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감동으로 경영하라”…경주 최 부잣집 최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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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감동으로 경영하라”…경주 최 부잣집 최동량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3.29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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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⑩ “더불어 일하고 일한 만큼 나누어 갖는다”
▲ 경주 최부잣집 종택 전경.

[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⑩ “더불어 일하고 일한 만큼 나누어 갖는다”

[한정주=역사평론가] 조선시대의 부자들 가운데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한 대표적인 사례가 경주 최 부잣집이다.

특히 경주 최 부잣집은 무려 12대 300년 동안 만석꾼의 지위와 명성을 유지한 ‘최장수 부자’였다는 사실로도 유명하다. 그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부를 유지한 비결은 집안을 다스리는 가훈인 ‘육훈(六訓)’과 자신을 다스리는 처세법인 ‘육연(六然)’을 대를 이어 전승하며 실천했기 때문이다.

이 ‘육훈’과 ‘육연’에 담긴 경영 철학에 대해서는 <“가장 훌륭한 인재경영은 자식교육이다”…경주 최 부잣집>(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883) 편에서 다룬 바 있어 여기에서는 가훈과 처세법 못지않게 중요한 최 부잣집의 또 다른 부의 비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최 부잣집의 ‘부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더불어 일하고 일한 만큼 나누어 갖는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경주 최 부잣집의 선조인 최동량이 17세기에 그 뿌리를 다져놓은 이후 20세기에 들어서까지 줄곧 지켜져 왔다.

최동량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산한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6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경주 최 부잣집을 명실상부한 만석꾼 부자로 만든 인물이다. 그 이전까지 이 집안은 경주 시골 마을의 작은 부자에 불과했다.

더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대 전란을 거치면서 이 집안의 삶의 터전이었던 경주 이조리 마을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최동량은 이러한 폐허 속에서 최 부잣집을 만석꾼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더불어 일하고 일한 만큼 나누어 갖는다’는 최 부잣집의 경영 원칙을 세워 놓았다.

최동량은 자신의 마을과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집안의 노비들에게 농사 기술을 적극 보급하는 한편 개천에 둑을 쌓아 보(洑)를 만들었다. 그리고 새롭게 논밭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놓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농사기술과 수리시설을 개선해 기존의 농지당 곡식 수확량을 증대시키는 한편 농사를 짓지 않는 땅이나 버려진 황무지를 적극적으로 개간해 토지의 절대량을 늘려야만 자신의 마을과 집안을 부유하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 방식은 많은 노동력과 엄청난 노동량을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최동량은 집안의 노비는 물론 마을 농민들까지 동원했다.

이때 최동량은 작업에 동원된 모든 사람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소유하거나 새롭게 개간한 토지에서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병작제(竝作制)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병작제는 수확량을 지주와 소작농이 절반씩 나누어 가지는 제도였는데, 소작농의 입장에서 보면 풍년·흉년을 가리지 않고 수확량의 일정액만 남겨주고 모조리 거둬가 버리는 작개제(作介制)보다는 훨씬 유리했다.

더욱이 당시 모든 지주들이 고율의 지세를 거둬가는 작개제를 시행하는 상황에서 최동량의 병작반수(竝作半收)는 매우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때문에 주변의 소작농은 물론 도적떼나 유랑민이 되어 떠돌던 사람들까지 최 부잣집의 일을 하겠다고 찾아왔다.

특히 열심히 일해 곡식 수확량이 늘어나는 만큼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소작농들은 너나없이 부지런히 일했고, 이에 따라 최 부잣집의 재물 역시 나날이 불어났다.

최동량의 병작제 시행으로 소작농들은 뼈 빠지게 일해 봤자 지주만 배부르다는 ‘불신과 분노’를 열심히 일만 하면 나도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으로 바꿀 수 있었다.

최 부잣집의 곳간이 가득하면 할수록 나도 배불리 먹고살 만하다는 인식이 소작농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지면서 최 부잣집의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것은 이익을 독차지하지 않고 소작농과 더불어 나누겠다는 최동량의 ‘나눔과 상생의 경영’에 대한 소작농들의 믿음과 감동이 낳은 결과였다.

나눔과 상생, 믿음과 감동의 바탕 위에서 경주 최 부잣집은 비로소 만석꾼의 재산을 일굴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동량의 나눔과 상생의 정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노비들에게도 ‘더불어 일하고 일한 만큼 나누어 갖는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최동량이 시집가는 딸에게 주었다는 아래의 글에는 일꾼과 노비에 대한 그의 남다른 철학과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

“자식이 부모를 섬길 때 손수 밭을 갈고 밥을 짓고 반찬을 장만하고 나무를 베어 어버이가 주무시는 방에 불을 때고 바람과 비를 가리지 아니하고 어버이의 수고를 대신하면 만고에 효자라고 한다. 요사이는 그러한 자식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자식이 못하는 이를 일꾼이 하여 농사를 짓고 밥과 반찬을 장만하고 멀고 가까운 데 심부름을 해주니 아무리 나라의 신분제도가 그러하지만 일꾼밖에 고귀한 것이 없느니라.

토지는 사람의 명맥이요, 노비는 양반의 수족과 같아 토지와 노비가 선비 집안의 양대 재산이니 세상의 습속이 조그마한 일에도 꾸짖고 음식도 잘 아니 주고 의복도 잘 아니 입히고 크거나 작거나 죄과가 있으면 형벌과 매질을 지나치게 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해놓고서도 위엄 있고 행동 관습이 엄격하노라고 자랑을 한다.

허나 하늘은 그 소행을 괘씸하게 여겨 그러한 사람의 자손이 온전히 남지 못하고 일꾼이 떠나가 버리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일꾼도 또한 사람의 아들딸이니 잘 대접하라는 말씀이 어찌 옳지 않으리오. 부디 어여삐 여기고 꾸짖지 말고 때릴 일이 있어도 꾸중하며 지나치게 말라.

사람의 재주는 모두 각각 다르니 그 사람이 못할 일은 아예 시키지 말고 이 일꾼에게 저 일꾼의 말을 하지 말고 똑같이 대접하여 차별하지 말고 일꾼이 온갖 말을 하거나 음란한 말을 하거든 아는 체하지 말고 오래된 뒤에 경계하여 꾸짖되 길게 꾸중하지 말고 자주 나무라지 말고 헛되이 칭찬하지 말고 수고하는 날이거든 음식을 생각하여주고 어린 자식이라도 어여삐 여겨주고 부모나 자식이나 동생이 있는 일꾼이 병이 들거든 죽 끓일 쌀을 주고 부모나 자식이나 동생이 있는 일꾼이 병이 들거든 집에서 간호하여주고 증세를 각별히 유의하여 물어 고쳐주고 위엄 있게 은혜를 베풀면 일꾼이 자연 진실하게 되느니라.

그렇게 하여도 마침내 속이고 사나워서 부릴 수가 없거든 그대로 두고 시키지 말라.” (전진문,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황금가지, 2004.에서 재인용)

이처럼 최동량은 “비록 천한 일꾼과 노비일지라도 사람답게 대하고 내 가족처럼 사랑한다”는 마음을 몸소 실천하고 또한 자식들을 가르쳤다. 이 덕분에 최 부잣집의 일꾼과 노비들은 주인을 섬기는 일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한 자긍심이 최 부잣집이 재물을 모으고 부를 형성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으리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최동량 이후에도 일꾼과 노비를 인간적으로 대접하고 가족처럼 사랑하는 최 부잣집의 가풍은 면면히 전승되었다. 최 부잣집은 대한제국 시대에 ‘노비에 대한 차별 철폐’에 앞장서는 한편 다른 사람보다 한발 앞서 100명에 이르는 노비들의 문서를 직접 불살라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시 노비 신세를 벗은 사람들은 인정 많고 인심 후한 최 부잣집을 떠나려하지 않았고, 최 부잣집은 남은 노비들에게 그들이 일한 만큼 임금(품삯)을 지급했다고 한다.

경주 최 부잣집의 사례에서 보듯이 나눔과 상생, 믿음과 감동을 주는 경영은 지주-소작농-일꾼과 노비 모두 ‘윈-윈(win-win)’하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영 전략의 가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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