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에서 재물을 찾다”…조선의 글로벌 리더 이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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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서 재물을 찾다”…조선의 글로벌 리더 이덕유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6.2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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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⑮ ‘요동대인 조선인 부자’…고종의 옥새보다 이덕유 어음 더 신뢰
▲ 오랜기간 중국 화폐로 사용됐던 마제은(馬蹄銀). 말발굽처럼 생긴 모양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신뢰도가 높아 국제무역에서 기축통화로 사용됐다.

[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⑮ ‘요동대인 조선인 부자’…고종의 옥새보다 이덕유 어음 더 신뢰

[한정주=역사평론가] 허생은 물건을 도거리로 맡아서 파는 도고(都賈) 활동으로 큰 이익을 남기면서도 “겨우 만금으로 온 나라의 경제를 기울였으니 이 나라 경제력의 얕고 깊음을 짐작할 수 있구나”라고 한탄했다.

또한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지적한대로 백성은 가난하고 나라는 곤궁하면서도 농업 이외에 상업이나 공업을 천시한 탓에 조선의 경제력은 날로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오랫동안 상인들에게 국제 무역을 금지했기 때문에 조선을 벗어나 해외로 나아가 큰 부를 쌓은 거상 역시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상인이나 부자치고 멀리 청나라 혹은 일본에까지 자신의 재력을 떨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황현이 『매천야록』에 “북경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이름을 들먹인다”고 적은 의주상인 임상옥 정도가 있을 뿐이다.

나라 안에서 부자 소리를 들으려면 나라 안에서 재물을 찾아도 되지만 천하 사람들에게 부자 소리를 들으려면 마땅히 천하에서 재물을 구해야 한다. 따라서 천하를 무대 삼아 부를 쌓겠다는 포부가 있어야 비로소 천하의 재물을 얻을 수 있다.

‘요동대인 조선인 부자’라는 별호를 얻어 임상옥 이후 멀리 청나라 상해(上海) 지방에까지 이름을 드날린 거상 이덕유는 바로 천하에서 재물을 찾은 사람이었다.

그가 청나라에서 누린 부의 명성에 대해서는 황현이 『매천야록』에 상세하게 기록해두었다. 여기에서는 다른 나라에 대규모 농장을 소유한 조선 사람은 이덕유가 최초이고, 그의 집에는 청나라의 은화인 마제은(馬蹄銀)이 여러 개의 창고에 가득 쌓여 있다고 했다.

심지어 고종 황제가 청나라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쓸 경우 번번이 이덕유의 어음을 보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청나라 상인들이 고종의 옥새가 찍힌 문서보다 이덕유의 어음이 더 신용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고종 황제는 왕실 재정이 모자랄 때마다 그를 대궐로 불러들여 대면했다고 전한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 부자라는 소리를 듣고 사는 사람은 크게 네 등급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부자라는 말을 듣는 것은 하등이고, 나라 안의 사람들에게 부자라는 말을 듣는 것은 중등이라고 할 수 있다. 상등의 부자라면 이웃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부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또 최상등의 부자라고 한다면 반드시 천하 곧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조선시대에 천하란 곧 조선을 포함해 중국과 일본을 뜻했기 때문에 당시의 기준에서 볼 때 이덕유처럼 청나라에서까지 부자로 크게 명성을 얻은 사람은 최상등의 부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이덕유가 이처럼 조선을 벗어나 드넓은 중국 대륙에까지 자신의 경제력을 뻗칠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크게 되려면 크게 꿈을 꾸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다.

◇ “태산에 올라야 천하가 작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맹자는 “공자는 동산(東山)에 오르고 나서야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가 작다는 사실을 알았고, 태산(泰山)에 오르고 나서야 천하가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듣고 아는 만큼 느끼고 깨닫고 행동할 수 있을 뿐이다.

이덕유가 조선을 벗어나 청나라를 아우르는 큰 꿈과 포부를 품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가 젊었을 때부터 역관의 신분으로 청나라를 수없이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과 청나라 최고의 갑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운명적인 사건 또한 청나라를 드나드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었다.

어느 날 청나라 연경(북경)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동 지역을 지나던 이덕유는 공금을 횡령한 죄로 한 청나라 사람이 끌려가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우연찮게 죄인의 행동을 지켜본 이덕유는 그가 매우 의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시 이덕유는 청나라 연경에 들어가 물품을 사와 조선에 되팔아 크게 이익을 남길 목적으로 가져온 천금이 있었다. 그는 이 돈을 그 청나라 죄인을 풀어주는 데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 인물됨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십 수 년이 지나 이덕유는 다시 연경에 가기 위해 요동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를 성대하게 맞이할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예전에 이덕유가 목숨을 구해 준 청나라 죄인이었다.

이덕유의 은덕으로 목숨을 건진 그 사람은 많은 돈을 벌어 1년에 수만 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대농장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토록 대규모 농장을 경영한 이유가 다시 이덕유를 만나면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이덕유는 요동에 수만 석의 대농장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덕유는 요동의 대농장에서 생산한 곡식을 판매해 막대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대농장은 그가 갑부의 반열에 오르는 기반이 되었을 뿐이다. 정작 이덕유가 조선과 청나라를 아우르는 글로벌 부자의 명성을 얻은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처음 이덕유는 요동의 대농장에서 생산한 곡식을 판매해 청나라 은화, 곧 마제은(馬蹄銀)을 축적했다. 만약 그가 작은 성공에 안주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젊었을 때부터 연경을 드나들며 품었던 거대한 꿈과 포부를 펼쳐 볼 기회로 삼았다.

당시 그는 조선의 어떤 상인과 부자도 시도는커녕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사업 영역을 개척했다. 청나라 상인들을 상대하는 금융업(신용대출)을 벌였던 것이다.

특히 그는 자신이 소유한 요동의 대농장에서 수확한 곡식을 판매해 얻은 마제은으로 현금 신용성을 확보한 다음 이 현금 신용성을 기반으로 조선과 청나라 상인을 상대로 금융 거래를 하는 일종의 외환은행 역할을 하며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덕유는 “엄청난 외환을 보유하고 조선과 청나라 상인들을 상대로 금융업을 펼친 국제금융가이자 금융자산가”였던 셈이다.

이덕유의 성공 신화는 처음 비록 청나라 사람의 조력으로 이루었지만 이후 그는 다른 사람이 감히 시도하지 못한 대규모 상업적 농업과 금융업을 결합하는 독창적인 사업 방식으로 요동 일대를 호령하고 멀리 상해까지 이름을 떨친 최고 갑부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겠다.

◇“큰 꿈은 큰 성공을 이루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조선의 부자들은 드넓은 대륙을 무대로 재물을 쌓은 청나라의 부자들과 비교하면 그 규모와 경제력이 보잘 것 없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조선 제일의 갑부라고 해도 청나라의 중급 부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19세기 당시 청나라가 경제대국이고 아시아와 서양 여러 나라와의 교류도 활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청나라의 부자나 상인이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 수준이라면 조선의 부자나 상인은 로컬 기업 정도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자국 시장에서 아무리 로컬 기업이 글로벌 기업을 이긴다고 해도 로컬 기업은 로컬 기업일 뿐이다. 실제 자국 시장을 벗어나 글로벌 시장에 나가봐야 로컬 기업과 글로벌 기업의 진정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덕유는 당시 글로벌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청나라를 상대로 큰 재물을 쌓은 거의 유일한 조선인 부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사람들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본시 땅덩이가 좁고 또 메마르다. 그런 좁고 척박한 땅에서 백성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혹 큰 부자소리를 듣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별 것 아니었다. 그러나 이덕유의 장토는 수십 수백 리가 뻗친 요동들판에 있다니 장하지 아니하냐. 우리나라 사람으로 타국에다가 자기의 넓은 장토를 지닌 사람으로는 이덕유가 처음이다.” 이용선 지음, 『조선거상』, 동서문화사, 2005, p368에서 재인용

이러한 일은 일찍부터 조선을 벗어나 청나라를 상대해서 큰 부를 일구겠다는 이덕유의 큰 포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실제 그가 이룬 성공의 크기는 그가 품은 포부의 크기보다 훨씬 더 컸다. 조선과 청나라 양국 모두에서 당시 조선의 황실보다 더 큰 경제력과 신용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덕유는 “큰 성공은 큰 꿈을 꿀 때만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몸소 실천해 누구도 이루지 못한 꿈을 현실로 바꾼 거부였다. 중국이 다시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오늘날 이덕유의 꿈과 포부는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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