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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자찬묘지명…“감히 자신의 인생을 모욕하거나 왜곡하지 못하도록 하다”[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⑬
한정주 기자  |  jjoo@iheadlin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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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28  08: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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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생가와 묘지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다산 유적지.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⑬

[한정주=역사평론가] 자신을 극진히 총애한 정조대왕의 죽음 직후 노론의 마수에 걸려들어 18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 마현(馬峴) 마을로 돌아온 정약용은 회갑을 맞은 1822년(순조 22년)에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서 정조대왕과의 인연, 천주교에 대한 입장, 자신을 시기하여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역적으로 몬 인물들, 유배 생활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저술하고 엮은 500여권의 책 그리고 평생의 뜻을 새긴 명(銘)을 담았다.

정약용이 스스로 묘지명을 지은 까닭은 비록 폐족(廢族)으로 몰락했지만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의 인생을 모욕하거나 왜곡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정약용은 문집에 실을 ‘집중본(集中本)’과 무덤에 묻을 ‘광중본(壙中本)’의 두 가지 자찬묘지명을 썼다.

‘집중본(集中本)’에서는 장문의 글로 자신의 생애를 상세하게 서술한 반면 ‘광중본(壙中本)’에서는 비교적 간략하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기록했다.

여기에서는 ‘광중본(壙中本)’을 소개하는데, 이 자찬묘지명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정약용 생가와 묘지가 있는 다산 유적지 내에 게시되어 있다.

“이것은 열수(洌水) 정용(鄭鏞)의 무덤이다. 본 이름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鏞), 호는 사암(俟菴)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인데 음사(蔭仕)로 진주목사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숙인 해남윤씨인데 영종 임오년(1762년. 영조 5년) 6월16일에 열수 언저리 마현리(馬峴里)에서 약용을 낳았다.

약용은 어려서 머리가 영특했고 자라면서 학문을 좋아했다. 스물두 살(1783년. 정조 7년)에 열린 증광감시에서 경의(經義)로 초시(初試)에 합격한 후 회시(會試)에서 진사가 된 뒤로 변려문(대과시험의 문체)을 오로지 연마해서 스물여덟(1789년. 정조 13년)의 문과에서 갑과 2등으로 급제했다.

대신들이 선발해서 초계(抄啓)하여 규장각의 월과 문신(달마다 과제를 내려 글을 시험받는 문신)에 예속해 있다가 얼마 안 있어 한림원에 들어가 예문관 검열(정9품)이 되었다. 승진해서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교리, 성균관 직강, 비변사 낭관이 되었다. 외직으로 나가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을묘년(1795년) 봄에 경모궁에 시호를 올리는 도감의 낭관으로서 사간원 사간을 거쳐 발탁되어 통정대부로서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았다. 우부승지에서부터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참의가 되었다.

가경(嘉慶) 정사년(1797년)에 외직으로 나가 곡산 도호부사가 되어 은혜로운 정치를 많이 시행했다. 기미년(1799년)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승지가 되었으며 형조참의가 되어서 억울한 옥사를 처리했다. 경신년(1800년) 6월에는 임금으로부터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는 영광을 입었지만, 이 달에 정종대왕께서 돌아가시자 이에 앙화가 일어났다.

열다섯 살 때 풍산홍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홍씨는 무과를 통해 승지 벼슬을 지낸 홍화보(洪和輔)의 딸이다. 장가든 뒤부터 서울로 가서 지내다가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이 순정하고 행실이 독실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가환과 이승훈 등을 따라 성호 선생의 남기신 저술들을 얻어 보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경학의 서적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

진사로서 성균관에 들어간 뒤 이벽을 따라 놀며 서교(천주교)에 대하여 듣고 서교의 책을 보았다. 정미년(1787년) 이후로 4~5년 동안은 매우 열심히 서교에 마음을 기울였다. 하지만 신해년(1791년) 이후부터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지함이 엄중했으므로 마침내 천주교에 대한 마음을 끊었다.

을묘년(1795년) 여름에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가 들어와 나라 안의 분위기가 흉흉하자 외직으로 나가 금정 찰방에 보임(補任)되어서는 왕명의 뜻을 받아서 천주교도들을 유인해 교화시키고 제거했다.

신유년(1801년) 봄에 사헌부 관료인 민명혁 등이 서교의 일을 처음 문제 삼아 계문(啓聞)하여 이가환·이승훈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얼마 있다가 나의 두 형인 약전과 약종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한 사람은 죽고 두 사람은 살아났다. 여러 대신들이 의론해서 석방하도록 건의했지만 유독 서용보가 안 된다고 고집하여 약용은 장기현으로 유배되고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그해 가을에 역적 황사영이 체포되자 흉악한 인물인 홍희운과 이기경 등이 모의하여 약용을 죽이려고 해서 백 가지 계책을 써서 임금의 허락을 얻어내어 약용과 약전은 또다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황사영과 서로 알고 지낸 정상(情狀)이 없었기 때문에 옥사(獄事)가 이뤄지지 않았다. 태비(太妣: 정순왕후 김씨)께서 감안하여 처분해주심을 입어 약용은 강진현으로 유배되고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계해년(1803년) 겨울에 태비께서 약용을 풀어주라고 명하셨지만 정승 서용보가 막았다. 경오면(1810년) 가을에 아들 학연이 억울하다고 호소하자 고향으로 방축(放逐)하라고 명하셨으나 사헌부가 다시 조사하자고 계사(啓辭)를 올렸으므로 의금부가 막았다.

그로부터 9년 뒤인 무인년(1818년) 가을에야 비로소 고향에 돌아왔다. 기묘년(1819년) 겨울에 조정의 의론으로 다시 약용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려고 했지만 서용보가 또 저지했다.

약용은 유배되어 있던 십 년하고도 팔 년이나 되는 기간에 경전 연구에 마음을 기울였다. 시·서·예·악·역·춘추·사서에 관한 저술이 모두 230권인데 정밀하게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우쳐 옛 성인의 근본 뜻을 제대로 파악했다.

시문집으로 엮어놓은 것은 모두 70권인데 대부분 벼슬살이할 때 지은 것들이다. 그밖에도 나라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하는 일, 옥사를 심리하는 일, 무력을 갖춰 방비하는 일, 국토의 강역에 관한 일, 의약에 관한 일, 문자의 분석에 관한 일 등에 관해 편찬한 것이 거의 200권이다. 이것은 모두 성인의 경전에 근본을 두면서, 이 시대의 문제에 적용할 수 있도록 힘썼으므로 없어지지 않는다면 더러 인용해서 쓸 내용이 있을 것이다.

약용은 벼슬하기 전부터 임금께서 알아주시는 인연을 맺었다. 정종대왕(정조)께서 각별히 사랑하시고 예뻐하여 추어주신 것은 동료들과 비교하여 훨씬 지나쳤다. 그간에 받은 상품이나 하사해주신 책, 마굿간에 기르는 말, 호랑이 가죽, 그리고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들이 하도 많아서 이루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다.

국가 기밀에 참여할 때에는 품은 생각이 있으면 필찰로 적어 조목조목 진술하도록 임금님께서 허락하시어 그때마다 모두 윤허하시고 따르겠다는 비답(批答)을 내려주셨다.

일찍이 규영부(규장각)에서 서적을 교정할 때에는 직무의 일을 독촉하시고 채근하지 않으시고 밤마다 맛있는 음식을 보내주셔서 배불리 먹게 해주시고 궁중 내부에 비장되어 있는 모든 책을 내각(규장각)의 감독을 통해서 언제든지 열람을 청할 수 있게 해주셨다. 모두가 남다른 대우였다.

약용의 사람됨은 착한 일을 즐겨하고 옛것을 좋아했으며 행동하고 실천하는 데 과감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때문에 앙화를 불러들였으니, 이것은 운명이다. 평소 죄악이 아주 많아서 가슴속에 후회가 가득 쌓였다.

금년(1822년)에 이르러 임오년을 다시 맞게 되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회갑이니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마침내 긴요치 않은 잡무들을 죄다 제거하고 깨끗이 씻어 없애어 아침저녁으로 자기 성찰에 힘써서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회복하여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어그러짐이 없기를 바란다.

정씨의 본관은 압해(押海)이다. 고려의 말엽에는 백천(白川)에서 살았고 우리 조선 왕조가 설 때부터는 마침내 서울에 살았다. 처음으로 벼슬한 조상은 교리를 지낸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쭉 이어져 부제학을 지낸 수강(壽崗), 병조판서를 지낸 옥형(玉亨), 좌찬성을 지낸 응두(應斗), 대사헌을 지낸 윤복(胤福), 관찰사를 지낸 호선(好善), 교리를 지낸 언벽(彦壁), 병조참의를 지낸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홍문관)에 들어갔다.

이로부터 시절의 운수가 나빠져서 마현으로 이사해 살았으며 고조부·증조부·조부의 삼대가 모두 포의로 세상을 마쳤다. 고조의 휘는 도태(道泰), 증조의 휘는 항신(恒愼),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인데 오직 증조부만 진사를 하셨을 뿐이다.

아내 홍씨는 아들 여섯과 딸 셋을 낳았지만 요절한 아이들이 3분의 2이고 오직 아들 둘과 딸 하나만 제대로 컸다.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游)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에게 시집갔다.

나의 무덤은 집안 뒤란에 있는 자좌(子坐)의 언덕에 정했다. 부디 바라던 바와 같게 되었으면 한다. 명(銘)은 이렇다.

‘임금의 은총을 한 몸에 안고 / 궁궐 깊은 곳에 들어가 모셨으니 / 참으로 임금의 심복이 되어 /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섬겼네 / 하늘의 은총을 한 몸에 받아 / 못난 충심(衷心)을 압유(納牖 : 차근차근 말씀드리면 받아들여줌)하셨고 / 육경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 오묘하게 해석하고 은미한 데 통했네 /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기세를 폈지만 / 하늘은 그로써 너를 곱게 다듬었으니 / 잘 거두어 속에 갖추어 두면 / 장차 아득하게 멀리까지 들려 올리리라.’” 정약용, 『다산시문집』, ‘자찬묘지명 광중본(壙中本)’

이렇게 조선시대 문인들의 자전적 기록들을 살펴보면 글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고 글을 쓰는 것을 진아(眞我), 즉 ‘참된 자아 혹은 온전한 자아’를 찾는 길이라고 여겼던 투철한 작가 정신의 산물이 바로 ‘자의식의 미학’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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