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변화를 예측하고 행동하라”…최초의 양반 상인 토정 이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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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변화를 예측하고 행동하라”…최초의 양반 상인 토정 이지함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4.12 0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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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⑪ 양반 신분으로 재물의 가치에 눈을 뜨고 직접 장사에 나서다
▲ 토정 이지함의 초상.

[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⑪ 양반 신분으로 재물의 가치에 눈을 뜨고 직접 장사에 나서다

[한정주=역사평론가] 18세기 실학자들은 양반도 상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양반 상인론’을 주장했다.

유수원(1694~1755년)은 『우서(迂書)』라는 저서에서 상업이 발달하면 나라도 부강해질 수 있다는 상업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벼슬을 하지 않거나 놀고먹는 양반들을 상업에 종사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박제가는 양반도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법으로 허가하고 자본을 빌려주거나 상점을 마련해주어 좋은 성과를 내는 양반에게는 높은 벼슬을 내리는 국가 정책을 시행하라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는 신분제의 동요와 시장 및 상업의 활성화로 상당한 숫자의 양반 사대부 출신들이 실제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상업 활동은 여전히 가난하거나 몰락한 양반이나 하는 천박한 짓으로 취급당했다.

시장 경제가 발달하고 상인 집단의 힘이 강해진 18세기에도 이러했으니 그 이전 시대의 상인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시대의 변화를 읽고 행동하는 선각자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토정 이지함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로만 그를 기억하고 있지만 이지함(1517~1578년)은 양반 사대부 출신으로는 최초로 재물의 가치에 눈을 뜨고 직접 장사에 나서 큰 부자가 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한강 마포나루의 토정(土亭)을 근거지 삼아 몸소 상인이 되어 내외의 강해(江海)와 산천을 누비고 다니면서 탁월한 수완으로 막대한 재물을 모았다가 다시 가난한 백성이나 사정이 급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는 기행을 일삼았다.

토정 이지함은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 선조 시대의 사람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조선에서 지방 장시가 열리고 시장 경제가 막 번성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러나 여전히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질서와 나라의 ‘농업 중시와 상업 천시 정책’으로 인해 상인은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다.

이지함은 이러한 사회적 장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라에서 상업을 농업과 동등하게 다루어야 하고 광산을 개발하고 외국과의 통상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그는 상업 활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장사에 나섰다.

변화하는 시장경제의 흐름을 읽은 다음 신분 질서까지도 넘어서는 과감한 행동으로 나라와 개인의 융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이지함의 생각이었다.

▲ 1900년대의 마포나루.

전해오는 서적과 문헌에 따르면 그는 배를 매우 잘 다루어 바다를 마치 육지처럼 활보했고 노도 없는 자그마한 조각배를 타고서도 세 번이나 제주도를 드나들었다고 한다. KBS 1TV에서 방영했던 사극 ‘징비록’에 등장하는 동인(東人)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아계 이산해는 이지함의 친조카다.

그는 이지함에 대해 ‘숙부묘갈명(叔父墓碣銘)’에서 “배를 타는 것을 좋아하셨다. 큰 바다를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다니셨다. 나라 안의 산천 중 아무리 멀다고 해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고 아무 험하다고 해도 건너지 못한 곳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이 때문에 이지함은 육지는 물론 바다와 강을 자유롭게 이용해 이곳 물품을 저곳에서 팔고, 저곳 물품을 이곳에서 파는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유몽인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이지함이 “손수 상인이 되어서 백성을 가르치고 맨손으로 생업에 힘써 몇 년 안에 수만 석에 이르는 곡식을 쌓았다”고 전한다.

이렇듯 상업 활동에 뛰어든 후 이지함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이를 경영 전략에 접목시키는 경영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 시대를 앞서 읽은 선진적인 생산·경영 기법과 상술

이지함은 물건을 사고파는 방식으로 이익을 얻은 전통적인 상술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생산 활동과 상업 활동을 결합하는 ‘상업적 생산경영’을 통해 재부(財富)를 거두었다. 즉 자급자족하는 수준에 머무는 생산 활동이 아니라 시장에 내다 팔아 더 큰 부가가치를 얻는 경영 전략을 추구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바다 한가운데의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고 열매를 수확해 수만 개의 바가지를 만든 다음 곡식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큰 이익을 남겼다.

그는 어려운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는데, 이때에도 반드시 일정한 생산능력을 갖추도록 가르친 다음 생산한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마련할 수 있도록 했다.

이지함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구걸로 목숨을 연명하는 백성들을 모아 당시로서는 아주 독특하고 파격적인 생산 시스템을 통해 생계를 마련하도록 했다.

먼저 그는 큰집을 지어 어려운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사농공상 중에서 일정한 직업을 선택하도록 설득한 다음 직접 가르침을 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르쳐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능력이 뒤떨어진 사람에게는 볏짚을 많이 주고 미투리를 만들도록 시켰다.

그리고 친히 일을 감독하면서 하루에 열 짝씩 만들어 저잣거리에 내다 팔게 했다. 하루 동안 일을 하면 한 말의 쌀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점점 쌓여 몇 개월이 지나자 먹고 입는 것이 모두 풍요로워졌다.

이처럼 이지함은 일종의 공장제 수공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선진 경영 방식을 16세기 조선 사회에 과감하게 도입한 선각자였다. 이러한 이지함의 행적과 상업 활동에 대한 자세한 기록 역시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남아 전해오고 있다.

더욱이 이지함이 사망한 후 200여년이 지난 1778년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한 박제가는 당시 조선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선박을 통한 외국과의 통상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크게 개탄하면서 오로지 이지함만이 상선(商船)을 이용해 외국과의 통상에서 오는 이로움을 취할 줄 알았다고 높여 칭찬했다.

그리고 자신이 힘써 주장한 ‘선박을 이용한 해외통상론’의 롤 모델이 다름 아닌 이지함이라는 사실을 밝히기까지 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이 일찍이 외국의 상선 여러 척과 통상하여 전라도의 가난을 구제하려고 한 적이 있다. 그분의 식견은 탁월하면서도 원대했다고 하겠다.『시경(詩經)』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 옛 사람을 그리워하네. 진실로 내 마음을 알고 있으니.’” 『북학의』, ‘강남의 절강성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

이렇듯 이지함은 16세기 조선에서 막 번성하기 시작한 지방 장시와 시장 경제의 흐름을 읽은 다음 시대를 앞선 선진적인 생산·경영 기법을 도입했다. 또한 그는 미개척 시장이나 다름없었던 해로(海路)와 수로(水路)를 적극 이용해 국내는 물론 외국과의 상업 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이와 같은 생산·경영 방식과 상술은 당대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몇 세대를 앞선 선진적인 경영 전략이었기 때문에 이지함은 손만 대면 엄청난 재물을 만들어내는 ‘마이다스의 손’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지함은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예측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생산 방식과 경영 전략으로 시대를 주도한 양반 사대부 출신의 대상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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