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쌓은 것은 덕행이 되고, 밖으로 표현한 것은 문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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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쌓은 것은 덕행이 되고, 밖으로 표현한 것은 문장이 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3.16 0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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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⑭…자득(自得)의 미학④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⑭…자득(自得)의 미학④

[한정주=역사평론가] 미수 허목 역시 자신은 처음부터 문장을 배우지 않고 단지 옛사람의 말을 외우고 매일같이 책을 읽었을 뿐인데, 그렇게 한 지 수십 년이 되자 자신의 마음을 말과 글로 표현해 밖으로 드러낸 것이 모두 문장이 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대가 나를 깊이 사랑하고 또 나를 나무람이 두터워 옛 성인과 현인의 일로 부지런히 힘쓰도록 권유하는데 천박한 내가 어찌 감당할지 두렵네. 나는 처음부터 문장 짓기를 배우지 않고 다만 옛사람의 말을 외우고 읊으면 매일같이 책을 읽었네. 그리고 세상의 수준이 점점 낮아져 이제는 옛 도(道)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탄식했네.

이때부터 몸으로 행할 수 있고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책일 뿐이라고 생각했네. 이리하여 사람의 일을 모두 끊어버린 뒤 세상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내가 좋아하는 것만 행하고 살았네.

입으로는 옛 성인들의 글을 외우고, 마음으로는 옛 성인들의 말을 새기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쓴 지 이제 40여 년이 다 되었네. 그럼에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정성을 다하기를 처음처럼 하고 있네. 이것은 내가 스스로 어리석음을 돌아보지 않고 옛 성인과 현인이 남긴 뜻의 본 모습을 보고자 마음으로나마 좇았기 때문이네.

그러다가 여유가 생기면 내 마음을 말과 글로 드러내었는데, 이 또한 고인의 뜻에 가깝다고 하지 않겠는가? 다시 생각해보면 글을 짓는다는 것은 본래 다른 길이 있지 않고 이처럼 찾아보고 스스로 익숙하게 익혀 밖으로 표현한 것이네.

그러므로 마음속에 쌓은 것은 덕행이 되고, 바깥 세상에 베푼 것은 사업이 되고, 밖으로 표현한 것은 문장이 되는 것이네.” 허목, 『미수기언』, ‘박덕일이 문학을 논한 일에 대해 답변한 글(答朴德一論文學事書)’

그러나 견문이 넓고 경험과 지식이 많다고 해서 곧바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덕무는 “견문이 넓고 지식이 많으면서도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과 같기 때문에 어느 순간 떨어져 쓸모없게(죽게) 되는 꽃의 신세가 되기 십상이고, 글을 쓰면서도 널리 알지 못하는 것은 깊이가 없는 물과 같기 때문에 어느 순간 말라버리는 꼴을 모면하기 어렵다고 경고한다.

즉 견문을 넓히고 지식을 쌓으면서 글을 쓰는 것과 글을 쓰면서 널리 알려고 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일단 글을 써보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마치 핵이 연쇄적으로 반응해 무한 분열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견문과 지식이 또 다른 견문과 지식과 연결되고, 다시 그 견문과 지식이 또 다른 견문과 지식으로 연결되어 애초 자신이 상상하지 못한 견문과 지식의 영역으로 무한히 확장되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단지 견문과 지식의 양을 늘린다고 해서 글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짚신 삼는 일에 비유하여 정의석이라는 이에게 답신을 보내 ‘독서와 견해 역시 자득(自得) 곧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이학규의 글은 이러한 이치를 밝히고 있다고 하겠다.

“독서와 견해는 본래 정해진 법이 없지요. 짚신 삼는 사람에게 비유해 보겠습니다. 짚신 날의 길고 짧음, 짚신 코의 성글고 조밀함은 오직 자신의 익숙한 눈과 손에 따라 눈대중으로 만드는데도 저절로 딱 들어맞는답니다.

만약 곁에서 온종일 지켜보고 손을 붙잡고 귀에다 대고 시끄러운 목소리로 ‘아무개 날은 길고 아무개 날은 아주 짧다. 아무개 코는 성글고 아무개 코는 너무 조밀하다’라고 외친다고 합시다. 이처럼 자기 스스로 손과 눈에 익숙해 있지 않으면 결국에는 맞지를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요. ‘빈말은 아무 쓸모가 없고 스스로 터득하는 것만이 가장 좋다.’” 이학규, 『낙하생집(洛下生集)』 ‘정의석에게 답하다(答鄭義錫)’

여기에 덧붙이자면 견문과 지식 역시 스스로 깨달아 터득한 것이 있어야 하지만 또한 반드시 직접 자신의 글을 써보아야 견문과 지식의 양(量)은 글쓰기의 원천과 에너지의 질(質)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 손과 눈에 익숙해지도록 짚신을 삼아야 비로소 딱 들어맞는 짚신을 삼을 수 있는 것처럼 붓을 쥔 손과 어떻게 글로 옮길 것인가 하는 마음속 생각에 익숙해지도록 글을 쓰고 또 써 보며 스스로 터득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견문을 넓히고 지식을 쌓는다고 해도 글쓰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홍길주는 “글은 견문과 지식의 양이 아니라 글을 쓰는 각자의 역량에 따를 뿐이다”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홍길주가 말한 각자의 역량이란 무엇일까?

“나는 글을 지을 때 거칠더라도 글에 대한 전체 구상은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문장에 대한 지식과 견문이 넓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안타깝게도 예전에 배운 것 또한 많이 잊어버렸다. 그래서 생각을 엮어 글을 짓고자 할 때 언제나 구상만 앞설 뿐 글의 재료나 도구가 뒤를 받쳐주지 못해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일찍이 이런 문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그대처럼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이 항상 그런 일로 고민한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했다.

그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각자 자신의 역량에 따를 뿐이다. 가난한 사람과 구걸하는 아녀자의 바람은 한 숟가락의 밥과 한 그릇의 죽일 뿐이다. 그들이 얻지 못할까 노심초사하는 것은 그 정도다. 그러나 일단 굶주림과 추위에서 벗어나게 되면 부귀영화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며 차츰차츰 커지게 된다.

진시황은 궁궐을 지을 때 아방궁 하나만 짓고서 이미 힘이 다해버리고 말았다. 담을 쌓고 건물을 단장하는 장인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온 힘을 쏟을 때만 해도 수많은 아방궁이 별처럼 늘어서 장관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침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재물과 힘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은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모하는 일이 더욱 더 크지만 마음속 깊이 만족을 느낄 만한 날은 끝내 오지 않는다. 글이라고 다르겠는가? 나보다 훨씬 넓은 지식을 갖춘 사람은 반드시 구상의 영역 또한 폭넓을 것이다.

그러나 명성을 떨친 문장가인 이백, 두보, 한유, 소식 역시 문장이 구상의 범위를 모두 채우지는 못했다. 어떤 사람은 두루 책을 읽었지만 글에 대한 구상이 모자라 글로써 일가를 이루지 못했다. 이것은 타고난 재주에 따라 각자 능숙한 분야가 있기 때문이다.” 홍길주, 『수여난필속(睡餘瀾筆續)』

필자가 생각하건대 홍길주가 여기에서 ‘타고난 재주’라고 표현한 각자의 역량이란 바로 ‘직관’과 ‘사색’의 능력과 자질을 말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직관의 글쓰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과 대상을 대할 때 이성적 사유나 논리적 추론에 의존하지 않고-직접적으로-자신이 감각을 통해 느끼는 그대로 혹은 마음속에 떠오르거나 깨달은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이덕무가 지적한 ‘글에는 감정(感情)이 있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이덕무는 “글에는 감정이 있는가?”라고 자문한 다음 “당나라 현종이 사랑하는 양귀비와 사별한 후 지은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물이 푸르고 산이 푸르다’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이별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과는 더불어 글의 감정을 논할 수 없는 법이라고 밝혔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의 슬픔은 이성적 사유나 논리적 추론으로 설명할 수 없고 또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단지 자신이 느끼는 마음속의 슬픈 감정 그대로가 밖으로 드러나 말과 글로 옮겨질 뿐이다. 만약 그 글을 읽는 사람이 단 한 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슬픔을 겪었다면, 그것을 읽는 순간 또한 이성적 사유나 논리적 추론 없이 슬픈 감정에 빠져들고 다시 그 슬픔의 표현에 공감(共感)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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