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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과 자전적 기록 동시에 남긴 조선의 유일한 문사(文士)[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⑥
한정주 기자  |  jjoo@iheadlin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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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11  07:4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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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세황의 자화상. 1782년, 비단에 채색, 88.7×51cm, 개인 소장, 보물 590호.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⑥

[한정주=역사평론가] 표암(豹菴) 강세황은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의 스승이자 시(詩)·서(書)·화(畵)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고 불렸던 문인이자 화가였다.

특히 그는 18세기 풍속화와 인물화는 물론 진경산수화의 유행에 큰 기여를 했고 서양의 화법을 새롭게 수용했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표암이라는 호에 대한 유래는 그가 쓴 자전적 기록인 ‘표옹자지(豹翁自誌)’에 나와 있는데, 앞서 소개한 허목처럼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자호로 삼았던 독특하고 기이한 인물이다.

거기에서 그는 “스스로 표옹(豹翁)을 호로 삼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표범처럼 등에 흰 얼룩무늬가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표옹을 호로 삼았으니 스스로 장난삼아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글은 강세황이 1766년(영조 42년) 나이 54세 때 지은 것이다.

“옹이 스스로 붙인 호는 표옹(豹翁)이다. 어려서부터 등에 있는 흰 얼룩무늬가 표범과 비슷하여 호로 삼았으니 대개 스스로 장난삼아 해본 것이다.

… 옹은 숙묘 계사년(1713년) 윤5월 21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열서너 살에 행서를 쓸 수 있어서 글씨를 구해다가 병풍을 만든다는 사람도 있었다. 열다섯에 진주 유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녀는 현숙하여 부덕(婦德)이 있었다.

큰형님 부사공이 참소를 입게 되어 귀향하게 되니 옹은 세상길이 험한 것을 알고 영예는 바랄 만하지 않다고 여겨 과거시험에 나아가려는 생각을 버렸다. 오직 옛글에 전념하여 당송의 작품을 암송한 것이 매우 많았다.

마음을 가라앉혀 생각한 지 수십 년에 식견과 이해가 점차 통달되어 깊은 조예와 홀로 얻은 견해가 있었다. 혹 작자의 이름을 가려도 시대가 언제인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를 읊조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서 간혹 지은 것이 있어도 번번이 버리고 거두지 않았다.

아버지 문안공께서 64세에 옹을 낳아 매우 사랑하셔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시었고, 가르침을 지극하게 하셨다.

계축년(1733년) 작은 형수가 죽었을 때에 문안공께서는 이 때 팔순을 넘으셨는데도 장차 진천에 장사지내는 것을 친히 보려 하셨다. 옹이 울며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으셨고 모시려 하였으나 또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몰래 시종과 말을 빌려서 알리지 않고 뒤를 따라갔다. 도중에야 문안공께서 비로소 아셨으나 그 정성을 갸륵하게 여기셔서 나무라지 않았다.

진천에 이르러 끝내 아버지를 잃는 아픔을 겪게 되었으니 아아! 슬프다. 경신년(1740년)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복(服)이 끝나자 안산군에 터를 잡아 낡은 집을 지으니 쓸쓸하였다. 생계에 관한 일은 전혀 묻지를 않고 오직 문사와 붓과 벼루를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또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하여 때로 혹 붓을 놀리면 질펀하고 우아하여 속기를 벗어나기도 했다.

산수도는 대체로 왕몽과 황공망의 법이 있었고, 묵란(墨蘭)이나 묵죽(墨竹) 그림은 더욱 맑고도 굳세어 세속의 기운을 끊은 듯하였으나 세상에 깊이 아는 자가 없고 스스로도 잘하는 일이라 여기지 않아 다만 흥을 품고 마음에 맞는 것을 펼쳐낼 뿐이었다. 혹 남이 농담 삼아 구하면 속으로는 몹시 싫고 괴롭지만 또한 일찍이 매정하게 물리치지는 않고 건성으로 응하여 남의 뜻을 뿌리치려 하지 않았다.

서법에서는 이왕(二王), 즉 왕희지와 왕헌지를 본받고 미불과 조맹부의 서법을 섞어 자못 깊은 묘미를 이루었다. 전서와 예서에도 예스러운 뜻을 터득하였다. 매번 흥이 일면 옛날 법서 여러 줄을 임서함으로써 조용하고 한가하면서도 맑고 원대한 뜻을 거기에 담았다.

성품이 조용하고 담박한 탓에 세속을 초월하여 삼베옷고가 거친 밥에도 편안히 여기며 싫어하지 않으면서 일찍이 가난함과 군색함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마음이 어질고 관대하여 대체로 남의 관심을 근심하고 남을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것에 뜻을 두었다. 서로 깊이 아는 자들은 또한 이 때문에 옹을 허락하였다.

참의(參議) 임정은 옹의 매형이었는데 옹의 글씨가 왕희지나 왕헌지의 묘한 경지에 나아갔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우연히 잔치에서 함께 두보의 ‘검무가(劍舞歌)’를 화운했는데 책상을 치며 옹의 글을 읊어보고는 말하기를 ‘우리나라 백년 이래로 이런 시는 없었다’고 하기도 했다.

승지 최성대가 일찍이 어느 집에서 옹이 옛 그림에 쓴 작은 해서 글씨를 보고 놀라 말하기를 ‘중국 사람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하더니 옹이 썼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또 칭찬하기를 ‘중국 사람도 미칠 수 없는 경지다’라 하였다.

또 옹의 ‘연강첩장도가(煙江疊嶂圖歌)’를 보고는 탄식하기를 ‘시는 또 글씨보다 훨씬 더 낫다’라 하였다. 두 공은 모두 문단의 원로인데 옹을 넘치도록 추켜세움이 이와 같았다.

옹은 체구가 작고 모습도 보잘 것 없어 갑자기 만나는 자는 옹의 마음속에 또한 스스로 독특한 식견과 오묘한 견해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가볍게 여겨서 모욕하는 자가 있어도 옹은 으레 그러려니 하며 웃어 넘겼다.

계미년(1763) 작은 아들 흔이 급제하였다. 임금께서 옛 신하의 도타운 충정을 생각하시고 선왕의 융성한 대우를 돌아보셔서 은혜로운 말씀이 정중하셨다. 경연의 신하들이 옹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한다며 아뢰니 임금께서는 특별히 교서를 내리시기를 ‘말세에는 시기하는 마음이 많아 천한 기술 때문에 얕보는 자가 있을까 싶으니 다시는 그림을 잘 그린다 하지 말라’ 하셨다.

대개 임금께서 미천한 신하를 사랑하고 아껴주시며 곡직하게 보살펴 주시기를 이렇게 보통이 넘게 하시었다. 옹이 이런 말씀을 받고는 땅에 엎드려 놀라 울기를 사흘 동안 하니 눈이 퉁퉁 부었다.

오직 이나 서캐 같은 이 천한 것이 어찌 일찍이 한 번이라도 임금님 곁에 가기를 바랐을 것이리오. 다산 선신(先臣)의 옛 은혜로 천고에 드문 은혜를 내린 것이니 정건에게 임금께서 글을 써 준 것과 비교할지라도 훨씬 더 분에 넘치는 일이다.

이로부터 마침내 그림과 붓을 태워버리고 다시 하지 않기로 맹세하였고 사람들도 강권하여 구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의 의론이 또한 혹 벼슬을 시키려 하였지만 스스로 서둘러 나아갈 뜻이 없었다.

옹은 여러 대에 걸쳐 벼슬한 가문이나 운명과 시기가 어그러져 낙척하였고 늘그막에는 시골에 물러나 살면서 시골 노인들과 자리나 다투었다. 만년에는 한양에 발길을 끊고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서 때때로 대지팡이와 짚신으로 들판을 거닐었다.

겉으로는 성품이 졸렬한 듯 하였으나 속은 자못 영특하고 지혜로워 뛰어난 식견과 공교로운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심오한 음률과 기교한 기완(器玩)이라도 한번 귀와 눈에 접하면 환히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손으로는 바둑의 흑백을 집지 않았고 절대로 여러 잡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점쟁이와 더불어 운명을 말하거나 관상법에 대해 이야기한 일도 없었다. 풍수쟁이의 말은 더욱 믿지 않았다. 병자년(1756) 아내가 죽었으나 이때도 풍수가를 불러 땅을 살피지 않고 스스로 과천 사동의 한적한 땅에 자리를 잡아 무덤을 썼다.

아들 넷 인(인), 흔(俒), 관(관), 빈(儐)을 두었으나 모두 대략 문자만 이해시켰을 뿐 다른 가르침을 준 적은 없고 오직 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듯 효도하고 우애하여 선대의 가르침을 욕보이지 말라고만 권면하였다.

옹이 일찍이 자화상을 그렸는데 다만 그 정신에 치중하여 그린 것이라 세속의 재주 있는 무리가 그린 초상화와는 아주 다르다. 이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죽어 남에게 묘지와 행장을 구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평소의 대략을 적어놓으면 거의 사실과 비슷할 것이라 여겼다.

마침내 붓 가는 대로 이와 같이 써서 자식들에게 남긴다. 훗날 이 글을 보는 사람 중에 반드시 그 세상을 논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 불우하였음을 슬퍼하고 옹을 위해 한숨 쉬며 탄식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어찌 옹을 알기에 충분하리오? 옹은 이미 스스로 기꺼이 여겨 가슴속을 넓고도 평탄하게 하여 터럭만큼도 슬퍼하며 자득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지금 임금(영조) 42년 병술년(1766년) 가을 표옹은 스스로 쓰노라. 이때 나이 쉰 넷이다.” 강세황,『표암유고』, ‘표옹자지’

더욱이 강세황은 여러 점의 ‘자화상’을 남기고, 그 자화상에 ‘자찬(自讚)’을 남겨 자신의 기이한 모양과 고상한 마음을 한껏 드러내기도 했다. 아마도 자화상과 자전적인 기록을 동시에 남긴 조선의 유일한 문사(文士)가 바로 강세황일 것이다.

“변변찮은 얼굴에 툭 트인 마음을 가졌다. 평생토록 가진 것을 시험해보지 못했으므로 온 세상 사람이 그 깊이를 알지 못한다. 한가할 때에 짧은 글을 지어서 때때로 기이한 모양과 고아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강세황, 『표암유고(豹菴遺稿)』, ‘화상자찬(畵像自讚)’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썹이 새하얀데 머리에는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몸에는 야복(野服)을 걸쳤으니 마음은 산림에 두고 이름은 관리 명부에 있음을 이 차림으로 보였구나. 가슴에 많은 책을 간직했고 붓의 기세는 오악을 흔들 정도였다.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마는 나 스스로 재미로 삼는다. 나이는 일흔이고 호는 노죽(露竹)이다. 초상화는 제가 그린 것이고 찬도 스스로 지은 것이다. 임인년(1782)에 쓰다.” 강세황, 『표암유고』, ‘화상자찬(畵像自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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