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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 하얀 꽃내음에 취한 활터…전주 천양정[활터 가는 길]④ 소선계후(紹先啓後)…전통 활쏘기의 맥을 잇다
한정곤 기자  |  jkhan@iheadlin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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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13  1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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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④ 소선계후(紹先啓後)…전통 활쏘기의 맥을 잇다

전국을 오르내리던 장마전선은 천만다행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잠깐 한여름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태풍까지 동반한 장맛비의 기세가 자칫 일정에 차질이나 불러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게 기우에 그쳤다.

그렇다고 장마전선이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 제주도와 남해안 일대에서 더 강력한 전선을 불러 모으면서 금방이라도 북상할 듯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하기야 장맛비가 제때 제법 내려줘야 들판의 곡식도 여름 땡볕에 더욱 잘 여문 법이고, 태풍도 적당히 몰려와 바닷물을 뒤집어엎어야 불순물이 정화되는 게 자연의 이치 아닌가.

북미 크리크족과 아파치족 인디언들이 ‘열매가 빛을 저장하는 달’이라고 부르는 7월의 무더위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일종의 홍역쯤으로 받아들이는 게 마음 편하다. 아마 그때쯤이면 오히려 지금 장대처럼 내리꽂는 장맛비가 더 그리워지겠지.

   
▲ 다가교 위에서 본 전주천변의 다가공원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사흘 동안 500mm에 육박하는 장대비가 쏟아졌다는 전주천(全州川)도 제법 물살이 거세다. 찰랑찰랑 흐르는 물길을 따라 천변가 3km에 걸쳐 쭉 늘어선 버드나무가 가녀린 여인의 옷깃처럼 춤을 추는 듯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는 광경이 이채롭다.

1970년대 후반 썰렁했던 천변의 허허벌판을 조금이나마 채워보겠다고 식재한 수양버들이 40여년이 흐른 오늘날 울창한 군락으로 자라 이처럼 장관을 이루게 될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전주천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진 버드나무 행렬은 다가교(多佳橋)까지 길게 뻗었다.

이쯤에선 전주팔경의 하나인 ‘다가사후(多佳射帿)’, 즉 다가천변 물이랑을 끼고 백설같이 날리는 이팝나무 꽃 속에서 과녁을 겨누는 한량들의 풍경을 기대해 봄직하다. 봄철 푸르름이 돋기 시작하는 수양버들을 따라 5월의 이팝나무 꽃내음을 쫓다 보면 어느덧 하얀 꽃무더기가 감춘 활터가 나타난다는데 우매한 인간의 몸은 제철을 맞추지 못한다.

◇ 전주팔경의 하나인 ‘다가사후’의 절경
전주시를 남에서 북서 방향으로 휘감고 흐르는 전주천의 서쪽에 위치한 다가산은 산이라고 하기에는 지형도에 등고선조차 표기되지 않을 만큼 낮은 야산이다. 일찍이 수목이 울창하고 물에 비치는 바위의 절경이 유명해 전주시민의 휴양지 역할을 했다.

다가(多佳)는 ‘아름다운 사람 많아 미인은 얼굴이 옥과 같다네(多佳人美者顔如玉)’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가사후의 주인공격으로 한량들이 모이는 활터는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다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 다가공원 초입에 고즈넉하게 앉아있다. 바로 천양정(穿揚亭)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로 1830년(순조 30년) 건립됐으며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돼 있다.

천양정 사정(射亭) 건물과 처마를 맞대 한 몸처럼 보이는 사대(射臺) 건물은 맞배지붕에 측면 풍판을 가설해 고풍스런 전통 활터의 분위기를 더해준다. 외관상으로는 얼핏 조화를 이루는 듯 하지만 내부로 들어서 현대식 시설을 접하게 되면 잠깐 당황스럽다. 본래의 천양정 사정 건물 전체를 정면에서 조망하는 데에도 절대적인 방해꾼이다. 전국체전을 앞두고 지난 2003년 신축한 건물이라는 게 한병윤 천양정 사범의 말이다.

   
▲ 전주 천양정 입구. 측면 풍판을 가설한 맞배지붕의 사대건물이 고풍스럽다. <사진=한정곤 기자>

옛 사정 건물 앞에 별도의 사대를 조성한 활터는 비단 천양정만이 아니다. 설령 본래의 사정이 문화재로 등록돼 증개축이 불가능하더라도 대부분의 활터에서는 다양한 구조물을 설치해 사대로 활용하고 있다. 여름철 뙤약볕을 가리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으며 겨울철 한파에도 활을 내기 위해서다. 보존과 실용이라는 논리에 따른 갑론을박이 오가기도 하지만 실용을 앞세운 구조물 설치가 대세로 굳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대 왼쪽 관우당(觀優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콘크리트 건물은 천양정 사무실이다. 그리고 건너편, 즉 사대 오른쪽 3층 건물은 천양정 사장(射長) 사무실과 전라북도궁도협회 사무실 그리고 사원 사물함을 가득 채운 궁방이 있다. 2~3층은 상가로 임대를 놓은 수입원이다.

◇ “이성계 고사?”…양유기 백보천양에서 유래
천양정은 ‘화살로 버들잎을 꿰뚫는다’는 뜻으로 중국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 편과 『전국책(戰國策)』 <서주책(西周策)> 편에서 유래했다.

“楚有養由基者(초유양유기자) 善射者也(선사자야) 去柳葉百步而射之(거유엽백보이사지) 百發而百中之(백발이백중지) 左右觀者數千人(좌우관자수천인) 皆曰(개왈) 善射(선사) 有一夫(유일부) 立其傍曰(입기방왈) 善可敎射矣(선가교사의).”
(초나라에 활을 매우 잘 쏘는 양유기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백 보나 떨어진 곳에서 버드나무 잎을 쏘아도 백발백중이었으므로 이를 지켜본 수천 명이 활을 잘 쏜다고 했다. 이때 어떤 자가 양유기의 옆에 가서 ‘잘한다. 활을 가르쳐 줄만하다’고 했다.)

혹자는 천양정 입구 안내문에 적힌 글귀처럼 “신묘한 활 솜씨로 이름 높았던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설화나 전설 등의 관련 내용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여러 문헌과 자료를 뒤져도 이성계와 버들잎에 얽힌 이야기는 신덕왕후 강씨와의 설화가 전부였다. 이성계가 황해도 곡산으로 사냥을 나가 온 종일 짐승을 찾아 헤매다가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 급히 쫒았고 한참을 달리다 보니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처녀가 있어 물 한 모금을 청했더니 그 처녀는 물바가지에 버들잎 하나를 띄워 건넸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 전주 천양정 전경. <드론촬영=안한진>

이성계 고사설의 사실여부를 떠나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양유기 고사는 김구용의 『열국지』 <열국(列國)의 군웅(軍雄)> 편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이날, 두 나라 군사는 굳게 지키기만 하고 싸우지 않았다. 초나라 장수 반당은 진영(鎭營) 뒤에서 시험 삼아 활을 쐈다. 잇따라 화살 세 대를 다 과격에 맞췄다. 모든 초나라 장수들은 반당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때 마침 양유기(養由基)가 왔다. 모든 장수들이 서로 말한다.
“귀신같은 활 솜씨가 오는 구려.”
이 말을 듣고 반당이 화를 발끈 낸다.
“내 활 솜씨가 어찌 양유기만 못하리오!”
양유기가 웃고 대답한다.
“그대는 과녁만 잘 맞추니 족히 기이할 것이 없소. 나는 백 보 밖에서 버들잎을 쏘아 맞춘 일이 있소.”
모든 장수가 묻는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소?”
“지난날 언젠가 백 보 밖에서 버들 잎사귀 하나를 적장(敵將)의 얼굴이라 생각하고 한번 쏴봤지요. 그랬더니 화살이 그 잎사귀 한복판을 뚫고 나갔지요.”
모든 장수가 청한다.
“그럼 저기 버드나무가 있소. 한번 시험 삼아 다시 쏴보구려.”
“그거야 못할 것 없지요.”
모든 장수가 좋아한다.
“이제 양유기의 귀신같은 활 솜씨를 보겠구나!”
그들은 먹으로 버들 잎사귀 하나를 까맣게 칠했다. 양유기는 백 보 밖으로 물러서서 그 버들 잎사귀를 향해 활을 쐈다. 화살은 분명히 날아갔는데 떨어지는 걸 볼 수 없었다. 모든 장수는 달려가 보았다. 활촉은 바로 그 먹칠한 잎사귀의 한복판을 뚫고 버드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반당이 말한다.
“이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만일 화살 세 대로 버들 잎사귀 세 개를 차례로 다 맞춘다면 내 그대의 솜씨를 인정하겠소.”
양유기가 대답한다.
“글쎄올시다. 그렇게 쏘아 맞출 수 있을지요. 그러나 시험 삼아 한번 해 보겠소.”
반당은 높고 낮은 버들가지의 잎사귀 셋에다 먹칠을 하고 다시 각기 ‘1·2·3’이라고 숫자를 적었다. 양유기는 버드나무 앞에 가서 고저(高低)의 순서 없이 먹칠을 해놓고 번호까지 적어 놓은 잎사귀 셋을 봤다. 그러고서 백 걸음을 물러섰다. 양유기는 화살 세 대에다 1·2·3이라고 숫자를 썼다. 그리고 잇따라 화살 세 대를 쐈다. 모든 장수가 버드나무로 달려갔다. 첫 번째 버들잎이 첫 번째 화살로 뚫려 있었다. 그 다음 두 번째 세 번째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장수는 양유기 앞에 가서 두 손을 끼고 공경하는 뜻을 표했다.
“그대는 참으로 신인(神人)이시오.”

이 같은 양유기의 고사에서 탄생한 사자성어가 ‘백보천양(百步穿楊)’이다. ‘백 번 쏘아 백 번 모두 맞힌다’는 뜻의 사자성어 ‘백발백중(百發百中)’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전주 천양정 사대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 3개 사정 통합한 전주 유일 활터
전주 천양정의 기원은 1712년(숙종 38년)부터 시작된다. 올해로 306년째를 맞는다.

『전주 천양정사 사정기』(박병연, 1995년)에 따르면 이 고을 인사들이 강무를 위해 다가천 서쪽 기슭, 즉 다가교 서편에 4칸의 정자를 짓고 과녁을 북서쪽의 황학대 아래 도토실(지금의 신흥학교 운동장 서쪽 산 밑)에 세우고 천양정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9년 만에 다가천의 홍수로 정자가 유실됐고 이후 118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인 1830년(순조 30년)에야 다시 정자가 세워졌다.

천양정이 재건되기 이전, 즉 홍수에 유실된 지 2년 뒤인 1722년(경종 2년)에는 김삼민 등 무인 4명이 발기해 다가산 밑 김삼민의 땅에 천양정과는 별개의 정자를 건립하고 산이름을 따서 다가정(多佳亭)이라 불렀다.

유실된 천양정 인근에 다가정이 들어서고 다시 천양정이 재건립돼 한때 다가산에는 두 개의 활터가 존재했다. 이때 과녁이 북쪽인 다가정은 젊은이들이, 과녁이 남쪽인 천양정은 노인층이 주로 이용했다.

한병윤 천양정 사범은 “지금은 전주의 활터로 천양정이란 이름이 익숙하지만 예전엔 다가정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고 말한다. 100여년이 넘도록 천양정의 빈 시간을 다가정이 채우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특히 한 사범은 “다가정과 천양정은 별개의 활터가 아니라 하나의 공간에 두 개의 사정이 있는 하나의 활터였다”며 “오늘날 합병 천양정이 4사정이 아니라 3사정 합병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오늘날 천양정은 1918년 군자정(君子亭), 읍양정(揖讓亭), 다가정, 천양정이 합병된 활터다. 그 역사가 1950년 제작된 ‘삼사정 연혁기(三射亭 沿革記)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 삼사정 연혁기. <사진=한정곤 기자>

옛날 우리 단군 성조께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창업이념으로 궁도를 창설하시니 안으로는 스스로의 바른 마음을 갖게 하고 밖으로는 무예를 떨치게 하시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서는 무사의 도가 쇠퇴하고 여러 번 외침을 당하였다. 효종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무예를 부흥시켰다.

현종 3년 임인년 단기 3995년(1662년)에는 무술을 강구해야 한다는 의론이 다시 일어나게 되자 전주 인사들이 이에 호응하여 용머리 고개 아래에 사정을 세워 군자정이라 이름하였는데 단기 4119년(4117년이 옳음) 갑진년(1784년)에 화재를 입어 사정의 터를 용머리 고개의 동쪽산으로 정해놓고 다섯 해 만인 무신년(1788년)에 사정의 집을 지어 재건하였다.

단기 4245년(1912년) 전주군으로부터 지방비에 편입하자 매각한 대금 700원을 교육비로 쓰고 그 뒤 세 번이나 전전하다 바뀐 것이 오늘의 전주 기녕당이다.

다가정은 숙종 38년(1712년)에 전주 인사들이 서천황학대 아래 언덕에 무술을 연마하기 위하여 세워진 사정으로 천양정이라 이름했는데 9년 만에 홍수로 유실된 것을 2년이 지난 뒤 경종 2년 임인년 단기 4055년(1722년)에 다가산 아래에 있는 김삼민의 밭에 사정을 거듭 세워 다가정이라 이름했으니 산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오늘의 천양정은 단기 4163년(1830년)에 세웠으니 다가정의 부속건물이었다. 광무 10년(1906년) 다가정 구내에 양영학교를 설립한 바 다섯 해 만에 사설학교에 병합되어 폐지되었으므로 다시 사정으로 쓰게 되었다.

읍양정은 영조 42년 병술년 단기 4099년(1766년)에 전주 인사들이 서로 도모하여 곤지산 동쪽 아래에 사정을 세웠는데 광무 10년(1906년) 함육학교를 설립했으니 이것이 오늘의 사대부속국민학교다. 대개 세 사정의 사원들은 본정을 세습하여 왔으니 사정이 비록 폐지되었다 하더라도 궁도는 중단할 수 없는지라 단기 4245년(1912년) 사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세 곳 사정을 천양정 하나로 병합할 것을 결의하였다. <『전주천양정사 사정기』에서 인용>

   
▲ 다가공원 입구 야외 화장실 뒷편 바위에 새겨진 다가정 암석문. <사진=한정곤 기자>

여기에서 ‘천양정이 다가정의 부속건물이었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즉 이때까지만 해도 전주 사람들에게는 다가정이 먼저였고 더 많이 불러졌다는 한병윤 사범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도 합병 활터의 이름은 다가정이 아니라 천양정이었다. 천양정이 다가정의 부속건물이었다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100여년이나 늦게 창건된 천양정의 아우뻘이지 않은가.

당초 천양정 사정 건물은 현재보다 서쪽인 서원로 도로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다가교와 이어진 서원로가 4차선으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천양정 소유 토지가 편입돼 1988년 7월부터 1989년 11월까지 동쪽으로 약 12자 가량을 옮긴 것이다. 이때 높이도 3자 정도 올려 정로석도 현재와 같이 화강암으로 교체했다.

   
▲ 현재 위치로 옮기기 이전의 천양정 사정. 왼쪽 건물은 관우당이다. <사진=『전주천양정사 사정기』>

한병윤 사범은 “당시 사정 건물을 통째로 들어 올려 아래에 도르래를 넣고 밀어서 옮겼다”고 전했다. 어마어마했을 당시의 광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확장도로에는 관우당도 포함돼 결국 헐고 현재 사정 왼쪽의 콘크리트 건물로 재건축됐다.

또한 다가정사도 270여년이나 되어 주련(柱椽:서까래)이 부패되고 붕괴의 우려가 있어 헐고 새로이 지반을 3자 정도 높여 방향을 정반대편으로 돌려 3칸을 더 늘려 개축 복구했지만 오늘날까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 “선인을 잇고 후생을 계도한다”
현재 천양정에는 두 개의 현판과 20여개의 편액 그리고 16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사정 건물 정면 가운데 처마에 걸려 있는 천양정 현판을 비롯해 각종 편액과 주련 대부분은 효산(曉山) 이광렬(李光烈)의 글씨다. 그는 1946년 4월28일부터 1948년 4월14일까지 천양정 사장(射長)을 역임한 인물이다.

   
▲ 천양정 현판. 효산 이광렬의 글씨(위쪽)와 달리 ‘묵은(墨隱)’이라는 낙관이 찍힌 또 다른 현판(아래쪽)은 누구의 글씨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1885년(고종 22년) 전주부 향청동(지금의 교동)에서 전주이씨인 양도공(태조 이성계의 형 원계의 손자)의 14대손인 좌승지 우송(友松) 이동식(李東植)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사숙에서 한문과 경서를 공부하고 전주에서 최초로 설립된 전주공립소학교(현 전주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벽하 조주승으로부터 서예와 문인화를 사사했다.

이후 1927년과 1928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입선과 1930년 일본경도(京都)문예전 입선을 끝으로 일절 공보전에는 출품을 하지 않았고 1935년 호남지역 최초의 서예학원 한묵회(翰墨會)를 결성했다.

우리나라 근대기 10대 화가로 손꼽히는 묵로(墨鷺) 이용우(李用雨)와 세계적인 작가 고암(顧菴) 이응로(李應魯) 모두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 선생헌 출입문 위에 걸린 ‘소선계후’ 편액(위쪽)과 선생헌에 모셔진 역대 천양정 사장의 존영. <사진=한정곤 기자>

천양정 사정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방 선생헌(先生軒)의 출입문 위에 걸린 ‘소선계후(紹先啓後)’, 즉 ‘선인을 잇고 후생을 계도한다’는 뜻의 편액 역시 그의 작품이다. 선생헌은 역대 천양정 사장(射長)의 존영(尊影)과 사안(射案)을 보존하는 곳이다. 중건일인 매년 음력 5월14일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활터 창건일을 기념하고 선배들의 정신을 이어 후배들의 숭무정신을 열어주는 전통문화 계승행사인 대사회(大射會)다.

이날 제사 후에는 선생안(先生案)을 열고 지난 1년 동안 입사한 신사들을 재명록에 올린다. 다만 일반사원의 접근은 엄격히 금지된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 재명록에 올라가지 못하는 신사들도 있기 때문이다.

선생안은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관청에서 전임 관리를 부르는 말로 이들의 명단을 말한다. 성명, 직명, 생년월일, 본적 등이 기록돼 있다. 현재 천양정이 보관하고 있는 선생안은 천양정뿐만 아니라 합병된 군자정·읍양정 등 18세기 중반 전주 활터의 임원과 회원 명단이 포함돼 있다.

   
▲ 천양정 사정 중앙인 세 번째 칸 위에 모셔진 선생안. <사진=한정곤 기자>

천양정에는 효산의 현판 외에 또 다른 현판이 있다. 지금은 창고에 보관돼 있어 일반인들이 볼 수는 없지만 ‘묵은(墨隱)’이라는 낙관이 선명하다. 그러나 낙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이 현판이 효산의 현판보다 앞선 지 아니면 이후 누군가에 의해 다시 제작된 것인지의 여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천양정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 사대 왼쪽 콘크리트 건물에 걸려있는 현판 ‘관우당’에는 ‘이건호인(李建鎬印)’이라는 낙관이 새겨졌다. 그는 1918년 삼사정이 합병해 출범할 당시 천양정 사장을 역임한 인물로 전주에서는 상당한 토지를 소유한 재력가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의 이름은 일본인에 의해 근대 전주의 역사가 기록된 『전주부사(全州府史)』(1943년)와 군자정 폐정 후 양로당으로 사용됐던 기령당(耆寧堂) 사적비에서 찾을 수 있다.

『전주부사』에 따르면 이건호는 1914년 10월 전주 신사가 건립될 당시 다른 3명과 함께 다가산 부근 땅 1만8000여평을 기부했다. 그의 자발적으로 기부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시대 상황과 이후 그의 행적으로 볼 때 강제수용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 관우당 현판. 이건호 사장 당시 신축한 관우당에 그의 글씨를 현판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한정곤 기자>

『전주천양정사 사정기』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10년(한일합병) 경술에 일인(日人)들의 모의로 우리 천양정 소유인 다가산 밑 다가정사 건물과 토지를 압수하고 여기에다 목조로 도리이(鳥居)를 건립하고 요배소로 설치하였다가 그 후 신사로 다시 조영되었다. 그 당시 일인들이 신사부지로 기증하라는 위협에도 끝까지 불굴하니 마침내 강제수용으로 수탈당하였다.

그때의 전라북도장관 이두황이 관민유지 등과 명처에서 거둬들인 거출금 9000여원을 얻어 신사건립의 영역으로 우리 천양정 소유자산인 다가산 일대의 1만1800여평과 다가정사 대지 21평을 사무소로 사용한다고 강제로 수용당하였고 1914년 10월에 전주신사로 준공케 되었다.

이건호의 자발적 기부보다는 강제수용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가산에 신사가 건립되면서 천양정의 관문 역할을 하는 다가교는 ‘신사에 참배하러 가는 다리’라는 뜻의 ‘대궁교(大宮橋)’로 불리기도 했다. 다가교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8월 준공했으며 현재의 다리는 1981년 9월 확장준공한 것이다.

   
▲ 2014년 8월11일 전주문화원이 공개한 전주 신사(神社) 사진. 전주신사 중문(中門)과 구(舊) 다가산 신사에서 본 전경으로 1944년 전주신사 사무소가 발행했다. <전주문화원 제공>

또한 기령당 사적비에서는 “1921년 진사 이건호가 완산동의 가옥을 기증해 기령당이라 고쳐 부르고 그 후 박기순, 백인기, 박영철의 도움으로 진안 마령과 성수면에 논을 매입해 운영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기령당 사적비를 건립했다”고 적혀 있다.

관우당은 이건호가 사장 재직 당시 신축한 건물로 그의 글씨를 현판에 사용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1918년 5월29일 사장으로 추대 선임된 그는 취임 직후 천양정 서쪽 뜰 아래(현재 서원로별 3층 건물 자리)에 목조와즙(木造)瓦葺)으로 3칸을 신축해 사무실과 점화방 및 활시위를 얹는 장소로 사용하고 별채 3칸은 관리인의 주거로 사용했다.

일제가 신사 건설을 목적으로 강제수용한 천양정 소유의 다가산 아래 땅 1만여평과 다가사정은 광복 후인 1946년 소송을 통해 3년 만에 전주지방법원에서 승소해 완전히 회수했다.

   
▲ 사정 건물 내 선생헌 반대쪽에 전시된 각종 대회 우승기. <사진=한정곤 기자>

◇ 전통 활쏘기 문화의 계승 ‘전주대사습놀이’
현재 천양정에는 150여명의 사원이 등록돼 있다. 이 가운데 여무사는 5명으로 비교적 적은 편이다.

입사는 다른 사정보다 조금 까다롭다.

전주시궁도협회장인 김중수 천양정 이사장은 “우선 기존 사원 2인의 추천과 보증이 있어야 한다”며 “이후 이사회 협의를 통과해야만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기존 사원의 추천이 없는 일반인도 입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면접상담 등을 통해 엄격한 소양검증을 거쳐야 한다.

교육은 궁력 키우기에서부터 주살까지 약 3개월의 훈련을 거친 후 비로소 사대에 오를 수 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지난해에는 15명이 입사했다. 입사비는 50만원으로 서울 황학정(100만원)의 절반 수준이지만 지방 활터 중에서는 가장 많다. 월회비는 3만원이다.

   
▲ 사대와 관우당 사이 길에서 바라본 천양정 무겁. <사진=한정곤 기자>

천양정 사대에서 바라본 과녁은 1.23m 앙사(仰射)다. 바람 없는 오전과 달리 오후에는 사대방향으로 촉바람도 분다. 함께 동행했던 황학정 사원 7명은 한결같이 과녁의 절반 정도를 올려야 관중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황학정이 6m 앙사인 걸 감안하면 천양정에서는 평소 습사 때의 조준점보다 7m가 높은 것이다.

천양정에서는 1년에 두 차례의 전국대회가 개최된다. 음력 5월 초순경 ‘전주대사습놀이 전국 궁도대회’와 중순경 전주시장기 전국남녀궁도대회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숙종 때 마상궁술대회를 비롯해 영조 때에 이르러 전주에 대사습청을 설립하고 각 사정에서 주관케 한 연례행사였다. 순종 때부터는 대사습놀이 장원에게 의관(議官), 통정(通政), 감찰(監察), 오위장(五衛將), 참봉(參奉), 선달(先達) 등의 벼슬이 제수되기도 했다.

철종 때 일제의 우리 문화 말살정책으로 중단됐지만 1974년 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보존회가 사단법인 등록을 마친 이후부터 전국대회를 개최해 올해 44회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전주대사습놀이 전국궁도대회는 참가대상을 남자로 한정하고 장비 역시 각궁·죽시로 제한해 여자와 개량궁 참가가 불가능하다. 장원에게는 국방부장관상이 주어진다. 상금도 대부분의 전국대회가 100만~150만원을 장원 상금으로 내걸고 있는 것과 달리 400만원에 달한다. 때문에 호사가들은 ‘국궁계의 마스터즈대회’라 부르기도 한다.

마스터즈대회는 매년 4월 첫 주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개최되는,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메이저 골프대회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은 현재 300여명의 회원이 등록돼 있으며 회원가입은 천양정과 같이 엄격한 기준에 의해 클럽의 결정에 따른 초대로 이루어진다. 1933년 개장 이후 여성의 회원가입이 금지돼 있었지만 2014년 미국골프협회 이사 지명위원이 된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과 투자회사인 레인워터의 파트너인 여성 사업가 달라 무어를 회원으로 받아들여 ‘금녀의 벽’이 깨졌다.

활쏘기대회를 골프대회와 비교하는 것이 상식적이지는 않지만 그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판소리 경연대회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전주대사습놀이의 역사와 권위를 강조하는 방편으로 이해하면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 천양정 무겁과 과녁. <사진=한정곤 기자>

사라져 가는 전통 활쏘기 문화가 천양정에서 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주의 위상은 남다르다. 여기에 후백제의 수도로, 조선왕조 태조 선조의 고향으로 전주의 진면목을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전주에서 발견한 역사에 감동을 받아 김시습이 지었다는 한시(漢詩) 한 편으로 천양정과 전주를 가슴에 새긴다.

甄萱舊邑是全州 견훤의 옛 도읍, 이곳이 전주로구나
牢落風情萃一丘 활달한 느낌이 한 곳에 모여 있네
古壘夕陽荊樹短 옛 성루 석양에 가시나무 조금 자라고
新亭春雨麥香浮 새 정자 봄비에 보리 향기 떠오르네
掛弓平壤心何壯 평양에 활을 건다면서 마음 장쾌하더니
捐劍黃山意尙憂 황산에서 칼을 버린 뜻 아직 괴로워
麗濟相爭何足議 고려와 백제 싸움만 의논하고 말건가
龍飛當日大椿秋 용이 날아오른 그날의 역사 대단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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