년)에는 사이에는 부역과 세금을 혹독하게 재촉해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궁색해졌고 파산(破産)하는 이도 많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능히 멀리 앞날을 내다보아 어려움을 도모할 수 있었고 오랫동안 유지해온 가업(家業)을 잃지 않았다. 여러 자식들이 점차 장성하자 살림살이가 나아졌고, 이에 멀고 가까운 곳을 찾아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학비를 마련해주었다.

항상 훈계하시기를 ‘대개 문예(文藝)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행실을 삼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재물을 대할 때에도 경계하도록 하셨고, 이에 근거해 가르치셨다.

언젠가 간절하게 ‘세상에서는 과부의 자식이 배우지 못했다고 말하니 너희들이 백배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웃음을 어찌 모면할 수 있겠느냐’고 경계하셨다.” 『퇴계집』, ‘선비증정경부인박씨묘갈지(先妣贈貞夫人朴氏墓碣識)’

이렇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영특하고 학문에 출중했던 이황에게 거는 어머니와 형제들의 기대는 클 수밖에 없었다. 이황의 과거급제는 집안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나 다름없었다.

학문이냐 벼슬이냐를 두고 고민하던 이황은 어머니의 기대와 형제들의 권유를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첫 과거시험인 경상도 향시(鄕試)를 27세의 늦은 나이로 치른 까닭 역시 여기에 있었다.

따라서 이황이 벼슬길에 나선 이유는 단 하나, 집안 살림이 몹시 궁색해 늙은 어머니가 가난으로 고생하자 차마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34세에 승문원(承文院)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벼슬살이를 시작한 이황은 성균관(成均館), 호조(戶曹), 홍문관(弘文館), 춘추관(春秋館), 사헌부(司憲府) 등 60여개의 중앙 관직을 두로 역임했다. 그러나 항상 마음은 벼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가 다시 임금이 부르면 어쩔 수 없이 나아가기를 거듭했다.

게다가 당시 조정은 중종 사후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나뉘어 피를 부르는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황이 뿌리를 두고 있던 사림(士林) 역시 이 권력다툼에 직·간접적으로 얽혀있었다.

이러한 이전투구(泥田鬪狗)와 같은 정치 상황 때문에 이황은 더욱 조정을 떠나 산림에 숨어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황이 고뇌하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제자 정유일은 훗날 스승의 평소 언행을 모아 엮은 『언행록(言行錄)』에서 “선생은 일찍부터 벼슬할 마음이 적었다. 그 당시 정치 사정이 매우 어지러웠으므로 선생은 계묘년(癸卯年 : 1543년) 나이 43세 때부터 벼슬에서 물러날 결심을 가졌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임금이 불렀지만, 항상 조정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으셨다”고 밝혔다.

이황의 나이 37세 때 그가 벼슬에 나갔던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던 어머니 박씨 부인이 사망했기 때문에 더 관직에 머물러 있을 이유도 없었다. 43세 때인 1543년 2월 이황은 마침내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

그러나 임금의 부름을 받고 다시 조정에 나왔고, 중종(中宗)이 승하하고 새로이 임금이 된 인종(仁宗) 1년인 1545년(45세) 3월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가 다시 관직을 제수 받았고, 또한 8월에 병을 핑계로 사직했으나 다시 정3품인 사옹원 정(司饔院正)으로 복귀했다.

이렇듯 잦은 사직과 뒤이은 복귀로 말미암아 이황은 동갑내기이자 학문적 라이벌이었던 산림처사(山林處士) 조식으로부터 ‘출처(出處)’가 명확하지 않다고 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실 임금의 숱한 부름과 관직 임명에도 끝내 산림처사로 살다가 생을 마친 조식에 비해 이황의 ‘출처’는 비판받을 소지가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조식은 그 뜻과 기상이 성리학을 초월했기 때문에 군신(君臣) 간의 의리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통 성리학자였던 이황에게 군신 간의 의리는 아주 중요한 가치이자 덕목이었다. 따라서 이황은 조식처럼 임금의 부름을 마냥 거부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본뜻은 벼슬에 있지 않고 산림에 물러나 글을 읽고 심신을 수양하며 후학을 가르치는데 있었다. 여기에서 ‘나아감(進)’과 ‘물러남(退)’ 사이의 딜레마가 발생했고, 이황은 평생 임금이 부르면 어쩔 수 없이 나아갔다가 병을 핑계로 물러나기를 거듭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황은 나이 46세가 되는 1546년(명종 1년) 2월 휴가를 얻어 고향인 예안현(현재 안동)으로 돌아가 장인 권질(權礩)의 장례를 치르고 난 이후, 5월에는 병을 핑계 삼아 조정으로 복귀하지 않아 해직되었다.

그리고 7월 부인 권씨가 사망하자 작정하고 고향인 예안현 온계리(溫溪里)로 귀향해 참됨을 기른다는 뜻의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거처하기 시작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황은 평생 마음 속 깊이 품었던 ‘물러남’을 행동에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물러나겠다는 자신의 뜻과 의지를 만천하에 선언이라도 하듯, 고향 온계리에 흐르는 ‘토계(兎溪)’라는 시내 이름을 ‘퇴계(退溪)’로 바꾸고 마침내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았던 ‘물러날 퇴(退)’자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되자 이제 ‘퇴계(退溪)’라는 호를 사용해도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이황은 ‘퇴계(退溪)’라는 제목의 시문(詩文)까지 짓고 자신의 호에 ‘물러날 퇴(退)’자를 넣은 뜻을 이렇게 설명했다.

“몸이 물러나니 어리석은 내 분수에 맞아 편안하지만 / 학문이 퇴보할까 늘그막을 우려하네 / 시내 가에 비로소 거처를 정하고 / 퇴계(退溪)를 굽어보며 매일 반성함이 있네.” 『퇴계집』, ‘퇴계(退溪)’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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