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프런티어 안동 권씨&해남 윤씨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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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프런티어 안동 권씨&해남 윤씨 가문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3.0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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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⑧ “성장 동력과 혁신 기술을 결합하라”
▲ 해남윤씨족보목판. <사진=해남윤씨중앙종친회>

[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⑧ “성장 동력과 혁신 기술을 결합하라”

[한정주=역사평론가] 경제적 위기 상황에 처한 조선 후기 양반 가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활로를 모색했다. 유수원과 박제가의 ‘양반상인론’ 역시 이러한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중인과 평민 계층에서 상업 활동을 통해 거대한 재물을 축적하자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양반 계층 역시 새로운 상황에 따라 변화를 모색하고 토지 이외에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언급한 ‘생리(生利)’, 즉 “이로움을 생산한다”는 글을 보면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찾아 나선 양반 계층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왜 재화와 재물의 이로움에 관해 논하는가?”에 대해 “위로는 조상과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처자와 노비를 먹여 살려야 한다. 그러므로 재물과 재화의 이로움을 경영하여 넓히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전국에 분포한 농업, 상업, 국제 무역의 요충지를 밝히면서 조선 제일의 갑부가 되기 위해서는 농업보다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낫고 또 상업 중에서도 국내보다는 국제 무역에 나서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자금이 많은 큰 장사는 한 곳에 있으면서 재물을 통해 남쪽으로는 일본과 무역하고 북쪽으로는 중국의 연경(북경)과 무역하는 것이다. 여러 해에 걸쳐 세상의 온갖 재화를 실어 날라 더러 수백만 금의 재물을 모은 사람도 있다. 이러한 부자는 한양에 가장 많고, 다음이 개성, 그 다음이 평양과 안주이다. 이들은 모두 중국의 연경과 통하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들의 이익은 국내 상인들이 얻는 보통의 이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삼남(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는 이러한 큰 부자가 없다.” 이중환, 『택리지』,「복거총론(卜居總論)」, ‘생리(生利)’

또한 양반상인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박제가는 다른 나라와의 무역과 해외통상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은 비단 경제적 이득에 그치지 않고 조선 사회를 문명개화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될 수 있다고까지 했다.

양반 계층의 전통적인 수익 기반인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에만 매달려 생활하지 말고 상업 활동 특히 국제무역 등의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 나선다면 양반 역시 상인처럼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명의 개척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 조직과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 하는 숙제는 새로운 수익원과 수익 모델을 찾아내느냐 혹은 그렇지 못하느냐로 판가름 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원칙은 산업화 시대의 전통 산업을 수익 기반으로 하고 있는 기업이나 정보지식화 시대의 미래 산업을 수익 기반으로 하는 기업 모두에 적용할 수 있다.

신기술의 창조와 제작 기법의 혁신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내야, 세계적으로 가장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인 전통 산업에서도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시장지배자의 자리를 독점할 수 있다. 이 경우 새로운 수익 모델과 새로운 기술의 개발 및 제작기법의 혁신을 접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다시 전통적으로 토지를 수익 기반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양반 가문이 지속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았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여기에서 전통 산업을 수익 기반으로 하는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 전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제적 위기에 내몰렸다고 해도 신분과 권위를 중시한 양반 사대부들이 박제가나 이중환의 주장처럼 상업이나 국제 무역에 공공연히 나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양반 사대부가 한번 상업에 종사하면 그 후손의 벼슬길이 영영 막히고 또 양반 가문과는 혼인 및 교유 관계를 맺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큰 부를 얻을 수 있다고 해도 신분 몰락을 각오하고 감수할 만한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쉽게 장사에 나서지 못했다.

그렇다고 경제력 쇠퇴와 가문의 몰락을 마냥 지켜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대다수 양반 가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경제 기반이었던 토지에서 새로운 수익 모델과 성장 동력을 찾아야만 했다.

경북 안동 지역을 기반으로 한 재지사족(在地士族)이었던 권벌 가문이 황무지를 농토로 개발한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이유 역시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때 그들은 새로운 농법과 농사기술을 적극 활용했다.

▲ 현존 최고(最古)의 족보인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북부지역은 해발 500미터 전후 높이의 산을 끼고 있는 산간 평지가 많다. 권벌 가문의 사람들은 새로운 농법과 농사기술에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많은 수의 노비들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이들 산간 지역의 황무지를 농토로 개척했다.

특히 산에서 흘러나온 하천에 둑을 막아 쌓은 다음 평지에 물을 대는 방식으로 농지를 늘려나갔다. 더욱이 당시 갓 농촌에 보급되기 시작한 혁신적인 농법(이앙법·견종법 등)은 권벌 가문이 지속적으로 황무지와 산간 지역을 농토로 개발하는 데 큰 활력소가 되었다.

이렇듯 이미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 황무지와 산간 지역을 개간하는 경영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권벌 가문은 18세기에 들어와 경북 북부 지역을 대표하는 양반 가문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집안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가로도 유명세를 치른 전남 해남의 명문가 해남 윤씨 가문은 조선 중기부터 오늘날까지 500여 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호남을 대표해오고 있는 부잣집이다.

문헌과 자료에 따르면 해남 윤씨 가문이 최대의 재산 규모를 자랑했던 시기는 18세기 초였다. 당시 공재 윤두서가 자신의 자녀 12명에게 물려준 재산의 규모가 노비 584명에 농지만도 2400두락(마지기)에 달했다. 1두락의 토지가 150평 내지 200평이니 해남 윤씨 집안은 36만평 내지 48만평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조선 중기 남인(南人)을 대표하는 명문가였던 해남 윤씨는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인 고산 윤선도 때 서인(西人) 세력에 의해 중앙 정치권력에서 밀려난 후 땅 끝 해남에 거처한 재야 양반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해남 윤씨 가문이 중앙의 정치권력이나 정치적 특혜에 의지해 경제력을 키울 수 없었다는 얘기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치적으로 몰락한 이후 오히려 윤씨 가문의 경제력은 최고 수준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산간 지대인 경상도 북부지역에 기반을 둔 권벌 가문과 다르게 해남 윤씨 가문의 농지는 대부분 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이들이 해안 지역의 간척 사업을 통해 농지를 개발하는 방식으로 토지 소유를 확대하고 경제력을 키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조선시대에는 일정 지역의 토지를 개간하는 조건으로 토지의 소유권을 나라에 신청해 허가를 얻은 다음 토지 소유자가 자금을 내고 노비와 농민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간척 사업 제도가 있었다.

해남 윤씨 가문은 이 제도를 활용한 간척 사업에서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찾았다. 더욱이 이 가문은 훗날 다산 정약용의 학문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실학과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학풍이 매우 높았다.

이 때문에 새로운 농사기술과 농법을 적극 개발해 간척 사업에 활용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새로운 성장 동력과 수익 모델을 찾아 신기술과 혁신적인 영농법을 접목하는 경영 전략으로 해남 윤씨 가문은 호남을 대표하는 명문 부자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권벌 가문과 해남 윤씨 가문의 경우처럼 양반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과 힘은 단지 신분과 권력에만 의존해서는 오래도록 유지할 수 없었다. 자신만의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수익 모델을 개발해낼 때만 몇 세대에 걸쳐 부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두 가문은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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