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는 것이 많을수록 오히려 병통(病痛) 되고 해악(害惡)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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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는 것이 많을수록 오히려 병통(病痛) 되고 해악(害惡)될 뿐”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6.28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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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⑪…관조(觀照)와 경계(境界)와 사이(際)의 미학⑥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⑪…관조(觀照)와 경계(境界)와 사이(際)의 미학⑥

[한정주=역사평론가] ‘소완정기’에서 밝힌 ‘관조의 미학’이 가장 빛을 발하고 있는 박지원의 대표적인 글을 꼽는다면 필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에서 박지원은 눈과 귀, 즉 ‘보고 듣는 것’만을 믿는 사람은 보고 듣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또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오히려 병통(病痛)이 되고 해악(害惡)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보고 듣는 것’에 현혹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견식과 이치에 도달할 수 있다.

“무엇이 실재(實在)이고 무엇이 허상(虛像) 혹은 환상(幻像)인가?”라는 무지와 혼란에서 벗어나려면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오래된 사고와 습관을 버려야 한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와 이치를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나와 바위에 부딪치며 사납게 흘러간다.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결, 구슬피 원망하는 듯한 여울은 내달리고 부딪치고 뒤엎어지며 울부짖고 으르렁대고 소리지르니 언제나 만리장성마저 꺾어 무너뜨릴 기세가 있다.

만 대의 전차와 만 마리의 기병, 만 대의 대포와 만 개의 북으로도 그 무너질 듯 압도하는 소리를 비유하기엔 충분치 않다.

모래 위에는 큰 바위가 우뚝하니 저만치 떨어져 서 있고, 강가 제방엔 버드나무가 어두컴컴 흐릿하여 마치도 물 밑에 있던 물귀신들이 앞 다투어 튀어나와 사람을 놀라게 할 것만 같고, 양옆에서는 교룡과 이무기가 확 붙들고 나꿔 채려는 듯하다.

어떤 이는 이곳이 옛 싸움터인지라 황하가 이렇듯이 운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강물 소리는 어떻게 듣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내 집은 산 속에 있는데 문 앞에는 큰 시내가 있다. 매년 여름에 소낙비가 한 차례 지나가면 시냇물이 사납게 불어 항상 수레와 말이 내달리는 소리가 나고 대포와 북소리가 들려와 마침내 귀가 멍멍할 지경이 되었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 비슷한 것과 견주면서 이를 듣곤 하였다. 깊은 소나무에서 나는 퉁소 소리는 맑은 마음으로 들은 것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소리는 성난 마음으로 들은 것이다. 개구리 떼가 앞다투어 우는 소리는 교만한 마음으로 들은 것이고, 일만 개의 축(筑)이 차례로 울리는 소리는 분노하는 마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천둥이 날리고 번개가 내리치는 소리는 놀란 마음으로 들은 까닭이요,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는 운치 있는 마음으로 들은 때문이다. 거문고의 높은 음과 낮은 음이 어우러지는 소리는 슬픈 마음으로 들은 것이요, 문풍지가 바람에 우는 소리는 의심하는 마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듣는 소리가 모두 다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은 단지 마음 속에 생각하는 바를 펼쳐놓고서 귀가 소리를 만들기 때문일 뿐이다.

이제 나는 한밤중에 한 줄기 황하를 아홉 번 건넜다. 황하는 장성 밖에서 나와 장성을 뚫고서 유하와 조하, 황화와 진천 등 여러 물줄기를 한데 모아 밀운성 아래를 지나면서는 백하가 된다.

나는 어제 배를 타고서 백하를 건넜는데 이곳의 하류이다. 내가 아직 요동 땅에 들어서지 않았을 때 바야흐로 한여름 불볕 속에 길을 가다가 갑자기 큰 강물이 앞에 나오는데 붉은 파도가 산처럼 일어서며 그 끝간 데가 보이지 않았다. 이는 대개 천리 밖에 폭우가 내린 때문이었다.

물을 건널 때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길래 혼자 생각에 사람들이 고개를 우러러 하늘에 묵묵히 기도를 드리는가 싶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물을 건너는 사람이 물이 세차게 거슬러 올라가며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제 몸조차 마치 물살을 건슬러 올라가는 듯하고, 눈은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것만 같아 문득 어찔해지며 빙글 돌아 물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니 그 머리를 우러름은 하늘에 기도하자는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어느 겨를에 경각에 달린 목숨을 묵묵히 빌 것이랴.

그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데도 강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모두들 요동 평야는 평평하고 광활하기 때문에 물줄기가 성내 울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황하를 모르고서 하는 소리다. 요하(遼河)가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밤중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낮에는 능히 물을 볼 수 있는 까닭에 눈이 온통 위험한 데로만 쏠려서 바야흐로 부들부들 떨려 도리어 그 눈이 있음을 근심해야 할 판인데 어찌 물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한밤중에 강물을 건너매 눈에 위태로움이 보이지 않자 위태로움이 온통 듣는 데로만 쏠려서 귀가 바야흐로 덜덜 떨려 그 걱정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이 텅 비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고,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더욱 병통이 되는 것임을….

이제 내 마부가 말에게 발을 밟혀 뒷수레에 실리고 보니 마침내 고삐를 놓고 강물 위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올려 발을 모두자 한번 떨어지면 그대로 강물이었다.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고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아 마음에 한번 떨어질 각오를 하고나자 내 귓속에 마침내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을 건넜으되 아무 걱정 없는 것이 마치 앉은 자리 위에서 앉고 눕고 기거하는 것만 같았다.

예전 우임금이 황하를 건너는데 황룡이 배를 등에 져 지극히 위태로웠다. 그러나 살고 죽는 판가름이 먼저 마음에 분명하고 보니 용이고 도마뱀이고 그 앞에서 크고 작은 것을 헤아릴 것이 없었다.

소리와 빛깔은 바깥 사물인데 바깥 사물이 항상 눈과 귀에 탈이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바르게 보고 듣는 것을 잃게 만듦이 이와 같다. 그러니 하물며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는 데서 그 험하고 위태로움이 황하보다 심하여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통이 됨에 있어서이겠는가?

내 장차 내 산 중에 돌아가 다시 앞 시내의 물소리를 듣고 이를 징험하여 장차 몸놀림에 교묘하여 스스로 총명하다고 믿는 자를 경계하리라.” 박지원, 『열하일기』, 「산장잡기(山莊雜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여기에서 박지원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핵심을 놓친 것이다. 마음을 바꿔 먹자 보고 듣는 것에 더 이상 미혹(迷惑)되지 않고 보고 듣는 것에 마음을 빼앗길수록 오히려 바르게 보고 듣는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박지원의 말은 ‘마음의 변화’, 즉 ‘관점의 전환과 변환’에 따라 사물과 현상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인식된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즉 마음의 변화와 관점의 전환에 따라 ‘본다는 것’ 역시 달라질 수 있다는 ‘인식의 상대성과 가변성(可變性)’이 바로 이 글의 핵심 요체라고 하겠다.

‘소완정기’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만약 어떤 사람이 사물의 앞만 본다면 그는 뒤를 알지 못하고, 다시 뒤만 본다면 앞을 알지 못하게 된다. 또한 왼쪽만 보면 오른쪽을 알 수 없고, 다시 오른쪽만 보면 왼쪽을 알 수 없다.

만약 이렇게 본다면 ‘보는 것’은 사물에 대한 실체에 접근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러나 앞과 뒤와 왼쪽과 오른쪽, 위와 아래, 안과 밖 등 다양한 각도와 관점의 전환과 변환에 따라 사물을 바라본다면 한 곳이나 일부만을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더 그 실체에 근접할 것이라는 이치는 쉽게 공감이 갈 것이다.

더욱 구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사과’라는 과일을 예로 들어보겠다. 사과의 앞을 보는 순간 뒤를 보지 못하고, 왼쪽을 보는 순간 오른쪽을 보지 못하고, 위에서 보면 아래를 보지 못하고, 겉에서 보면 안을 보지 못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본다는 것’만으로는 사과의 전체를 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윤휴는 주자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숭배하던 송시열 등의 교조적 주자성리학자들에 맞서 말하기를 “천하의 이치(진리)란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부르짖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사과의 전체는 알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필자는 ‘볼 수 없다’고 했지 ‘알 수 없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관점을 바꾸어 가면서 앞을 보고 다시 뒤를 보고, 왼쪽을 보고 다시 오른쪽을 보고, 위에서 보고 다시 아래에서 보고, 겉에서 보고 다시 안에서 본 다음 그 부분과 전체를 하나로 통섭(通燮)하고 통합(統合)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보이는 것 너머까지 보는 통찰력’이라고 주장한 관조의 미학이란 다름 아닌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한 관점에서 벗어나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관점의 다양한 전환과 무궁한 변환에 따라 사물과 현상을 받아들이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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