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
“말을 했으니 천기 깨뜨린 사어(死語)요, 말하지 않았으니 천기 보존한 활어(活語)다”[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⑭…자득(自得)의 미학⑤
한정주 기자  |  jjoo@iheadlinenew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3.21  08:44:54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블로그 구글 msn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⑭…자득(自得)의 미학⑤

[한정주=역사평론가] 추사 김정희 또한 “문장의 묘미는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감정과 기운을 드러내어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음을 글로 짓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또한 직관과 글쓰기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더욱이 어우당 유몽인은 문자를 알지 못하고 경전의 글을 한 구절도 읽지 않았는데도 돈오(頓悟: 갑자기 어느 한 순간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로 몸과 마음을 닦아 도를 깨우친 스님의 사례를 들면서 유학의 경전(經典)에서 이치를 찾을 뿐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치를 구하지 않는 이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면서 “문장 또한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유몽인의 글은 ‘직관의 힘’이 글쓰기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쳐준다. 심지어 유몽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 생각에는 주공(周公) 같은 감정과 공자(孔子) 같은 생각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니 자신을 돌아보아 구한다면 스스로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유학의 경전을 공부하지 않아도, 주공과 공자를 배우지 않아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직관의 힘’을 통해 문자도 모르고 불교 경전의 한 구절도 익히지 않았지만 한 순간 깨달음을 얻었던 스님과 같이 자득(自得)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금강산에 있으면서 산 속의 작은 암자에서 기이한 스님을 많이 보았다. 이들은 오곡을 물리치고 송백(松柏)을 먹으면서 수행한 지가 수십 년에 이르렀으며 돈오(頓悟)로 몸을 닦아 도를 깨우쳤다고 일컬어졌다.

내가 그 실상을 확인해보니 대개는 문자를 알지 못하고 경전의 글을 한 구절도 읽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마음이 널리 트였기에 나는 매우 놀라서 말하였다. ‘이들은 성불한 자로다. 만약 사대부로 태어났다면 반드시 대관을 지냈을 것이다.’

혹자가 묻기를 ‘무슨 말입니까?’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였다. ‘예전에 이 산에 세 중이 있었는데 각자 커다란 보자기에 옷과 식량을 싸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들은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 세 사람이 수수께끼를 내어 잘 만드는 자는 자신의 짐보따리를 벗어 못 만드는 자에게 짊어지게 하자’라고 하여 모두들 좋다고 하였다.

한 중이 짐보따리를 풀어놓고 논두렁 위에 앉아 말하였다. ‘밤이다. 나는 잠이나 자야겠다.’ 무슨 말이냐고 하자 ‘우리말에 논배미가 밤(夜)과 음이 같지 않느냐?’라고 하여 맞는 말이라고 하고 두 중이 짐보따리를 둘로 나누어 짊어지고 갔다.

어떤 곳에 이르자 한 중이 가시덤불 속에 들어가 말했다. ‘집사람이 보고 싶어 못 가겠다.’ 무슨 말이냐고 하자 ‘우리말에 가시나무를 각시라고 하지 않느냐?’라고 하여 맞는 말이라 하고 한 중이 세 보따리를 짊어지고 가면서 말하였다.

‘등에 두 칸 집을 짊어졌으니 어찌 힘들지 않으랴?’ 무슨 말이냐고 묻자, 그 중은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고 두 중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이에 한 중이 세 보따리를 모두 짊어지고 가는데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느라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도중에 한 노승을 만났는데 헤어져 너덜너덜한 장삼을 입고 있었다.

그가 묻기를 ‘세 중이 함께 길을 가면서 두 사람은 편안히 들판에 누워있고 자네만 혼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하여 중이 이제껏 있었던 일을 알려주니 노승은 합장하여 절을 하고 말했다.

‘그대 홀로 성불을 하였구려. 대저 우리말에 들보(玉梁)와 보자기는 음이 같지 않은가? 두 중은 말을 하였으니 천기를 깨뜨린 사어(死語)요, 그대는 말을 하지 않았는 바 천기를 보존한 활어(活語)다. 그대 홀로 성불하였도다.’

나는 또 들었는데 전에 이 산중에 나무(南無)대사란 자가 있어 삼 년 간 말없이 면벽수행을 하였다 한다. 그러던 중 하루는 껄껄 웃음을 터트리기에 여러 제자들이 장삼과 가사를 늘어뜨리고 이마에 손을 얹어 절을 하고 물었다.

‘대사께서 삼 년 동안 면벽하며 한마디 말도 없으시더니 오늘에야 껄껄 웃음을 터트리셨습니다. 필시 대도를 돈오함이 있을 터이니 큰 깨달음으로 가는 방도를 묻고자 합니다.’

대사는 소리를 질러 대답하였다. ‘썩어빠진 놈들!’ 여러 제자들이 말하길 ‘이는 음란한 욕지거리다. 삼 년 간 면벽하고 깨달아 얻은 것이 겨우 한마디 욕지거리인가?’라고 하며 혹은 비웃으며 떠나고 혹은 욕을 해대며 떠났다.

아! 펼치어 드러내지 않음은 활어이고 드러내어 마음에 담아두지 않음은 사어인 것이다. 무릇 대도란 마음으로 깨우치지 않으면 말로 전할 수가 없기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할 수 없고 스승이 제자에게 전할 수 없다. 삼 년 간 면벽하다 하루아침에 돈오하였으니 그 공부가 깊은 것이다. 저 뭇제자들은 모두 옅은 배움으로 마음에 깨달음이 없이 대도를 듣고자 하였으니 썩어빠진 무리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대사가 농담으로 희롱한 것이다.

장자(莊子)가 ‘도는 오줌과 똥에 있다’고 한 것과 같으니, 이는 진실로 도를 깨우쳐 성불하는 방편이 된다. 유가와 불가가 어찌 도를 달리하겠는가? 방훈(放勛)이 말하길 ‘넉넉히 부드럽게 대하여 자득하도록 한다’고 하였고, 맹자가 말하길 ‘돌아가 구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스승으로 삼기에 충분한 말이다.

오늘날 배우는 자들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치를 구하지 않고 장구(章句)의 말단에서 구하고자 하니 대도에서 벗어남이 심하지 않은가! 『중용(中庸)』 한 권을 읽고서 중도를 잡은 성인이 된다면 어느 누가 자사(子思)가 되지 않을 것이며 『대학(大學)』 한 편을 읽고서 다스림의 이치를 얻는다면 어느 누가 증참(曾參)이 되지 않겠는가?

성인의 말은 간략하고 현인의 설은 상세한데 상세함이 전주(箋註)에 잘못 빠지면 학문의 말단이 되고 간략함이 선적(禪寂)으로 흐르면 이치에서 벗어나게 된다. 어찌해서 지금 시대의 학문이 활어를 버리고 사어를 구하는가!

문장 또한 마찬가지다. 한유는 진부한 말을 힘써 제거하였고 유종원은 지나친 함축을 지닌 말이 없도록 하였으니, 이에 사활(死活)이 분변되고 고하(高下)가 나누어졌다. 근세에 이몽양과 왕세정이 당송(唐宋)을 우습게 여기고 서한(西漢) 시대의 껍데기를 표절하기에 힘쓰니, 그 사람과 문장이 또한 이미 썩은 것이다.

내 생각에는 주공(周公) 같은 감정과 공자 같은 생각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니 자신을 돌아보아 구한다면 스스로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나의 문자가 들보나 마룻대 같고 산과 강같이 넓어 마음으로부터 취함에 넉넉히 여유가 있을진대 어찌 괴롭게 고인의 말을 답습하면서 학문과 문장을 하겠는가?

수수께끼처럼 속뜻이 있는 말도 아니면서 품은 뜻이 있다 하고 마음을 울릴 말도 아니면서 억지로 울고 있으면서 어찌 도를 깨칠 수 있겠는가?

지금 그대는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마음이 툭 트였다. 그대의 도에는 선(禪)과 교(敎)가 있는데 진실로 선에 능하면 교는 배워서 무엇하리오? 그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아 마음을 살펴보면 여래의 밝은 빛이 그대 마음에 있을 알게 될 터다. 유가와 석가가 무슨 차이가 있으리오?” 유몽인, ‘건봉사 승려 신은(信誾)에게 주는 서문(贈乾鳳寺信誾序)’

따라서 ‘직관의 글쓰기 방법’은 다름 아니라-굳이 학문을 배우고 지식을 쌓지 않고도-자신이 직접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마음속에 떠오르거나 깨달은 것을 곧바로 글로 표현해 보는 것이라고 하겠다.

앞서 필자가 여러 차례 인용하고 소개했던 이익의 『관물편』이나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가 ‘직관의 글쓰기’의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사색의 글쓰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성적 사유와 추론에 의해 글을 논리적으로 구성해 써 내려가는 것이다. 쉽게 말해 ‘직관의 글쓰기’가 돈오(頓悟), 즉 문장을 배우고 지식을 익히지 않고 직접적으로 사물과 대상을 마주해 한 순간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면 ‘사색의 글쓰기’는 일정한 과정과 단계와 순서를 거쳐 배우고 익히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점수(漸修)에 가깝다고 이해하게 쉬울 것 같다.

따라서 ‘직관의 글쓰기’에서는 어떻게 깨달아 글을 썼는가는 잘 드러나지 않고 또한 중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사색의 글쓰기’에서는 어떻게 깨달아 글을 썼는가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또한 그것을 명징(明澄)하게 전달하기 위해 반드시 글 속에 ‘이치와 논리’를 갖추고 글쓰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구상(構想)과 구성(構成)’의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관련기사]

한정주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블로그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가장 많이 본 기사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중구 삼일대로4길 9 라이온스빌딩 10층 1003호  |  대표전화 02-720-1745  |  팩스 02-720-1746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한정곤  |  발행처:헤드라인미디어
등록번호:서울중, 라00692(등록일자 1998년 2월25일)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서울아03173(등록일자 2014년 5월29일)  |  발행일자:2013년 11월26일
Copyright © 2013 헤드라인미디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