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 이황④ 도산(陶山)…참된 인간 본성과 인격 도야하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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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 이황④ 도산(陶山)…참된 인간 본성과 인격 도야하는 산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6.2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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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⑪
▲ ‘도산서원’의 현판은 1575년 선조가 사액한 것으로 한석봉의 친필이다.<출처:도산서원 홈페이지>

[헤드라인뉴스=한정주 역사평론가] 퇴계(退溪)와 더불어 이황하면 가장 쉽게 떠오르는 단어는 다름 아닌 ‘도산서원(陶山書院)’이다.

이황이 주인공인 1000원권 지폐 역시 앞면에는 퇴계 이황이라고 쓰여 있는 초상화가 있고, 뒷면에는 도산서원의 전신인 도산서당(陶山書堂)을 그린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새겨져 있다.

이 ‘계상정거도’는 겸재(謙齋) 정선이 1764년 그린 것으로 이황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의 모습을 담고 있다.

지폐의 양면처럼 퇴계와 도산서당은 이황의 삶과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도산서원의 전신인 도산서당은 이황이 퇴계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도산(陶山)에 세운 강학소다.

이황이 도산(陶山)을 거처로 삼아 학문을 닦고 제자를 가르치려고 한 때는 1557년(명종 12년) 그의 나이 57세 무렵이었다.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전국 각지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선비와 제자들을 수용하기에는 퇴계 가의 집은 너무도 좁고 답답했다. 그래서 거처를 옮길 목적으로 이곳저곳 마땅한 장소를 찾아다니다가 퇴계 남쪽에 있는 도산(陶山)에서 학문을 강학할 서당과 제자들이 묵을 숙소를 세우기에 좋은 터를 발견했다.

그곳은 퇴계에서 고개를 하나 넘어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터를 발견한 이황은 “퇴계 남쪽에 도산(陶山)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렇듯 신비한 곳을 가까이 두고도 몰랐다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구나.”라고 말하며 뛸 뜻이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제자인 남경상·금응훈·민응기와 아들 이준(李雋), 손자 안도(安道)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시와 글을 각각 한 편씩 썼다. 이황이 글로 묘사한 도산의 풍경과 1000원권 지폐 뒷면에 새겨져 있는 겸재 정선의 그림을 비교해서 보면 아마도 더 흥미로울 것이다.

“퇴계(退溪) 가에 집터 가려서 산 지 / 몇 해나 흘렀는가? / 가난한 살림살이에 자주 땅을 옮기니 / 간당간당 기울고 허물어졌네 / 그윽한 계곡과 바위는 비록 어여쁘지만 / 형세(形勢)는 끝내 막히고 좁아 답답하네 / 깊게 탄식하고 장차 고쳐서 구하려고 / 높고 깊은 경계 끝까지 가보았네 / 퇴계의 남쪽에 도산(陶山)이 있는데 / 신비한 곳 가까이 있으니 기쁘면서 또한 괴이하구나 / 어제는 우연히 홀로 찾아왔지만 / 오늘 아침에는 여럿이 함께 왔네 / 연이은 봉우리는 구름 등에 걸쳐있고 / 끊어진 산기슭은 강 언덕에 임(臨)하였네 / 푸른 물은 모래섬을 겹쳐 두르고 / 아스라한 봉우리는 천 개의 상투 마냥 나란히 있네 / 그 아래 한 동네를 살펴 찾으니 / 오랫동안 간직한 소원 이에 보상 받는구나 / 깊고 그윽하며 한가롭고 고요한 두 산 사이에 / 맑은 날 산 속 아지랑이는 그림 속에 있는 듯하고 / 짙푸른 나무숲에서는 안개 피어오르고 / 분홍빛 띤 꽃은 그물을 씌운 것처럼 아름답네. 『퇴계전서』, ‘다시 도산의 남동쪽을 가서 보고 짓다(再行視陶山南洞有作)’

그 후 5년 가까운 시간 각고(刻苦)의 공을 들여 1561년 가을 마침내 도산서당은 완성되었다. 이황은 도산서당이 완성되자 곧바로 ‘도산기(陶山記)’라는 글을 짓고, 이곳에 담긴 자신의 뜻을 이렇게 밝혔다.

도산(陶山)이라는 이름은 옛적에 산속에 질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인데, 다르게 해석하면 이황이 평생 추구했던 성리학의 도(道), 곧 인간의 참된 본성과 인격을 도야(陶冶)하는 산이기도 하다.

“영지산(靈芝山)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내려 도산(陶山)이 되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 산이 두 번이나 솟았으므로 도산(陶山)이라 이름하였다’ 하고, 또 혹자는 ‘산 속에 옛날 질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事實)로써 이름을 붙였다’고 말한다.

산은 그다지 높지도 크지도 않다. 그렇지만 넓게 트여서 산의 형세가 절묘하다. 또한 산이 자리 잡은 방위(方位)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서 그 곁에 있는 봉우리·메·계곡·골짜기가 모두 이 산을 향해 두 손을 맞잡고 절하며 둥글게 감싸고 있는 듯하다.

▲ 청량산은 도산서원에서 동북방으로 17km정도 떨어져 있는 낙동강 강가에 높이 솟아 있다. 퇴계는 청량산을 학문연구의 도장으로 삼고 이곳에도 많은 시도 읊었다.<출처:도산서원 홈페이지>
산의 왼쪽에 있는 것을 동취병(東翠屛)이라 하고, 산의 오른쪽에 있는 것을 서취병(西翠屛)이라고 부른다. 동취병은 청량산(淸凉山)으로부터 내려와서 산의 동쪽에 이르러 여러 봉우리가 보일 듯 말듯 늘어서 있다. 서취병은 영지산(靈芝山))으로부터 내려와서 산의 서쪽에 이르러 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아 있다.

두 취병은 서로 마주보며 남쪽으로 달려서 굽어지고 감돌아 8∼9리 정도 가다가 동쪽의 것은 서쪽으로, 서쪽의 것은 동쪽으로 들어와 남쪽 들판 아득한 외곽에서 산세가 합해진다. 물은 산의 뒤쪽에 있는 것을 퇴계(退溪)라 부르고, 산의 남쪽에 있는 것을 낙천(落川 : 낙동강)이라고 부른다.

퇴계는 산의 북쪽을 돌아서 산의 동쪽에서 낙천(落川)으로 흘러 들어간다. 낙천은 동취병으로부터 서쪽으로 달려서 산기슭에 이른다. 멀리 흐르고 깊이 고여 출렁거리며 몇 리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면 그 깊이가 배를 저어 다닐 수 있다. 금빛 모래와 옥같이 흰 자갈이 맑고 깨끗하고 짙푸르고 차가운데, 이곳이 이른바 ‘탁영담(濯纓潭)’이다.

서쪽으로 서취병의 벼랑에 부딪치고 마침내 나란히 그 아래를 따라 남쪽으로 큰 들판을 지나서 부용봉(芙蓉峯) 아래로 들어간다. 부용봉은 곧 서쪽의 것이 동쪽으로 들어와서 형세가 합해진 곳이다.

처음 내가 퇴계 가에 집터를 정할 때 개울이 보이는 곳에 두어 칸의 집을 얽어서 서책을 간직하고 마음 수양할 곳으로 삼았다. 대개 이미 세 차례나 그 땅을 옮겨 문득 비바람에 무너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퇴계 가는 지나치게 고요하고 적막해서 마음을 밝히고 넓히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이에 다시 옮길 것을 도모했는데, 도산의 남쪽에서 땅을 얻었다. 이곳에는 조그마한 골짜기가 있고 앞으로는 강와 들을 굽어볼 수 있다. 그윽하고 아득하며 멀고 넓을뿐더러 바위와 산기슭이 밝고 또렷하며 돌샘은 달고 차가워서 은둔하기에 마땅한 곳이다.

농부의 밭이 그 가운데 있었지만 재물을 주고 밭과 바꾸었다. 법련(法蓮)이라고 부르는 중이 그 일을 맡아 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정일(淨一)이라는 중이 이 일을 이어받아 정사년(丁巳年 : 1557년)으로부터 신유년(辛酉年 : 1561년)에 이르기까지 5년 만에 서당(書堂)과 정사(精舍) 두 채가 대략 완성되어 깃들어 쉴 만한 곳이 되었다. 『퇴계전서』, ‘도산기(陶山記)’

▲ 도산서당. 퇴계가 4년에 걸쳐 지은 건물로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거처하던 방은 ‘완락재’라 하고 마루는 ‘암서현’이라 했다.<출처:도산서원 홈페이지>
벼슬에서 물러나 도산에 숨어(?) 살면서 이황은 글을 읽고 사색하는 삶을 맘껏 즐기고 싶었다. 또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학문을 논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남은 생을 보내고 싶었다.

‘도산기’라는 글에는 관직의 속박과 헛된 명성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도학자(道學者)의 삶을 살고자 한 이황의 꿈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나는 항상 오랫동안 쌓인 병에 얽혀 고통스러워하며 비록 산에 거처하면서도 책을 읽는데 온전히 뜻을 다 할 수 없었다. 깊은 근심을 조식(調息)하고 나서 여유가 나면, 이때 몸은 가볍고 편안해진다. 마음과 정신이 깨끗하게 깨어나 우주(宇宙)를 굽어보고 우러러볼 때면 감동과 느낌이 연이어 일어난다.

책을 물리고 지팡이를 짚고 나가 좁은 마루에 이르러 연못을 바라보며 즐기고, 화단에 올라 꽃을 찾고, 채마밭을 돌며 약초를 심고, 숲을 뒤져 향기로운 꽃을 따곤 한다. 더러는 돌에 앉아 샘물을 희롱하고, 대(臺)에 올라 구름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돌 위에서 고기를 바라보고, 배에 올라 해오라기를 가까이 한다. 마음이 가는 대로 노닐다가 눈이 닿으면 흥이 일어난다.

우연히 경치를 만나면 풍취(風趣)가 이루어져 흥이 극에 이르러 돌아오는데, 그러면 방 안은 고요하고 적막하며 도서는 벽에 가득하다. 책상을 마주하고 잠잠히 앉아 마음을 바로하고 연구와 사색을 하면 자주 마음에 합치되는 것이 있다. 그때는 문득 기뻐하다가 먹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만약 합치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친구에게 자문을 구한다. 그래도 얻는 것이 없으면 마음속에서는 분발하나 오히려 억지로 통하려고 하지 않는다. 잠깐 한쪽에 두었다가 때가 되면 다시 뽑아내어 마음을 비우고 생각하며 저절로 풀리기를 기다린다. 오늘도 이렇게 하고 내일도 이렇게 한다.

산새가 울고 만물이 때를 만나 화창하고 무성하며, 바람과 서리가 매섭고, 눈과 달이 엉겨 빛난다. 사계절의 경치가 같지 않으니 흥취 또한 무궁하다. 그래서 큰 추위, 큰 더위, 큰 바람, 큰 비가 아니면 나가지 않는 때도 나가지 않는 날도 없었다. 나가는 것도 이와 같았고 돌아오는 것 역시 이와 같았다. 이것이 곧 한가롭게 거처하며 병을 다스리는 쓸모없는 일이다. 비록 옛 사람의 대문과 마당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스스로 마음속에 일어나는 즐거움은 얕지 않아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오호라! 나는 불행하게도 늦게 멀고 외진 시골에서 태어나 질박하고 고루하여 들은 것은 없지만, 산림(山林) 사이를 돌아보고 일찍이 즐거움이 있는 줄을 알았다. 중년에 망령되게 세상에 나가 세속의 바람과 먼지에 엎어지고 나그네 마냥 헤매다가 미처 스스로 돌아와서 죽지 못할 뻔했다.

그 후 더욱 나이가 들어 늙고 병은 깊어지고 하는 일마다 곤란을 겪으니, 비록 세상은 나를 버리지 않았으나 내가 스스로 세상에 버림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몸이 벗어나 울타리에서 빠져나와 농토와 밭이랑에 몸을 던져 본분을 찾고 보니, 이른바 산림의 즐거움을 기약하지 않았는데 내 앞에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제 쌓인 병을 해소하고 깊은 근심을 제거하며 궁색한 말년(末年)을 편안하게 지내려고 한다면, 이곳을 버리고 장차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퇴계전서』, ‘도산기(陶山記)’

이황이 도수(陶叟), 도옹(陶翁), 도산진일(陶山眞逸), 도산병일수(陶山病逸叟), 도산노인(陶山老人) 등 도산(陶山)과 관련된 수많은 자호(自號)들을 사용한 때도 이 무렵부터다. 그만큼 이황의 말년에 도산(陶山)이라는 공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특히 이황은 도산을 배경으로 하거나 소재로 삼은 한시(漢詩)와 우리말 시가(詩歌)를 아주 많이 남겼다. 스스로를 ‘도산에 숨어 사는 병든 늙은이’라고 불렀지만, 도산에서의 삶을 즐겼던 만큼 마음속에서 절로 일어나는 시흥(詩興)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도산서당이 완성되자 지은 ‘도산잡영(陶山雜詠)’과 65세 때 지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다.

도산을 감싸고 있는 빽빽한 여러 봉우리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동취병산은 맑게 갠 날에는 푸른빛의 기운을 띠고 있다가 한 순간에 날씨가 변해 비를 마구 흩뿌리기도 한다. 이황은 도산서당에 앉아 이러한 풍경을 감상하고 있자면 마치 송(宋)나라 때의 유명한 화가 이성(李成)이 빼어나게 잘 그린 산수화(山水畵)를 보는 듯하다고 했다.

또한 도산의 오른쪽에 울뚝불뚝 솟아 있는 여러 봉우리는 서취병산인데, 도산서당에서 이곳을 마주보고 격조 높은 시를 읊조리기에는 뜬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만고(萬古)에 푸른빛을 띠는 저녁 무렵이 가장 마땅하다고 하였다.

“빽빽하게 서 있는 뭇 봉우리 왼쪽의 취병산 / 맑은 날 아지랑이 이따금 흰 구름에 걸쳐 띠를 두르네 / 잠깐 동안 변화 일어 비를 뿌리니 / 아마도 송대(宋代)의 화가 이성(李成)이 붓 휘둘러 생겨난 듯.” 『퇴계전서』,「도산잡영(陶山雜詠)」, ‘동취병산(東翠屛山)’

“우뚝우뚝 서 있는 뭇 봉우리는 오른쪽의 취병산 / 산 중턱에 절을 감추고 아래 정원에는 정자 있네 / 마주하고 앉아 격조 높은 시 읊조리기에는 저녁이 참으로 마땅한데 / 두둥실 뜬 구름에 온전히 내맡기니 만고(萬古)에 푸르구나.” 『퇴계전서』,「도산잡영」, ‘서취병산(西翠屛山)’

▲ 도산십이곡과 매화시.<출저:도산서원 홈페이지>
‘도산십이곡’은 이황이 스스로 쓴 발문(跋文)에서 ‘도산노인(陶山老人)’이 지었다고 밝힌 국문시가(國文詩歌)다. 이 시가는 여섯 곡(曲)씩 둘로 나누어져 있다.

이황은 앞의 여섯 곡은 ‘뜻’을 말하고, 뒤의 여섯 곡은 ‘학문’을 말하였다고 밝혔다. 아울러 학문을 배우는 아이나 제자들이 아침저녁으로 스스로 노래하고 익히도록 할 생각에 ‘도산십이곡’을 지었다고 했다.

또한 자신도 이 도산십이곡 하나를 적어서 상자 속에 간직해 놓고 틈나는 대로 꺼내 음미하며 스스로 반성하겠다고 적었다. 여기에서 이황이 말한 ‘뜻’이란 벼슬이나 출세와 같은 세속의 이욕(利慾)을 쫓아다니지 말고 자연 속에서 참된 본성을 기르라는 것이고, 또한 ‘학문’이란 만 권의 책을 쌓아두고 성현의 도(道)를 힘써 궁구(窮究)하라는 것이다.

“기일(其一) :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오 /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이가 이렇다 어떠하리오 / 하물며 천석(泉石)을 사랑하는 고질병을 고쳐 무엇하리오.

기이(其二) : 안개와 노을로 집을 삼고 바람과 달로 벗을 삼아 / 태평성대에 병(病)으로 늙어가네 /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자.

기삼(其三) : 순박한 풍속이 죽었다하니 진실로 거짓말 / 사람의 성품이 어질다 하니 진실로 옳은 말 / 천하에 수많은 영재(英才)를 속여 말씀할까.

기사(其四) : 그윽한 난초가 골짜기에 있으니 자연히 듣기 좋구나 / 흰 구름이 산에 있으니 자연히 보기 좋구나 / 이중에 아름다운 저 한 사람을 더욱 잊지 못하네.

기오(其五) : 산 앞에 대(臺)가 있고 대(臺) 아래에 물이로다 / 떼 많은 기러기는 오며 가며 하거늘 / 어떻다 밝고 깨끗한 흰 갈매기는 멀리 마음 하는고.

기육(其六) : 봄바람에 꽃이 산에 가득하고 가을밤에 달빛이 대(臺)에 가득하네 / 사계절의 멋과 흥취 사람과 한가지라 / 하물며 물에 뛰노는 물고기, 하늘 높이 나는 솔개, 구름 그림자, 밝은 햇빛이야 어느 끝이 있을꼬.”

“기일(其一) : 천운대(天雲臺) 돌아들어 완락재(玩樂齋) 맑고 깨끗한데 / 만권(萬卷) 생애(生涯)로 즐거운 일 끝이 없어라 / 이 중에 왕래(往來)하는 풍류를 말해 무엇 할꼬.

기이(其二) : 천둥소리 산을 무너뜨려도 귀머거리는 못 듣나니 / 밝은 해 중천(中天)에 있어도 장님은 못 보나니 / 우리는 눈과 귀 밝은 남자로 귀머거리와 장님 같지 말리.

기삼(其三) : 옛사람도 날 못보고 나도 옛사람 못 봐 / 옛사람을 못 봐도 가던 길 앞에 있네 / 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찌 할꼬.

기사(其四) : 당시(當時)에 가던 길을 몇 해를 버려두고 / 어디가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고 / 이제야 돌아오나니 다른 데 마음 말라.

기오(其五) :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 흘러가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는고 /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萬古)에 늘 푸르리라.

기육(其六) : 어리석은 이도 알며 하거니 그 아니 쉬운가 / 성인(聖人)도 못다 하시니 그 아니 어려운가 / 쉽거나 어렵거나 중에 늙는 줄을 모르는구나.” 『퇴계전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도산에서 글을 읽고 사색하며 강학(講學)하던 10여 년의 생활이 쌓이고 쌓여서 이황은 동아시아 최고의 성리학자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계(退溪)’라는 장소가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 전념하고 싶었던 이황의 뜻이 깃든 곳이었다면, ‘도산(陶山)’은 이러한 이황의 뜻을 현실로 만들어준 공간이었다.

자신의 비석에 ‘퇴도만은(退陶晩隱)’이라고만 새기라고 거듭 유언을 남길 만큼, 이황의 삶과 철학에서 ‘퇴(退)’자와 함께 ‘도(陶)’자가 지닌 의미는 거대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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