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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의 미친 선비다”…자찬묘지명 촉발시킨 ‘자의식의 발견’[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⑩
한정주 기자  |  jjoo@iheadlin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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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08  07:4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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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고처럼 고요한 산 속에서 선비가 한가로운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그린 김희성의 ‘산정일장도’.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⑩

[한정주=역사평론가] 18세기 말에서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오랜 세월 중인 출신의 문인으로 크게 활약했던 조수삼은 스스로 ‘나는 조선의 미친 선비(狂士)이다’라는 존재론적 자각을 통해 세상의 비난과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길을 꿋꿋하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자신의 삶을 ‘경원선생자전(經畹先生自傳)’이라는 자전적 기록 속에 담았다.

“경원 선생은 조선의 미친 선비다. 천성이 글 읽기를 좋아하여 흰머리가 되도록 옹알옹알 그치지 않았으나 끝내 또한 스스로 잊어버려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멍하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억지로 기억해서 도도하게 일만 글자 분량을 외워 육경을 전부 외울 수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글짓기를 좋아하여 심지어 먹고 자는 것도 그만두었으나 그리 훌륭한 글을 짓지는 못했다. 하지만 왕왕 기세가 높고 뛰어나 옛 작자의 풍모가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변변찮은 음식조차도 실컷 먹지 못했는데 열흘이나 한 달씩 산수간으로 나가 노닐며 아내와 자식을 돌보지 않았다. 본디 술을 마시지 못했으나 일찍이 사신을 따라 요동벌을 지나 명발(溟渤: 큰 바다)에 이르고 연대(燕臺: 북경·원래는 황금대)로 들어가 개를 도살하는 저자거리에서 노닐었던 때에는 커다란 술잔을 쳐들어 하룻저녁에 서너 말을 죄다 들이켰다.

기력이 가냘프고 연약해져 옷을 이기지 못했으나 고금의 성공과 실패 의리와 이익의 분별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문득 머리카락이 치솟고 눈을 크게 떠서 기세가 오른 것이 용사와 같았다.

남과 사귀기를 좋아해서 귀한 이, 천한 이, 현명한 이, 어리석은 이를 따지지 않고 모두 그 환심을 얻었으나 끝내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해학을 잘하고 비속한 일을 많이 말했으나 궁극적으로는 상경(常經: 떳떳한 도리)을 등지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공자의 도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끼어들어 비난할 수 없었다.

늙어 병이 많고 또 게을러지자 문을 닫고 찾아오는 손님을 물리치고 종일토록 머리가 지끈거려 자는 듯 누워있었다. 손님이 오면 모두 사절하고 만나보지 않았으나 유독 몇몇 사람과는 교유하였으니, 곧 깊이 알아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탄식하며 ‘나에게 십년이라는 기간이 더 주어져 만일 문장에 진력한다면 역시 성대(聖代)를 위해 ‘격앙가’를 짓기에 충분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진(蘇秦)이 했던 말에 대해 일찍이 회한을 느껴 ‘대장부로서 몇 이랑의 밭을 도모함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나는 마땅히 구경(九經)을 좋은 밭으로 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스스로의 아호를 ‘경원선생’이라 했다.” 조수삼, 『추재집(秋齋集)』, ‘경원선생자전’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18세기와 19세기 초반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비로소 자기 정체성과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적 의식, 즉 ‘자의식’을 발견한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대를 전후해 지식인(선비)들의 글에서 이른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부쩍 많이 등장하는 배경 역시 ‘자의식의 발견’에서 찾을 수 있다.

묘지명은 대개 사후(死後) 자손들이 명망이 있거나 지위가 높은 이에게 청해 죽은 사람의 생애를 기록하고 삶을 예찬하는 글을 지어서 무덤에다 함께 넣는 글이다. 따라서 명망과 지위가 높은 이가 쓴 묘지명일수록 죽은 사람에게 예의를 다하고 명성을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상식과 예법을 거부한 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기록하는 ‘자찬묘지명’을 적었다는 것은 보통의 선비나 문인이라면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획기적인 행동이다.

세상 사람들이 나의 삶과 뜻을 비하(卑下)하는 것은 물론 미화(美化)하는 것도 싫다, 그래서 나는 직접 기록을 남겨 내가 죽고 난 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바로 ‘자찬묘지명’을 쓴 이들의 마음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찬묘지명’이야말로 참으로 ‘글은 나 자신이다!’라는 ‘자의식의 미학’이 가장 충만한 글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자신의 평생을 가리켜 ‘다섯 가지를 낭비한 삶’이라면서 스스로 ‘오비거사(五費居士)’라 일컫고 ‘오비거사생광자표(五費居士生壙自表)’라는 자찬묘표(自撰墓表)를 남긴 풍석 서유구의 글을 읽어보자.

그는 할아버지 서명응과 아버지 서호수로 이어져온 달성 서씨 가문의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을 종합하고 집대성한 19세기 최고의 실학자이다. 특히 서유구는 약 18년에 걸쳐 113권 52책, 250만 자에 달하는 최대 규모의 농업 서적이자 실학 서적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저술할 정도로 이용후생과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남다른 뜻과 기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서유구는 1764년(영조 40년)에 태어나 1845년(헌종 11년)에 사망했다. 영조와 정조 그리고 순조와 헌종에 이르기까지 4명의 임금이 다스리던 시대를 살면서 82세까지 장수했다.

이 자찬묘표는 그의 나이 79세 때 썼다고 한다. 나이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기록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이른바 ‘오비(五費: 다섯가지 낭비)’로 정리해 써내려간 아주 독특한 구성의 글이다.

“풍석자(楓石子)가 부인 송씨의 광중을 단주(湍州: 장단) 백학산 서쪽 선영의 아래에 옮기고 난 뒤, 그 오른쪽을 비워 수장(壽藏)의 곳으로 삼았다. 어떤 사람이 ‘옛날 사람 가운데도 그렇게 한 사람이 있었죠. 그대는 스스로 묘지를 짓지 않나요?’ 하기에 풍석자는 ‘아! 제가 무슨 뜻 둔 바가 있었다고 묘지를 적겠습니까?” 했다.

그런데 전에 내가 친척 아우 붕래(朋來)에게 답한 서찰에서 삼비(三費)의 설을 말한 것이 있다. 처음에 내가 중부 명고공(明皐公: 서명응)에게 『예기』 ‘단궁(檀弓)’과 ‘고공기(考工記)’, 『당송팔가문』을 배울 때는 우람하게 유자후(柳子厚: 유종원)와 구양영숙(歐陽永叔: 구양수)의 문장을 배울 뜻이 있었다. 얼마 있다가 『시』·『서』와 『사서』를 읽게 되면서는 또 정사농(鄭司農: 정현)의 명물설과 주자양(朱紫陽: 주희)의 성리설을 떠들게 되었다.

바야흐로 빠져들기는 괴로울 정도로 빠져들었으면서 터득한 것이 없었으되 도끼를 잡고 몽치를 던지는 수고를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했다. 하지만 얼마 있다가는 부친의 유업을 잇느라 저지당하여 뜻이 흔들렸고 벼슬살이하느라 유혹당하여 뜻을 빼앗겨서 지난날 배운 것을 지금은 모두 잊었다. 이것이 첫 번째 낭비이다.

이름을 신하의 명부에 올린 처음에 정묘(正廟: 정조)께서 앞서의 악을 전부 씻어주시는 은혜를 입어 영화로 통하는 서반의 청직에 숫자나마 채우도록 반열에 끼워주셨기에 스스로 자환씨(子桓氏: 조비)의 계고(稽古)와 유중첩(劉中疊: 유향)의 교서(校書)를 직분으로 삼으려고 스스로 기약했던 일을 다시 잊고 말았다.

바야흐로 이름이 관리 명부에 기록되어 온힘을 쏟아부을 때 손에 굳은살이 박이고 눈이 흐릿하게 되는 수고를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해나갔다. 하지만 얼마 있다가 양장구곡(羊腸九曲) 같은 험한 벼슬길이 눈앞에 있고 구당협 같은 험난함이 뒤에 있어 수레의 굴대가 꺾이고 배의 키를 잃어버려 머뭇거리기만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이 두 번째 낭비이다.

무릇 그런 뒤에 폐기되어 진(秦)나라 동릉후(東陵侯: 소평)의 오이, 운경(雲卿)의 채소, 한(漢)나라 범승(氾勝)의 호박, 후위(後魏) 가사협(賈思勰)의 나무에 관한 농법을 고개 숙이고 묵묵히 따라 익혀 경영하고 계산해서 날과 달을 쌓았으니 다툼 없는 경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역시 사물이 인색하게 굴어 착오를 일으키고 칭칭 얽어매어 꽃부리가 맺기를 바랐건만 마침내 동량재가 꺾이고 집이 엎어져서 일만 가지 인연이 기왓장 깨지듯 부서지고 말았다. 이것이 세 번째 낭비이다.

이것이 병인년(1822년·순조 22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있었던 설이다. 그 이후 다시 두 가지 낭비가 있었다.

계미년(1823년. 순조 23년)의 해에 명고공(서명응)이 섬에서부터 육지로 이배되셨다가 갑신년(1824년. 순조 24년)에 유배 명부에서 이름이 영원히 씻겨 없어지시자 나는 다시 조정의 반열에 끼게 되어 봄빛이 아름답게 쪼이자 마른 풀뿌리가 다시 피어나듯 해서 화려하고 후한 벼슬을 차례로 거치게 되었다.

하지만 재주가 짧고 성격이 성글고 게을러 조정에 들어와 군주와 정치를 논해 협찬하는 행적도 없었고 벼슬살이를 하면서 군은을 보충하거나 군은에 보답하는 공적도 없었다. 그러다가 심지어 사려로 기력이 소모되어 휴가를 청했으니 지난 자취를 회상하면 마치 물에 뜬 거품처럼 환몽과도 같다. 이것이 추가되는 첫 번째 낭비이다.

남들과의 교유를 끊고 피하던 처음에는 우환 속에 있으면서 우환을 잊기 위해서 자료들을 두루 모으고 널리 채집해서 『임원경제지』를 편찬해서 부(部)는 16개로 나누고 국(局)은 120개로 나누니 혁혁하게 단연(丹鉛: 교정을 보는 데 쓰는 단사와 연분)으로 교정하고 갑을(甲乙)로 편집하는 수고를 한 것이 앞뒤로 30여 년이나 되었다.

하지만 책이 완성되려는 참에 한 삼태기가 모자라 구인(九仞)의 봉우리를 이루지 못하듯 공력이 부족해서 그것을 목판으로 새기자니 재력이 없고, 그것을 간장독이나 덮는 데 쓰도록 폐기하자니 조금 아쉬움이 있다. 이것이 또 한 가지 낭비이다.

대개 낭비한 것이 다섯 가지나 되다보니 남은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 살더라도 남에게 이익 됨이 없고 죽더라도 후세에 이름이 나지 않을 것이다. 살아간다고 하기에는 짐승이 새가 숨을 깔딱거리고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을 따름이다. 죽었다고 하기에는 풀이 망해가되 아직 끝나지 않은 것과 같을 따름이다.

이와 같고도 이것을 두고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남들은 이미 다 이룬 셈이다. 이와 같기에 이것을 두고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면 이룬 것 없는 자가 무슨 말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하겠는가?

아아, 정말로 산다는 것이 이처럼 낭비일 뿐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역시 낭비는 잠깐이고 거둔 것이 있어 오래간단 말인가? 저 입언(立言)과 입공(入功)이 탁월해서 불후의 땅에 발을 똑바로 세운 사람들은 그 정신과 기백이 반드시 백세나 천세 이후까지 몸과 이름을 끌어안고 보호할 것이니, 이것은 하루아침에 엄습해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젊어서는 성실하다가 장성해서는 근심이 많았고 늙어서는 어둑어둑하므로 시원을 따져보고 끝에서 처음으로 되돌려 몽뚱이와 함께 변화해 없어지지 않을 것을 찾아본다고 해도 끝내 그림자와 음향처럼 방불한 것을 얻을 수가 없다. 게다가 80년 세월을 죄다 낭비해버린 뒤에 뻔뻔하게 붓을 잡고 편석(片石)을 빌려서 문장으로 꾸미면서 휑하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모르고 있다니 아무래도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손자 태순(太淳)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은 뒤에는 우람한 비를 세우지 말고, 그저 작은 비석에 ‘오비거사(五費居士) 달성 서 아무개 묘’라고 써준다면 족하다.’

원회(元會)의 운세(運世)는 12만9600세인데 내가 살아 있는 시간은 고작 1620분의 1이니 홀홀하기 짝이 없도다! 그렇거늘 이미 70하고도 9년을 허비했으므로 작은 구멍 앞을 매가 휙 날아 지나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해의 날을 다 채우지 않는다면 하상(下殤: 8세부터 11세까지 사이에 죽음)과 구별이 되겠는가, 구별이 되지 않겠는가? 어린아이를 묻는 옹기 관에 벽돌 광곽에 무슨 명(銘)을 쓸 필요가 있는가? 이 때문에 탄식하노라. 무덤의 유실(幽室)이 깊숙하고 넓기에 돌아가신 조부와 돌아가신 부친을 이 언덕에서 따르리라.” 서유구, 『풍석전집(楓石全集)』, ‘오비거사생광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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