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두(一蠹) 정여창② 연산군의 증오로 부활한 사림의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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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一蠹) 정여창② 연산군의 증오로 부활한 사림의 순교자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7.1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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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⑫ 선비정신의 사표, 동방 사현(四賢)③
▲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연산군묘. 원 안은 조선 10대 왕 연산군.

[헤드라인뉴스=한정주 역사평론가] 일두(一蠹)’라는 정여창의 호는 자신을 좀 벌레로 낮추어 겸양의 뜻을 보였다고 하기보다는 간혹 나태함과 용렬함과 게으름의 미혹에 빠져드는 자신을 채찍질해 무엇 하나를 하더라도 세상과 사람들에게 의롭고 이로운 일을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친구인 박언계(朴彦桂)라는 이의 편지에 답장으로 보낸 글에 잘 드러나 있다.

“헤어진 후로 우러러 연모(戀慕)하는 마음이 백배는 더하였습니다. 그런데 보내주신 편지를 열어 보니 참으로 깊이 위로가 됩니다. 더욱이 가을 날씨가 차가운데 공부하는 태도가 진중(珍重)하니 위로가 되고 또 위로가 됩니다. 아우는 노친을 모시고 그럭저럭 지내고 있으니, 깊이 염려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친구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도리는 단지 선(善)을 권하는 데에 있을 따름이니, 오직 정성(精誠)으로 학문에 나아가고 공경(恭敬)으로 몸을 단속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처럼 용렬하고 노쇠하며 나태함이 더욱 심한 자야 다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 벌레(天地間一蠹)’라는 비웃음을 진실로 모면하기 어려우니, 스스로 탄식할 뿐입니다.” 『일두집(一蠹集)』, ‘박언계에게 답하다’

김종직과 맺은 사제의 인연은 이렇듯 정여창을 인의(仁義)를 숭상하고 절의(節義)를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는 사림의 큰 인물로 만들었다.

정여창은 여러 사람들이 조정에 자신을 천거했지만 33세(1482년. 성종 13년) 때 전주부사(全州府使)를 지낸 이외에 41세(1490년. 성종 21년) 때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합격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의 직위에 오를 때까지 경남 하동의 악양(岳陽)에 머물며 성리학을 탐구하거나 사림의 학자들을 찾아가 학문을 강의하고 토론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았다.

그리고 예문관의 검열을 거쳐 세자 시절의 연산군(燕山君)을 지도하는 시강원(侍講院)의 설서(設書)로 중앙 정계에서 활약할 때에도 임금이 내린 술까지 거부할 정도로 자기 수양에 매진했다.

그러나 1492년(43세. 성종 23년) 스승 김종직이 사망하고 평소 두터운 친교를 나눈-생육신(生六臣) 중 한 사람인-남효온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큰 시름을 겪은 데다가 2년 후에는 세자 연산군과 불화하면서 미움을 사자 외직인 안음현감(安陰縣監)을 자청해 조정을 떠나고 만다.

그해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사림파는 갖가지 고초를 겪게 된다. 연산군이 자신의 행동에 번번이 제동을 거는 사림파를 증오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성종 시절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의 직언에 큰 곤욕을 치렀던 훈구파 대신들은 조정에서 사림파의 싹을 완전히 제거할 계획으로 끔찍한 ‘정치적 음모’를 꾸몄다.

이러한 어지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도 정여창은 안음현감으로 어진 정사를 펼치는 한편 제자 양성에도 힘을 썼다.

그러나 연산군이 새로이 임금이 된 지 4년째 되는 1498년 훈구파 대신이자 권간(權奸)인 유자광과 이극돈은 일찍이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祭文)’이 『성종실록』 편찬 때 사초(史草:실록 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빌미삼아 이른바 선비 살해 사건인 사화(士禍)를 일으킨다.

당시 이들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의 내용이 항우(項羽)와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한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고사를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일을 비방한 것이라고 여론몰이를 했고, 눈에 가시 같던 존재인 사림 세력을 어떻게 몰아낼까 호시탐탐 기회만 보고 있던 연산군은 유자광과 이극돈의 고변을 계기삼아 조정 안팎의 사림파에게 무자비한 정치적 탄압을 가했다. 이 사건이 조선사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다.

이 무오사화로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에 삽입한 김일손은 사형에 처해졌고,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의 극형에 처해졌다.

당시 중앙 정계와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정여창 역시 사화의 피바람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는 김종직의 수제자로 당시 사림파의 적통을 계승한 거물이었고, 또한 김일손의 동문(同門)이자 절친한 지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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