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롭고 강렬한 내면세계와 자의식 보여준 이덕무의 호(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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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롭고 강렬한 내면세계와 자의식 보여준 이덕무의 호(號)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1.17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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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⑦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⑦

[한정주=역사평론가] 문장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분방함과 개성 넘치는 작가 정신으로 ‘자의식’이 충만한 자전적 기록을 남긴 이로는 단연 이덕무를 으뜸으로 꼽을 만하다.

그는 여항(閭巷)에 사는 가난한 서얼 출신의 무명자(無名子)였을 때부터 관심 갖는 이 없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기록하는 일을 큰 즐거움 중의 하나로 삼았다. 그 대표적인 글이 184자(字)에 불과한 짧은 글에 자신의 21년 인생을 담은 ‘간서치전(看書痴傳)’이다.

“목멱산(남산) 아래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는데 어눌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고 성품은 게으르고 졸렬해 시무(時務)를 알지 못했으며 바둑이나 장기는 더구나 알지 못했다. 이를 두고 다른 사람들이 욕을 해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해도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으며, 오로지 책만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더위, 배고픔이나 아픈 것도 전연 알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21살이 되기까지 하루도 손에서 고서(古書)를 놓지 않았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다. 그러나 동창과 남창과 서창이 있어 해의 방향을 따라 밝은 곳에서 책을 보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 기서(奇書: 기이한 책)를 구한 줄 알았다.

자미(子美: 두보의 자)의 오언율시를 더욱 좋아하여 병을 얻어 끙끙 앓는 사람처럼 골몰하여 웅얼거렸다. 심오한 뜻을 깨우치면 매우 기뻐서 일어나 왔다 갔다 걸어 다녔는데, 그 소리가 마치 갈까마귀가 우짖는 듯했다. 혹 아무 소리도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지도록 보기도 하고 혹은 꿈꾸듯이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니 사람들은 그를 두고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라고 했다. 이 또한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의 전기(傳記)를 지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이에 붓을 떨쳐 그에 관한 일을 써 ‘간서치전(看書痴傳)’을 만들었다. 그 이름과 성은 기록하지 않았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간서치전’

이덕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수많은 자호(自號)를 사용했다. 스스로 고백하기를 매번 글을 지을 때마다 새로운 호를 만들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덕무는 왜 이토록 많은 호를 사용했던 것일까? 그것은 왕성한 호기심과 지식욕 때문에 공간적으로는 동양과 서양, 시간적으로는 고대와 당대(18세기)를 넘나들며 백과사전적 지식을 탐구하고 기록으로 남겼던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즉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변신을 모색한 그의 호기심과 지식욕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호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특히 이덕무는 젊은 시절 자신의 호에 대해 직접 설명한 ‘기호(記號)’라는 글을 지은 적이 있다. 이 글이 필자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았던 까닭은 이덕무가 수많은 호를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와 자의식을 아주 다채롭고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삼호거사(三湖居士)는 약관(弱冠)에 호기(豪氣)가 있었다. 엄숙하고 공경하면 나날이 학문이 강해진다는 말에 뜻을 두어 일찍이 호를 ‘경재(敬齋)’라 하였다. 뜻이 있으면 바로 지향(指向)하는 목표가 있으니, 여기에 도달하고자 하여 또 호를 ‘팔분당(八分堂)’이라 하였다.

팔분(八分)이란 사마광(司馬光)이 성인(聖人)을 십분(十分)이라고 할 때 구분(九分)이면 대현(大賢)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에 가까운 것이다. 가난해 집은 한 말(斗) 정도의 부피만큼 작았지만 또한 즐거워하였다. 이에 매미의 허물과 귤의 껍질처럼 구부정하다고 하여 호를 ‘선귤헌(蟬橘軒)’이라 하였다.

처지에 따라 행실을 닦고자 해서 또한 호를 ‘정암(亭巖)’이라고 하였다. 세상을 피해 숨는 사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 또 ‘을엄(乙广)’을 호로 삼아서 구부러지고 조그마한 석실(石室)에 뜻을 두어 은둔하려 하였다.

마음을 수경(水鏡)처럼 잔잔하고 맑게 하고자 해서 다시 호를 ‘형암(炯菴)’이라고 하였다. 대저 일마다 공경하여 닦으면 고인(古人)에 가깝고 마음을 물과 같이 맑게 하고 작은 집에 누워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 비록 부엌 연기가 쓸쓸하여도 붓을 잡아 문장(文章)을 지으면 아침에 피는 꽃과 같이 빛이 난다.

이 사람은 이것으로도 오히려 편안하지 않아 빙긋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는 어린아이가 재롱을 좋아하는 것과 다름없다. 장차 처녀와 같이 지키려고 함이다”고 하며, 그 원고의 제목을 ‘영처(嬰處)’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자신의 학식과 재능을 감추고는 어리석고 미련한 척하였다. 단정한 사람이나 장중한 선비에게도 기뻐하고 저잣거리의 장사꾼에게도 기뻐하였으니 대개 빈 배를 홀로 띄워 어디를 가나 유유자적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또 호를 ‘감감자(憨憨子)’ 혹은 ‘범재거사(汎齋居士)’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일찍이 삼호(三湖)에 거주했기 때문에 스스로 ‘삼호거사(三湖居士)’라 하였는데, 이것이 호의 시초이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기호(記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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