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육신의 근심과 수고로움을 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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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육신의 근심과 수고로움을 잊을 수 있겠는가”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6.22 0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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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5강 정기편(正己篇)…몸을 바르게 하라㉑
▲ 묵자(墨子)의 초상.

[명심보감 인문학] 제5강 정기편(正己篇)…몸을 바르게 하라㉑

[한정주=역사평론가] 景行錄曰(경행록왈) 心可逸(심가일)하려면 形不可不勞(형불가불로)요 道可樂(도가락)하려면 身不可不憂(신불가불우)니라 形不勞(형불로)면 則怠惰易弊(즉태타이폐)하고 身不憂(신불우)면 則荒淫不定(즉황음부정)이라 故逸生於勞而常休(고일생어로이상휴)하고 樂生於憂而無厭(낙생어우이무염)하니라 逸樂者(일락자)는 憂勞(우로)를 豈可忘乎(기가망호)리오.

(『경행록』에서 말하였다. “마음이 편안하려면 몸이 수고롭지 않으면 안 되고, 도리가 즐거우려면 몸에 근심이 없으면 안 된다. 몸이 수고롭지 않으면 게으름의 폐단에 빠지기 쉽고, 몸에 근심이 없으면 음란한 마음에 빠져 안정을 이루기 어렵다. 이러한 까닭에 편안함은 수고로움에서 생겨나야 제대로 된 휴식이고, 즐거움은 근심에서 생겨나야 싫증이 나지 않는 법이다. 편안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육신의 근심과 수고로움을 잊을 수 있겠는가?”)

육신의 근심과 수고로움을 통해 깨우침을 얻어서 크게 명성을 떨친 사람으로는 묵자의 제자 금활리(禽滑釐)를 꼽을 수 있다. 묵자는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나 전국시대 초기에 활동한 사상가이다.

춘추전국시대 중 가장 극심한 혼란과 분열을 겪던 때 자신의 사상과 이론을 추종하는 제자들을 모아 묵가(墨家)라고 불리는 생활공동체이자 정치결사체에 가까운 집단을 결성해 활동했다.

맹자가 자신의 저서에서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전국시대에 묵가는 유가(儒家)를 능가할 만큼 큰 세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묵자를 따른 제자는 300여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묵가는 유가와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 특징은 묵가가 묵자의 이론과 사상을 전하는 학자들의 집단이면서 동시에 생활공동체이자 정치결사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묵가는 자신들의 학설과 주장을 실천하는 행동 조직의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묵가는 ‘거자(鉅子)’라고 불리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조직을 갖추어 생활했다. 그들은 ‘먹어도 함께 먹고 굶어도 함께 굶고,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는’ 공동체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거자’는 묵가의 이론과 사상을 전수하는 학파의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묵가의 사상과 신념을 실천하는 생활공동체이자 정치결사체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묵자는 묵가의 초대 거자였다. 그리고 묵자가 사망한 후 묵자의 뒤를 이어 거자가 된 제자가 바로 금활리였다.

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담고 있는 책인 『묵자(墨子)』를 보면 금활리(禽滑釐)가 묵자(墨子)의 제자가 된 후 어떻게 스승의 가르침과 뜻을 실천했는지에 관한 내용이 있다.

『묵자(墨子)』 <비제(備梯)> 편에 나오는 묵자와 금활리의 대화이다.

“금활리가 묵자를 섬겨 배운 지 3년이 되었다. 그는 손발에 못이 박히고 얼굴이 까맣게 타도록 온몸을 다해 스승을 섬겼다. 그러나 감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묵자는 금활리를 가엾게 여겨 술을 맑게 거르고 포육(脯肉)을 말려 태산(泰山)에 올라 띠풀을 뉘어 깔고 앉아 술을 권했다. 금활리가 두 번 절하면서 탄식하자 묵자는 ‘또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금활리가 두 번 절하고는 ‘나라를 지키는 방법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묵자가 금활리에게 말했다. ‘잠깐만 쉬자, 잠깐만 쉬자. 옛날 출중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안으로는 백성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 적은 숫자의 백성으로 많은 숫자의 백성을 업신여기고, 약한 나라로 강한 나라를 가볍게 여겼다. 이 때문에 그는 목숨을 잃었고 나라는 멸망당했다. 이에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너는 그것을 신중하게 생각해라. 나는 네가 더욱 자신을 혹사시킬까 두렵구나.’”

금활리는 묵자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은 3년 동안 온 힘을 바쳐 배우고 온몸을 던져 실천했다. 그래서 묵자는 그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술과 안주를 가지고 태산에 올랐는데, 그곳에서조차 금활리는 묵자에게 가르침을 구했던 것이다. 오죽 했으면 묵자가 ‘잠깐 동안이라도 쉬자’고 했을까?

이렇듯 금활리는 육신의 근심과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 뜻을 실천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금활리는 비록 묵자의 다른 제자들에 비해 뒤늦게 묵가에 입문했지만 훗날 묵자의 뒤를 이어 묵가를 이끄는 제2대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묵가의 후학들은 금활리를 가리켜 “인(仁)과 의(義)를 좋아하고 순박하며 신중하고 경계하며 법령을 두려워한다면 그 집안은 날로 번창하고 그 몸은 날로 편안하며 그 명성은 날로 영예로워진다. 또한 관직에 나가서도 도리와 이치에 맞게 일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런 의미에서 금활리야말로 육신의 근심과 수고로움으로 진정한 편안함과 즐거움을 찾았던 사람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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