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은 아무리 작아도 행하고, 악(惡)은 아무리 작아도 행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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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善)은 아무리 작아도 행하고, 악(惡)은 아무리 작아도 행하지 말라”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4.06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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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1강 계선편(繼善篇)…착하게 살아라②
▲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

[명심보감 인문학] 제1강 계선편(繼善篇)…착하게 살아라②

[한정주=역사평론가] 漢昭烈(한소열)이 將終(장종)에 勅後主曰(칙후주왈) 勿以善小而不爲(물이선소이불위)하고 勿以惡小而爲之(물이악소이위지)하라.
한나라의 소열황제가 장차 죽음을 맞이하자 후주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였다. “착한 일은 작다고 해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나쁜 일은 작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된다.”

‘한소열(漢昭烈)’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바로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입니다. 그런데 왜 유비를 ‘한소열’이라고 일컬었을까요?

유비는 한(漢)나라 제6대 황제인 효경제(孝景帝: 기원전 188~141년)의 황자(皇子)인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입니다. 한나라 황족이었던 까닭에 유비는 촉(蜀: 지금의 사천성) 지역을 영토적 기반으로 삼아 조조와 손권과 더불어 천하의 패권을 다툴 때에도 ‘한나라의 부흥과 황권 강화’를 정치적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의 헌제(獻帝)에게 양위받는 형식을 취해 황제에 즉위한 후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魏)나라를 세웠습니다. 조비는 아버지 조조 역시 무황제(武皇帝)로 추존했습니다.

이렇게 한나라가 조비의 손에 멸망당하자 유비는 ‘한나라 황실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자신도 황제에 오른 다음 국호를 ‘한(漢)’, 연호를 ‘장무(章武)’라고 하였습니다. 그 해가 221년입니다.

역사에서는 유비가 세운 한나라를 이전 시대의 전한(前漢)과 후한(後漢)과 구분하기 위하여 촉한(蜀漢) 또는 계한(季漢)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실제 정사(正史)에서는 유비가 한나라를 계승했다는 것은 허울뿐인 명분에 불과하고 헌제가 조비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긴 220년을 한나라가 멸망한 때로 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중국의 역사를 이은 공식 왕조는 위나라로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중국 시대사 구분에서도 후한이 멸망한 220년 이후부터 약 370년간을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라고 부릅니다.

어쨌든 황제에 즉위한 유비는 제갈량을 앞세워 위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중원을 점령하려고 여러 차례 북벌(北伐)을 시도하는 한편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오나라의 손권을 공격하는 등 다시 통일왕조 한나라를 부활시키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황제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인 223년 유비는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황제가 죽으면 그 공덕을 찬양하여 시호(諡號)를 추증하는데 유비의 시호가 바로 ‘소열황제(昭烈皇帝)’였습니다. 이 때문에 ‘한나라의 소열황제’라는 뜻으로 유비를 일컬어 ‘한소열’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유비는 ‘소열황제’라고 높여 부르면서 유비의 아들이자 촉한의 제2대 황제인 유선에 대해서는 시호에 따라 ‘효회황제孝懷皇帝’라고 하지 않고 후주(後主)라고 한 사실입니다.

실제 진수가 편찬한 『정사 삼국지』에서는 조조를 ‘무제(武帝)’, 조비를 ‘문제(文帝)’ 그리고 조조의 손자인 조예를 ‘명제(明帝)’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유비에 대해서는 ‘선주(先主)’ 그리고 유선에 대해서는 ‘후주(後主)’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조와 그 자손들에게만 ‘황제’의 지위를 인정했을 뿐 유비와 유선에 대해서는 황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은 셈입니다.

특히 유비와 유선에 대한 호칭 문제는 촉한을 한나라를 계승한 정통 왕조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위나라를 한나라를 대체하는 역사상 공식 왕조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오랜 세월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어왔습니다.

『명심보감』의 이 구절만 보아도 유비와 유선을 둘러싼 호칭상의 문제가 후대의 학자나 역사가들에게 얼마나 큰 혼란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유비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끝내 이루지 못한 대업(大業)이 자식인 유선의 손에서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기원했습니다. 이 때문에 유언장의 형식이 아니라 가장 준엄하면서도 최고의 권위를 지닌 국가의 공식 문서라고 할 수 있는 황제의 칙서(勅書)를 통해 자신의 뜻을 유선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칙서에 담은 유비의 유훈은 한 마디로 말해 인덕(仁德)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살피라는 ‘선치(善治)’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진수의 『정사 삼국지』〈촉서(蜀書)〉‘선주전(先主傳)’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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