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
“봉황새 내려앉은 어머니산이 품은 활터”…고흥 봉황정[활터 가는 길]① 현존 최고(最古) ‘610년의 역사’
한정곤 기자  |  jkhan@iheadlinenew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3.28  12:07:02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블로그 구글 msn

[활터 가는 길]① 현존 최고(最古) ‘610년의 역사’

남쪽으로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편안하다. 다른 어떤 방향보다도 여유로움이 함께 한다. 어쩌면 지구의 북반구에 살고 있는 이들이 동경하고 있는 따뜻한 곳에 대한 집착인지도 모른다. 많은 시인과 작가들 역시 남쪽을 그리움의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설사 집착이라고 탓하더라도 허물은 아닐 듯하다.

바야흐로 계절은 3월, 북미 인디언들의 표현을 빌자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이다. 마음이 움직이면 몸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성급한 상춘객들도 서서히 신발끈을 묶고 봄기운을 찾아 떠날 준비를 한다.

고속도로 인근 산마다 혹독했던 지난 겨울을 살아남아 푸른 빛깔로 되살아나는 어린 들풀들이 앞다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차창 밖에서 밀려오는 바람도 날을 죽이고 부드럽게 피부에 와 닿는다. 꽃샘추위에 발걸음을 멈춘 서울의 봄기운과는 대조적이다. 북상하고 있는 봄볕의 따스함이 전해질 때까지 서울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겨울의 무게를 견뎌야 할 것이다.

길동무를 마다하지 않은 서울 황학정의 장동열 접장, 박성준 접장, 최문구 접장, 안한진 접장 역시 들뜬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함께 떠나오지 못한 황병춘 접장의 얼굴이 아련하다. 3주일 전쯤 봄나들이 기분에 들떠 선친 기제사까지 깜박하고 덜컥 동행을 약속했지만 그날 밤 귀가한 뒤 부랴부랴 미안한 마음을 전해왔다. 평소 떠받들며 벌벌 기던 ‘마눌장군님’에게 얼마나 혼났을지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괜스레 미안해진다.

   
▲ 여인의 젖가슴처럼 봉긋 솟은 봉황산의 산봉오리. <사진=한정곤 기자>

사실 서울에서 고흥까지의 여정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아 아무나 붙들고 불쑥 함께 가자는 말을 꺼낼 수 없다. 더구나 월요일 출근해야 하는 이들이 주말 내내 자동차 속에 갇혀 왕복 10시간 이상을 버텨야 한다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선뜻 가겠다고 나섰던 이들조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고흥의 위치를 확인하곤 ‘겁나게 먼 곳’이라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아마도 고흥으로 가는 길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가장 잘 표현한 이는 시인 한하운일 것이다. 1949년 ‘전라도길-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시를 읽다보면 나병에 걸린 몸을 끌고 고흥땅으로 향하는 시인의 삶과 고독에 읽는 이까지 몸서리가 쳐진다. 익히 알려졌듯 고흥엔 나병환자촌인 소록도가 있다. 소설가 이청준이 ‘당신들의 천국’이라 불렀던 그곳엔 1973년 한하운 시인의 시 ‘보리피리’를 새긴 시비(詩碑)가 지금도 누워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시인이 육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더운 여름날 발가락이 끊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길을 재촉했던 것에 비하면 자동차 안에 가만히 앉아 단잠까지 청할 수 있는 우리의 엄살은 호강에 초친 소리일 뿐이다.

   
▲ 봉황정 전경. 사대 오른쪽 3관은 경사 급한 언덕이 길게 조성돼 안정감을 주지만 왼쪽 1관 옆으로는 바로 밑에 민가가 조성돼 빗나간 살을 보전하기가 힘들다. <드론촬영=안한진>

경부고속도로를 출발해 논산천안고속도로를 거쳐 다시 익산포항고속도로와 순천완주고속도를 지나 남해고속도로까지 5개의 고속도로를 경유해서야 다다른 벌교에서 비로소 고흥IC를 만났다. 서울을 출발한 지 꼭 4시간30분여 만이다. 그래도 아직 더 가야 한다. 동쪽으로는 여자만, 서쪽으로는 득량만을 끼고 뻗은 국도 15호선을 따라 30여분을 더 달렸을까. 어둠속에서 여인의 젖가슴처럼 봉긋 솟은 산봉오리 하나가 어슴푸레 실루엣을 드러냈다. 목적지인 봉황산이다.

◇ 민가 지붕 위를 날아가는 위협적 지형
고흥을 대표하는 활터 봉황정(鳳凰亭)은 봉황산 북쪽 아래에 누워있다. 동쪽에서 남쪽 40도 방향에 서 있는 과녁을 향해 배치된 사대는 약 2미터 정도의 앙사(仰射)가 특징이다. 오전 9시 이전까지는 1관 왼쪽 하늘에 떠 있는 해가 사대로 직사광선을 내뿜어 궁사의 눈을 부시게 한다.

   
▲ 동쪽에서 남쪽 40도 방향에 서 있는 과녁. 약 2미터 정도의 앙사(仰射)가 특징이다. <드론촬영=안한진>

특히 봉황정은 신사(新射)들에겐 다소 위협적인 활터 지형이다. 사대 오른쪽 3관은 경사 급한 언덕이 길게 조성돼 안정감을 주지만 왼쪽 1관 옆으로는 바로 밑에 민가가 조성돼 빗나간 살을 보전하기가 힘들다. 실제 사대에서 바라본 1관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지 못하고 무겁과의 사이에 민가를 두고 확연하게 휘돌아간다. 골프장에서 ‘왼쪽 도그레그 홀(Left Dogleg Hole)’이라 부르는 설계를 연상케 한다.

민가 지붕 위로 날아가는 살은 필연코 민원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더러 민가에 떨어진 살을 주워들고 활터를 찾아와 유리창을 깼느니, 외벽에 맞는 소리에 사람들이 놀랐다느니, 마당으로 떨어지는 화살 때문에 방 문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느니 하는 민원들이 도심 활터에서는 이미 흔한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봉황정 김재윤 사두는 “이들이 민원을 제기할 명분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민가가 조성되기 이전부터 활터가 있었고 더구나 그곳은 원래 군유지로 무단점령한 이들이 들어와 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민가에서 제기한 민원은 아직까지 접수된 바 없다고 봉황정 사원들은 말한다.

그래도 안한진 접장은 1관 습사를 기피하며 “이런 곳에서 어떻게 활을 내느냐”고 잔뜩 웅크린다. 그런 그도 막상 사대에 오른 뒤에는 관중시킨다. 눈은 두려움을 부르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낼 땐 강한 자신감으로 변한다는 진리를 보여준 셈이다.

봉황정 사정(射亭)은 2층 콘크리트 슬래브 건물로 2층 건물은 1층 옥상에 마름모꼴 기와지붕을 올렸다. 1층은 사대, 휴게실, 사무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2층은 궁방으로 각궁 점화장 등이 놓여있다. 사정 뒤편으로는 식당 등으로 사용되는 2층 부속건물이 한 동 더 들어서 있다.

   
▲ 봉황정 전경. 신사(新射)들에겐 다소 위협적인 활터 지형이다. <드론촬영=안한진>

◇ 무과시험장으로 개정해 사형장으로 폐정
사정 내부에 들어서자 겉모습과는 달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편액들이 세월의 더깨를 뒤집어쓴 채 각종 대회 우승 상장들과 함께 봉황정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편액은 단연 봉황정 연혁을 기록한 중앙의 대형 편액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1408年 科擧試 武科制 實施 其後 武科制 廢地로 一般 閑良의 心身鍛鍊 武道場으로 變形됨
一. 1909년 고흥읍 鳳溪里 河川邊에 弓術鍊磨場을 설치하여 觀豊亭이라 稱하였으나 東學革命軍과 韓日合倂 당시 抗日義兵들의 死刑場으로 사용되어 廢亭되었음.
一. 1915년 曹溪山麓 널난골 고흥읍 봉계리로 一時 移轉.
一. 1920년 고흥읍 東鳳里 사자골 부근으로 移轉.
一. 1923년 申澈休 초대 射頭의 私財 喜捨로 鳳凰山下 고흥읍 남계리 633의 20번지에 射亭을 신축건립하고 鳳凰亭이라 稱함.
一. 1970년 申址雨 射頭 在任時 고흥읍 남계리 641의 9번지 현위치에 移轉重修하여 현재에 至함.

   
▲ 1408년 창건을 기록하고 있는 봉황정 연혁. <사진=한정곤 기자>

우선 봉황정의 역사가 140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 놀랍다. 조선왕조 세 번째 국왕 태종 즉위 8년이 되는 해이며 태조 이성계가 73세를 일기로 사망한 해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까지 왜적의 침입이 빈번했던 남해안 일대를 수비하던 무인들의 등용문인 무과시험을 치르기 위해 창건돼 평상시에는 군사훈련장으로도 활용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무과가 폐지되면서 일반인들의 심신연마 도장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처럼 610년에 달하는 봉황정 역사를 뒷받침할 문헌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아쉽다. 관련 문헌이 확보된다면 현존하는 활터 가운데 가장 오래된 활터가 된다. 물론 사원(射員)들은 외부의 인정여부를 떠나 봉황정이 국내 최고(最古) 활터라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김재윤 사두는 1408년 창건 근거를 묻는 질문에 “비록 문헌은 남아있지 않다 하더라도 연혁 수정이 반복되면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편액이 바로 근거”이라면서 “자료가 존재할 때 편액이 제작됐고 수백 년에 걸쳐 선배 사원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증언 외에 더 이상 무슨 근거가 필요하냐”고 반문한다.

   
▲ 사정 내부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편액들이 세월의 더깨를 뒤집어쓴 채 걸려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봉황정은 1909년 한일합방 이전에는 관풍정(觀豊亭)이라는 명칭으로 고흥읍 봉계리 하천변에 궁술연마장으로 설치됐지만 동학혁명군과 한일 합병 당시 항일의병들의 사형장으로 사용돼 폐정된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이후 1915년 봉황산 남쪽의 조계산 아래 일명 ‘널난골’로 옮겨 일시 복정했지만 1920년에는 동봉리 사자골 부근으로 또 이전했다. 그리고 1923년 신철휴 초대사두가 사재를 털어 봉황산 아래 남계리 633-20번지, 동양농기계 자리 뒤편에 사정을 신축하고 봉황정이라 칭하면서 오늘날 봉황정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재 봉황정은 1970년 신지우 사두 재임 시절고흥읍 남계리 641-9번지로 옮겨와 중수한 사정이다.

연혁 외의 다른 10여개의 편액들은 봉황정 이전(移轉)을 기념해 작성한 기문(記文)으로 1924년 여름 신철휴 초대사두가 썼다는 ‘봉황정기(鳳凰亭記)’를 비롯해 비슷한 시기 정하순, 조종관, 김효찬, 이극중, 목인문, 박풍순, 김승식 등이 신철휴 사두의 한시문을 차운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 1924년 여름 신철휴 초대사두가 썼다는 ‘봉황정기(鳳凰亭記)’.

신철휴 초대사두는 당시 고흥군내 땅부자로 이영순, 류성, 김상천, 정석모, 이성규, 이영민 등 20여명과 함께 ‘남계회’라는 문인 동호회를 조직해 봉황정, 남휘루(覽輝樓), 관풍루(觀豊樓), 화수루(花樹樓), 향로재(고흥읍 서문리 신철휴 사두 집에 있던 누각) 등의 누정(樓亭)에 모여 시를 짓고 서예를 감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봉황정은 활터이자 이들이 모임을 갖던 사랑채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특히 신철휴 초대사두는 동학농민군들에 체포돼 처형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아들인 신약우의 간청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봉황정에는 100여명의 사원이 등록돼 있지만 월회비를 납부하며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사원은 60명 정도라고 한다. 지난해에는 4명의 신사가 집궁(執弓)했으며 매년 5명 안팎의 신사를 받아들이고 있다.

봉황정의 신사 교육은 독특했다. 활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이들에게 대부분의 활터는 사범이 곧바로 기초교육부터 시작하는 것과 달리 봉황정은 사범교육에 앞서 거장부라는 제도를 두고 있었다.

   
▲ 사대 뒤편 안쪽 벽에 걸린 각종 상장들. 1920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리가 모자랄 정도의 상장은 봉황정이 활쏘기 고수들의 집결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사진=한정곤 기자>

김창수 봉황정 부사두는 “구사(舊射) 중에서 거장부라는 멘토를 선발하고 신사의 맨투맨 개인지도를 담당한다”면서 “기초에서부터 득중례·몰기례를 거친 후 본격적인 사범교육을 시작한다”고 소개했다. 물론 거장부 지도과정에 사범도 수시로 개입한다.

현재 황학정 국궁교실 부사범과 연세대·이화여대 국궁부 사범인 장동열 접장은 “독특한 신사교육법”이라면서도 “현실적으로 사범이 활터에 상주할 수 없다는 단점을 보완한 효율적인 제도인 것 같다”고 말했다.

봉황정의 전국대회 성적은 이 같은 교육방식의 우수성을 뒷받침한다. 사대 뒤편 안쪽 벽에 걸린 각종 상장과 2층 궁방에 전시된 수많은 우승기·우승컵 등은 1920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전시돼 있어 활쏘기 고수들의 집결지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한다.

◇ 의친왕과 추사체 3대 제자의 현판
편액과 함께 봉황정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현판은 사정 앞뒤에 두 개가 걸려있다. 앞쪽 현판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의친왕으로 불리는 이강(李堈)의 글씨다. 그의 어머니는 귀인 장씨(貴人 張氏)이며 명성황후의 질투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강은 어머니를 일찍 여윈 채 암울한 유소년 시절을 거쳤고 성인이 되어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했다. 특히 그는 원교 이광사, 표암 강세황, 추사 김정희 등과 함께 조선 후기에서 근대기까지 우리나라 서예사에 족적을 남긴 명필의 한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현판에는 춘암(春菴)이라는 그의 호와 낙관이 선명하지만 언제 썼는지 시기는 적혀있지 않다. 그는 1877년(고종 14년) 태어나 1955년 사망했다.

   
▲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의친왕으로 불리는 이강(李堈)의 글씨를 새긴 현판(위쪽)과 추사체 3대 제자인 소완 김홍현(素阮 金泓炫)의 글씨를 새긴 현판. <사진=한정곤 기자>

사정 뒤편의 또 다른 현판은 소완 김홍현(素阮 金泓炫)의 글씨다. 그는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였던 순봉 하재호의 둘째 아들인 성파 하동주의 수제자로 추사체 필맥을 이어온 3대 제자로 평가받고 있다. 1904년 고흥읍 옥하리에서 출생해 고흥동초등학교(1916년), 경성제일고보(경기고), 일본 동경대(농대)를 졸업했다. 유년시절 12세 때 추사의 2대 제자인 성파 하동주가 진주지역의 민란을 피해 고흥읍에 체류했던 5년간 그의 주택 사랑채에 머물며 추사체 서법을 전수시켜 주었다. 그는 여생을 추사의 진품 보존을 위한 유묵정화 운동과 함께 위작퇴출을 위해 전국을 찾아다니며 헌신하다 1982년 4월17일 향년 79세로 생을 마쳤다. 봉황정 현판에는 경술 국추 소완(庚戌 菊秋 素阮)이라는 서명과 낙관을 남겼다. 그의 삶에서 경술년은 1910년(6세)과 1970년(66세) 두 차례로 현판 글씨를 썼던 시기는 1970년으로 추정된다.

◇ 이순신 장군 “불로장수 신선이 살았다는 영주” 극찬
봉황정을 품고 있는 봉황산은 고흥읍내 한가운데에 홀로 우뚝 솟아 서울로 치면 남산을 떠올리게 한다. 성인군자가 태어난다는 상서로운 봉황새가 보금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지는 봉황산은 고흥의 주산인 북쪽 주월산과 남쪽 조계산의 중간을 차지하고 있다.

고흥군 자료에 따르면 옛날 이 지방에 군자(君子)가 많이 나서 봉황새가 먼 강남에서 이 산으로 날아와 보금자리를 잡고 쉬면서 울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봉황산이라 부른다. 때문에 까마귀도 고흥읍을 날아갈 때는 봉황산의 근엄함에 지레 겁을 먹고 우회해 날아갔다고 한다. 해발 200여 미터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고흥군내에서는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울창한 소나무와 바위가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으며 일제 말기 송탄유를 만들기 위해 많은 홍송(紅松)을 베어 내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다.

   
▲ 봉황정을 품고 있는 봉황산은 고흥읍내 한가운데에 홀로 우뚝 솟아 서울로 치면 남산을 떠올리게 한다. <드론촬영=안한진>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 장군도 말을 타고 봉황산을 지나가면서 그 산세에 경탄한 시가 난중일기에 남아있다. 이순신 장군은 1580년(선조 13년) 충청병사해미군관(忠淸兵使海美軍官)에서 고흥군 도화면의 발포만호로 부임해 18개월 동안 재임했다. 이후 전라 좌수영에 부임해 고흥의 1관4진을 초도순시할 때 시를 남겼다.

말로만 듣던 영주(瀛州) 땅
불로장수 신선들이 산다는 영주
여기가 바로 그 흥양이구나
봉황산에는 꽃과 풀들이 너무 곱구나

여기에서 영주는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산으로 보하이만(渤海灣) 동쪽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일컫는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이곳에는 신선이 살고 있으며 불사약이 있다 해 시황제와 한무제가 이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지만 행방불명됐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또 흥양은 옛 고흥의 고을이름으로 1910년 이후 흥양에서 고흥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이순신 장군의 눈에 신선들이 산다는 영주산을 떠올리게 했다면 고흥사람들이 믿고 있는 봉황이 날아와 쉬고 가는 산이라는 전설도 그리 허황된 말만은 아닐 듯하다.

그러나 봉황정 무겁 바로 위쪽 봉황산 정상의 바위에 붙은 별칭은 낯이 뜨겁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산 정상 바위 아래에는 ‘어머니산’이라는 글씨가 뚜렷했다. 이곳 사람들이 이 바위를 가리켜 ‘○○바위’라고 불러 고흥고등학교에서 언어순화 차원에서 써놓았다고 한다. 높이가 30미터 이상 되는 바위의 중앙이 패이고 중간보다 조금 위에 마치 여자의 음핵마냥 바위가 박혀있기 때문이다.

   
▲ 봉황정 정상의 바위. 높이 30미터 이상 되는 바위의 중앙이 패이고 중간보다 조금 위에 마치 여자의 음핵마냥 바위가 박혀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특히 이곳에서부터 풀과 관목류가 자라 바위는 영락없는 여자의 성기다. 한마디로 봉황산은 풍수에서 이야기하는 여근곡인 셈이다. 특히 봉황산의 바위 여근곡은 사시사철 물이 찔금찔금 흘러내린다. 남편에게 소박맞은 여인이 이 물을 받아 마시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한 술 더해 이 고장 사람들은 바위를 마주보고 있는 신호리 처녀들의 가출이 잦은 이유도 바위에서 찾았다. 급기야 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여자고등학교를 세우려 할 때 지역에서는 처녀들을 바람둥이로 만들려 한다며 반대 여론이 거셌다고 한다. 그러나 봉황산은 어머니산이고 산밑에 양석을 세워 음기를 조화시키면 상관없다는 의견이 우세해 결국 여자고등학교가 들어섰다. 실제 바위 아래쪽 들에는 8m 가량의 남근석 바위가 세워져 있었다. 한쪽의 기운이 강하면 반드시 해가 따른다는 게 우리 조상들의 믿음이다. 남근석은 여근곡의 음기를 누르는 일종의 비보풍수에 해당한다.

이른 새벽 안한진 접장과 카메라와 드론을 들쳐 메고 봉황산 정상의 바위를 찾았다. 넓고 평평한 산책로를 옆에 두고 길을 잘못 들어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 숨이 콱 막힐 때쯤에야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골을 이루며 마주보고 있는 곳에 다다랐다. 일정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바라볼 때에야 제대로 된 여근곡의 모습이 드러날 텐데 몇 그루의 소나무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비록 소나무를 피해 가까이에서 본 바위였지만 바라보기에도 민망한 형상 그대로였다.

바위 위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최근 몇 일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는데도 새벽 운동을 나온 주민들은 한사코 바위에 오르는 것을 말렸다. 미끄러워 낙상한단다. 그래도 오르겠다고 고집을 피우자 할아버지 한 분이 돌아 오르는 길을 알려주었다. 위에서는 본 바위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여근곡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어쩌면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바위 아래 ‘어머니산’이라는 글씨도 벌써 오래전 지워졌단다. 기억을 더듬어 글씨가 새겨진 곳을 드론으로 뒤졌지만 흔적조차 없다. 특히 바위 아래 들녘에 세워져 있던 남근석의 위치를 확인하기도 쉽지 않았다. 들녘 자체가 아예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산을 오를 때보다 더 무거웠다.

◇ 봉황정의 위엄 더하는 남휘루
봉황정에서 활을 내다보면 사대와 무겁 중간 지점 오른쪽 언덕에 웅장하게 버티고 선 누각으로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 현재의 봉황정 사정 건물이 중수되기 이전의 사정으로 착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활터와는 전혀 무관한 누각인 남휘루(覽輝樓)다. 현재의 봉황정은 남휘루로 인해 더욱 고풍스러운 기품을 갖춘 활터가 된다.

   
▲ 봉황정 사대와 무겁 중간 지점 오른쪽 언덕에 웅장하게 버티고 선 남휘루. <사진=한정곤 기자>

호남기록문화유산에 따르면 1990년 12월 지방문화재자료 제183호로 지정된 남휘루의 본래 이름은 영아문(瀛衙門) 남휘루였다. 관아(官衙)의 문루(門樓)로 고흥아문(高興衙門) 앞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아문을 열고 닫을 때 북을 쳐서 알리는 누각을 일컫는 폐문루였다. 현종 8년(1667년)에 현감 안책(安策)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역시 정확한 고증자료는 찾을 수 없다. 1923년 일제 강점기 때 철폐돼 일시적으로 남계천변으로 옮겼다가 197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층과 2층 모두 4면이 개방돼 있으며 지붕은 겹치마 팔작지붕이고 지붕 네 귀에는 활주를 세웠다. 그러나 옛 흥양현(고흥의 옛 이름) 지도에는 2층이 아닌 단층으로 표기돼 있다.

   
▲ 남휘루 전경. <드론촬영=안한진>

남휘루에서 내려다본 봉황정은 그 어느 활터와는 다른 풍경을 보장한다. 효시가 아니더라도 사대에서 쏘아올린 화살이 슈~웅 소리를 내며 과녁을 향해 가는 모습이 한눈에 잡힌다. 2층 누각까지는 올라갈 수 없지만 1층 누각 앞에서도 봉황정의 전경은 물론 고흥시내 전체를 조망하기에 충분하다.

봉황정이 지금처럼 단장되지 않았던 시절 전국대회가 열리면 구름처럼 몰려든 관중들이 이곳 남휘루 아래에 진을 치고 걸터앉아 구경하고 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와는 달리 오늘날 활쏘기 대회에는 관중 한 명 찾지 않은 ‘그들만의 잔치’가 돼버린 현실이 안타깝다.

[관련기사]

한정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블로그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가장 많이 본 기사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중구 삼일대로4길 9 라이온스빌딩 10층 1003호  |  대표전화 02-720-1745  |  팩스 02-720-1746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한정곤  |  발행처:헤드라인미디어
등록번호:서울중, 라00692(등록일자 1998년 2월25일)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서울아03173(등록일자 2014년 5월29일)  |  발행일자:2013년 11월26일
Copyright © 2013 헤드라인미디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