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은 기운을 드러내 표현한 것…엷고 넓으며 깊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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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은 기운을 드러내 표현한 것…엷고 넓으며 깊어야 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3.09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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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⑭…자득(自得)의 미학②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⑭…자득(自得)의 미학②

[한정주=역사평론가] 그렇다면 글쓰기에서 ‘자득(自得)의 묘리’는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핵심은 “견문(見聞)과 경험(經驗)과 지식(知識)과 직관(直觀)과 사색(思索)과 글쓰기는-결코 따로 따로 구분하거나 분리할 수 없는-하나다”라는 것이다.

먼저 ‘글이란 보고 듣고 아는 만큼 나온다’는 점필재 김종직의 글을 살펴보자.

“천하의 관점에서 중국이 탄환만한 크기라면 우리나라는 하나의 까만 점에 불과하다. 그런데 성경숙은 까만 점에서 출발하여 탄환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 보고 들은 것이 많아 막힌 곳이 없고 언어와 문장은 기이하고 뛰어나며 책의 분량 또한 크고 넓다.

성경숙은 조선에서 나고 자랐지만 중국의 도읍지를 유람하면서 거대한 산하와 성곽,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배와 수레 및 인물, 웅장하고 화려한 예악과 문헌, 크고 호사스러운 광경과 풍속을 보고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귀가 듣고 눈길이 닿는 곳마다 즉시 마음이 움직였고 마음이 움직이면 곧바로 글을 지었다. 붓끝이 노니는 대로 여유 있게 문장을 써 내려가는 것은 평소 마음속 깊이 쌓아둔 것인 듯했다. 보고 들은 것이 이처럼 크고 넓었으며 언어와 문장은 정말 기이하고 훌륭했다.

그러나 만약 연계를 거쳐 옛 제나라와 노나라 지역의 유적을 둘러보고 또 초나라와 월나라 지역의 맑은 바람을 쐬고 주나라와 진나라의 옛 풍속과 문화를 보고 왔다면 그 견문과 언어와 문장이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평생 동안 천하를 두루 살펴 견문을 넓히고 문장을 이루겠다는 뜻을 펼쳐 보지 못하고 우리나라 이곳저곳만을 떠돌아다녔을 뿐이다. 그렇다 보니 초파리가 항아리 안을 천하로 여기듯 견문은 좁고 아무리 풀어 보아도 짧은 신세를 면치 못하는 버선 끈처럼 재주는 얕기만 하다. 부러움으로 채울 수도 없고, 감탄으로도 부족하다. 이에 성경숙의 『관광록(觀光錄)』 끝 부분에 품평을 적어 보낸다.” 김종직, 『점필재집(佔畢齋集)』, ‘성경숙의 『관광록』 뒤에 쓰다(跋成磬叔觀光錄後)’

서거정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송도를 유람하고 쓴 ‘유송도록(遊松都錄)’의 서문(序文)에서 ‘훌륭한 문장은 폭넓은 세상 경험과 그 속에서 기른 웅장한 기운에서 나온다’라고 강조했다.

“문장은 기운을 드러내 표현한 것이다.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갈고 닦았으며 사마천은 먼 곳을 여행하면서 웅장한 기운을 품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사마천의 문장은 크고 넓고 탁 트이고 끝이 없었다.

송나라의 문장가 소철 역시 두루 돌아다니며 세상을 살펴보는 것으로 웅장한 기운을 구하고자 했다. 종화산의 우뚝 솟은 모습과 황하의 당당한 흐름을 둘러보고 도읍지 궁궐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광경, 구양수와 한유 같은 걸출하고 위대한 인물들의 문장을 보았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천하의 문장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마자재 또한 ‘사마천의 문장은 책 속에 있지 않았다.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여행 속에서 배운 것이다. 여행이나 생활 속에서 배우지 않는 글은 곧 부패하거나 낡아버리기 쉽다’고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소철과 마자재 두 사람의 말을 새기고, 사마천이 품은 큰 뜻을 마음속 깊이 얻기 위해 힘썼다.” 서거정, 『사가문집(四佳文集)』, ‘송도 여행기의 서문(遊松都錄序)’

조선 전기를 주름 잡았던 대학자이자 명 문장가들이 보여준 이러한 글쓰기 철학의 연장선상에서 조선 중기인 선조 때의 문인 아계 이산해는 ‘세상 견문을 넓히지 않고 배우기만 해서는 글을 쓸 수 없다’고 역설하면서 다시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의 경우를 들어 “사마천은 온 세상의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해 기(氣)를 얻어 글로 나타내었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은 부드러우면서도 호탕하고 기이하면서도 굳세어 변화하는 기운이 넘쳐흘렀다”라고 극찬했다.

특히 그는 마음속 기운(氣運)과 문장의 관계를 기발한 착상을 통해 설명하는데 흥미롭게도 앞서 살펴본 “문장은 기운을 드러내 표현한 것”이라는 서거정의 생각과 너무나 닮아 있다. 그리고 실제 역사 속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대작(大作)과 걸작(傑作)은 대개 웅혼(雄渾)한 기운과 기상을 지닌 이들의 붓을 통해야만 비로소 탄생할 수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짓기를 좋아해 글이란 배우면 능히 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옛사람들의 책을 구해 읽고 오래도록 마음으로 기억하고 입으로 외운 다음 시험 삼아 써 보곤 했다.

그러나 글의 모양새는 갖추었지만 비루하기 그지없어 볼 만한 것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글이란 기(氣)가 중심이 되어야 하므로 일찍이 기(氣)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서 글짓기를 능숙하게 한 사례는 없었다.

옛날 태사공 사마천은 온 세상의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해 기(氣)를 얻어 글로 나타내었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은 부드러우면서 호탕하고 기이하면서도 굳세어 변화하는 기운이 넘쳐흘렀다. 나는 조그마한 땅에 태어났는데도 아직 나라 안의 훌륭한 경관조차 다 보지 못했다. 나의 글이 조잡하고 놀라울 것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다가 영동(嶺東)으로 귀양 가는 길에 낙산을 지나면서 일출을 보게 되었고 강릉을 지나면서는 경포대와 한송정의 빼어난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소공대를 지나면서는 보일 듯 말 듯 아스라이 먼 울릉도의 아름다운 자태를 바라보게 되었다. 내 마음속은 기쁨과 반가움으로 가득 찼다.

망양정에 올라 푸르디푸른 하늘과 바다를 보며 그 끝없이 넓고 깊은 광경을 본 후에야 평생 동안 품은 웅장한 풍경이 유감없이 다 발휘되어 예전과 사뭇 다르게 내 마음이 한없이 크게 느껴졌다. 온갖 시냇물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기(氣)란 반드시 근본과 뿌리를 튼튼하게 길러야 하고 문장이란 다양한 흐름을 하나로 품고 두터우며 깊고 넓어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해와 달과 별이 하늘을 돌아 쉼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장면을 보면서 기(氣)는 잠깐 동안이라도 끊어져서는 안 되고 문장은 순수하고 참되며 용감하고 굳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교룡과 고래가 물기둥을 뿜고 사납게 날뛰는 광경을 보고서는 기(氣)는 모름지기 빼어나게 용맹스러워야 하고 문장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어나고 무엇이든 넘어설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신기루와 신선이 산다는 섬이 모습을 감추었다 드러냈다 하는 것을 멀리서 보고는 기(氣)는 아무쪼록 침착해야 하고 문장은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우아해야 하고 그윽하고 깊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노한 풍랑이 울부짖으며 지축을 뒤흔들고 은산과 옥봉 그리고 소거(흰 수레)와 백마의 모습을 한 파도가 눈꽃처럼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마구 내달리는 장면을 보고서는 기(氣)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있어야 하고 문장은 깎고 끊어 우뚝 솟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잔잔해져 온 세상이 잘 닦은 거울과 같아서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물뿐이고 언뜻언뜻 달빛이 비쳐 잘 어우러진 광경을 보면서 기(氣)는 모름지기 머물러 있어야 할 곳에 머물러야 하고 문장은 엷고 넓으며 깊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이 변화하여 놀라움이나 기쁨으로 넘쳐 사람이 근심하고 슬퍼할 만한 일들을 이 망양정 위에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잡아들여 내 기운으로 북돋울 수 있다면, 그 기운을 발휘한 문장이 온갖 문체와 형식, 자태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기억하고 외우며 베끼기만 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보잘것없는 내 한 몸을 이끌고 망양정에 올라 하늘과 땅을 굽어보고 우러러보니 나란 존재가 쌀겨나 쭉정이, 하루살이보다도 더 하잘것없다. 그러나 높푸른 하늘과 드넓은 대지, 아스라한 바다와 헤아리기도 힘들게 빽빽한 사물이 온갖 괴이한 변화를 일으키며 내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와 단 하나도 내가 소용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또한 장엄한 광경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에 호리병 하나에 텁텁한 막걸리를 담아 혼자서 따라 마시다 취해 백발의 늙고 여윈 얼굴로 정자 위에 쓰러져 누우면 하늘과 땅이 이부자리이자 베개이고 넓고 푸른 바다가 일개 도랑일 뿐이며 고금(古今)의 기나긴 시간이 일순간일 뿐이다. 또한 옳고 그름, 얻고 잃음, 영화로움과 욕됨, 기쁨과 슬픔 따위가 남김없이 녹아 사라지고 깨끗이 씻겨 나가 저 태초의 어지러운 세계에서 조물주와 서로 만날 수 있다. 이 또한 통쾌한 일이지 않는가?

이처럼 장엄하고 통쾌하니 어찌 기(氣)가 가득 차지 않을 수 있겠으며 부족함이 있겠는가? 이렇게 되고 난 다음 붓을 잡고 종이를 펼쳐 시험 삼아 내 마음속 깊이 감탄할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정자에서 얻은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산해, 『아계유고(鵝溪遺稿)』, ‘망양정기(望洋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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