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 피하듯 여색 피하고, 화살 피하듯 욕정 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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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피하듯 여색 피하고, 화살 피하듯 욕정 피하라”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6.07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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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5강 정기편(正己篇)…몸을 바르게 하라⑬

[명심보감 인문학] 제5강 정기편(正己篇)…몸을 바르게 하라⑬

[한정주=역사평론가] 夷堅志云(이견지운) 避色如避讐(피색여피수)하고 避風如避箭(피풍여피전)하며 莫喫空心茶(막끽공심다)하고 小食中夜飯(소식중야반)하라.

(『이견지』에서 말하였다. “여색을 피하는 것을 마치 원수를 피하는 것처럼 하고, 음란한 풍속을 피하는 것을 마치 화살을 피하는 것처럼 하며, 빈속에는 차를 마시지 말고, 한밤중에는 음식을 적게 먹어라.”)

『이견지』는 남송(南宋) 시대 학자로 한림학사(翰林學士)까지 지낸 홍매(洪邁: 1123~1202년)가 지은 설화집이다. 홍매가 송나라 초기부터 자신이 살았던 당시까지 민간의 괴상한 사건이나 기담(奇談)과 괴담(怪談)을 모아 엮은 일종의 지괴소설집(志怪小說集)이다.

특히 『이견지』는 분량과 규모 면에서 978년 송나라 태종(太宗)의 칙명에 의해 편찬된 설화집인 『태평광기(太平廣記)』와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태평광기』가 국가 차원의 역량이 광범위하게 동원된 반면 『이견지』는 홍매라는 한 학자의 손에 의해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중국문학사상 전무후무한 서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견지』라는 책의 제목은 앞서 소개한 적이 있는 도가 서적인 『열자』 중 ‘탕문(湯問)’편에 실려 있는 내용에서 취한 것이다.

즉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넓고 거대한 바다에는 곤(鯤)이라는 거대한 물고기와 붕(鵬)이라는 거대한 새가 살고 있는데 “우왕이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보았고〔大禹行而見之〕, 백익이 그것을 알고 나서 이름을 지었고〔伯益知而名之〕, 이견이 그것을 듣고 나서 기록을 하였다〔夷堅聞而志之〕”는 내용에서 ‘이견지(夷堅志)’라는 한자를 취해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홍매는 제목에서부터 자신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기 어려운 일이나 괴상하고 기이한 사건들을 모으고 엮어서 기괴소설집(奇怪小說集)을 지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애초 이 책은 총 420권이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혹은 흩어지고 혹은 잃어버리고 혹은 없어져서 지금은 약 절반 정도의 분량만 남아 있다.

여하튼 필자는 여기 『명심보감』의 엮은이가 옮겨놓은 “避色如避讐(피색여피수)하고 避風如避箭(피풍여피전)하라”는 『이견지』의 경구(警句)를 보는 순간 문득 『시경』 <용풍(鄘風)>에 실려 있는 ‘상서(相鼠: 저 쥐를 보라!)’라는 제목의 시가 떠올랐다. 그 시의 전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相鼠有皮 人而無儀 人而無儀 不死何爲
相鼠有齒 人而無止 人而無止 不死何俟
相鼠有體 人而無禮 人而無禮 胡不遄死

저 쥐도 가죽을 갖추었거늘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네.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으면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저 쥐도 치아를 갖추었거늘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네.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으면 어찌 죽음이 기다리지 않겠는가?

저 쥐도 모양새를 갖추었거늘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네.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으면 어찌 빨리 죽지 않겠는가?

이 시는 풍속이 음란하기로 악명을 떨쳤던 중국 고대 위(衛)나라 사회를 풍자한 것이다. 미물에 불과한 쥐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을 갖추고 있는데 사람이 예의도 모른 채 여색에 빠져서 음란한 짓이나 일삼는다면 결코 좋은 죽음을 맞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전한(前漢) 때 역사가인 유향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을 보면 이 ‘상서(相鼠)’의 시처럼 여색에 빠져서 음란한 짓을 하다가 죽음을 재촉하고 나라를 멸망으로 내몬 전국시대 말기 조(趙)나라 도양왕(悼襄王)과 그의 왕후 창후(倡后)의 고사가 기록돼 있다.

조나라 도양왕은 뛰어난 미색(美色)을 갖춘 창희(倡姬)라는 여인에게 매혹돼 자신의 후궁으로 삼으려고 했다. 당시 창희는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으로 이미 나라 안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충신 이목(李牧)이 도양왕의 결정에 극력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비록 외모는 아름답지만 음란하여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자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끝내 멸망의 위험에 빠졌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한 가문을 혼란스럽게 한 적이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그러한 사실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일찍이 이목은 조나라의 북쪽 변방을 지키던 장수로 크게 위세를 떨친 흉노족에 맞서 싸워 전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그는 특히 병사들을 잘 다루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목은 흉노족 10여만명을 죽이고 북쪽 변방의 여러 유목 민족을 제압했는데, 이 때문에 10여년 동안 흉노족은 조나라 국경을 넘어오지 못했다. 또한 이목은 대장군이 되어 조나라를 끊임없이 위협해온 초강대국 진(秦)나라 군대를 여러 차례 크게 쳐부수는 전공을 세웠다. 이로 말미암아 진나라는 이목이 살아있는 동안 조나라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어쨌든 조정 안팎의 신하와 백성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이목의 간언에도 도양왕은 “나라가 어지러워지거나 잘 다스려지는 것은 내가 어떻게 정치를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 한 여인이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라고 하면서 고집을 꺾지 않고 창희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도양왕은 원래 왕후에게서 낳은 아들 가(嘉)를 이미 다음 왕위를 이을 태자로 정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왕의 총애를 독차지한 창희가 아들 천(遷)을 낳으면서 조나라 왕실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온갖 이간질과 모함과 모략이 판을 치는 아수라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먼저 창희는 도양왕과 왕후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태자 가를 무고해 죄를 뒤집어 씌웠다. 창희의 미색에 홀려 음란한 짓을 일삼느라 사리판단이 흐려진 도양왕은 결국 태자 가를 폐하고 천을 태자로 삼았다. 게다가 왕후를 내쫓고 창희를 왕후의 자리에 올려 창후(倡后)로 삼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양왕은 죽고 창후의 아들 천이 왕위를 계승해 유민왕(幽閔王)이 되었다. 음탕한 성격에 행실이 문란했던 창후는 비밀리에 춘평군과 정을 통하는 것도 모자라 진(秦)나라로부터 엄청난 양의 뇌물을 받고 매수돼 조나라를 몰락의 길로 내몰았다.

특히 진나라가 가장 두려워한 명장 이목을 모함해 자신의 아들 유민왕으로 하여금 자객을 보내 주살(誅殺)하게 했다. 그 후 진나라는 군대를 몰아 불시에 조나라를 침략했다.

이미 진나라를 막을 힘을 잃어버린 조나라의 유민왕은 포로로 잡혀 끌려갔고 마침내 조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창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나라가 아직 멸망하기 전 대부(大夫)는 창후를 잡아 죽이고 그녀의 집안을 몰락시켰다. 그리고 폐위된 태자 가를 왕위에 올려 대왕(代王)으로 삼아 진나라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도양왕과 창후의 악행 이후 조나라 왕실에 충성을 바칠 신하와 백성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결국 전국시대 칠웅(七雄) 중 하나로 한때 강대국의 위세를 지녔던 조나라는 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한 다음 진나라의 일개 군(郡)으로 전락하고 만다.

『열녀전』의 저자 유향은 ‘도양왕과 창후의 고사’에 대해 이러한 논평을 남겼다.

“도양왕과 창후는 탐욕하고 잔인해 만족할 줄 몰랐다. 적자(嫡子)인 태자를 폐위할 목적으로 모략하고 내쫓았다. 더욱이 창후는 음탕해서 춘평군과 놀아났는데, 그 악행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진나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음란함과 악행으로 자기 한 몸 죽는 것으로도 모자라 한 나라를 멸망으로 내몰았다.”

그러면서 유향은 『시경』 ‘상서’ 가운데 “人而無禮(인이무례) 不死何爲(불사하위)”, 곧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으면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도양왕과 창후의 고사야말로 “이와 같은 일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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