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녀봉 아래 팽나무 그늘 드리운 활터…강경 덕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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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 아래 팽나무 그늘 드리운 활터…강경 덕유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18.07.27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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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⑤ 사정 보존·운영 위해 사원·비사원 함께 사계 조직
▲ 강경 덕유정 전경. <드론촬영=안한진>

[활터 가는 길]⑤ 사정 보존·운영 위해 사원·비사원 함께 사계 조직

조선시대 벼슬 좀 했다거나 글 꽤나 읽었다 싶은 이들의 이름(名) 앞에는 하나같이 호(號)라는 게 붙어있다. 그것은 문관(文官)이냐 무관(武官)이냐를 따지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부모로부터 지어진 이름과 달리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삶의 지향점에 따라 스스로 부여하거나 스승·친구들로부터 받은 또 다른 이름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 같은 호를 통해 사상과 정서를 밝히고 시대의 아픔과 현실개혁의 의지도 드러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 호는 자신들만의 정체성의 표현이었다.

고전·역사연구회 ‘뇌룡재’ 대표인 한정주 역사평론가는 저서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에서 “호는 자신의 뜻을 어디에 두고 마음이 어느 곳에 가 있는지를 나타내는 이른바 사회적 자아를 표상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한양이 내려다보이는 삼각산(북한산)에서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을 역성혁명을 꿈꾸었던 삼봉(三峰) 정도전을 비롯해 죽도(竹島) 정여립, 반계(磻溪) 유형원, 잠곡(潛谷) 김육 등은 지명을 호로 삼았다. 율곡(栗谷) 이이, 연암(燕巖) 박지원의 호 역시 지명에서 따왔다.

반면 퇴계(退溪) 이황과 초정(楚亭) 박제가 등은 마음에 품은 의지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과 단원(檀園) 김홍도 등은 기호나 취향을, 표암(豹菴) 강세황과 미수(眉叟) 허목은 자신의 생김새를 호로 사용했다.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는 정적들을 피해 끝까지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했던 조선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은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신중하고(與)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는 의미의 여유당(與猶堂)을 호로 삼아 미래 세대를 위한 저술에 매달렸다.

임금이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라 자처한 홍재(弘齋) 이산(정조대왕)과 누구보다도 큰 뜻을 품었던 산림처사 남명(南冥) 조식, 진정한 선비 정신을 발휘한 사옹(蓑翁) 김굉필과 정암(靜庵) 조광조, 만민이 평등하다고 주장했던 교산(蛟山) 허균 등의 호에서도 그들만의 야망이 드러난다.

▲ 뒷마당에서 본 덕유정. <사진=한정곤 기자>

이순신 장군의 호로 일반에게 알려져 있는 여해(汝諧)는 자(字)다. 자는 관례(冠禮: 성인식)를 치르고 짓는다. 『예기(禮記)』의 주석서(註釋書)에서는 “이름을 귀하게 여겨서 공경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이름(名)을 귀중하게 여기고 공경했기 때문에 관례를 치르고 나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字)를 지어 부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단 자를 지을 때는 반드시 이름과 연관지어 짓도록 했다.

명(名)과 자(字)가 태생적으로 타고난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즉 생물학적 자아(태생적 자아)에 가깝다면 호는 자신의 의지와 사상, 성격이 담긴 개성적인 삶의 지표였던 셈이다. 따라서 호를 보면 그의 사람됨과 함께 삶의 행적과 철학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호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거울이다.

조선시대와 달리 요즘 시대에 호는 사실상 사라진 문화가 되고 있다. 더러 호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일상에서 이름(名)이 아닌 호를 부르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 접장 호칭은 부사두?…사원간에는 호(號)로 불린다
활터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뜬금없이 호 타령을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활터에서는 초몰기를 한 사원에게 접장(接長)이라는 호칭이 부여된다. 그런데 충남 논산의 강경 덕유정(德游亭)에서는 이 접장이라는 호칭이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다른 활터에서의 부사두가 덕유정에서는 접장인 것이다.

가령 덕유정을 처음 방문한 궁사가 자신의 활터에서와 같이 덕유정 사원을 부르며 접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부사두를 지칭하는 말이 되고 만다.

비단 접장만이 아니다. 덕유정의 사두는 ‘사백(射伯)’이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다만 사두로 불리든, 사백으로 불리든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접장은 다르다. 다른 활터와 그 의미가 전혀 상이하기 때문이다.

▲ 덕유정 무겁. <드론촬영=안한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접장은 역사적으로 ‘보부상의 우두머리’를 뜻하고 종교적으로는 동학에서의 접주(接主), 즉 접(接)의 우두머리를 의미한다.

류근원 청주 우암정 사범은 『국궁논문집9』에 게재한 논문 <활터의 평등한 호칭, 접장>에서 “보부상의 경우 각 읍의 군수나 현감 등 지방관청의 장들이 상거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보부상단의 우두머리를 접장으로 임명했다”고 적고 있다.

반면 “동학에서는 모든 신분계층을 가리지 않고 서로의 호칭을 접장으로 통일해 부르게 하였다. 자신을 스스로 부를 적에는 하접(下接)이라 하였다”고 덧붙였다.

국립민속박물관이 발행한 『활터 조사보고서』 <덕유정> 편에서는 접장의 의미를 이렇게 적고 있다.

『예기(禮記)』 향음주의(鄕飮酒儀)에는 “존양하고 정결하고 공경하는 것은 군자가 서로 접촉하는 까닭이다(尊讓 敬也者 君子之所以相接也).”, “손이 되는 사람은 사람을 의로써 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북쪽에 앉으며 주인이 되는 사람은 사람을 인으로써 대하는 것이니 그것으로써 덕이 두터운 사람이다(賓者接人以義者也故坐於西玏主人者接人以仁以德厚者也).”라고 하여 ‘접(接)’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데 위와 같이 접(接)은 군자들이 서로 예의를 갖추고 만나는 것, 손님을 예의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접장은 사백을 보좌하여 덕유정과 관련한 대내외적인 교섭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덕유정의 운영과 지역사회’ 중에서>

이렇게 본다면 덕유정과 일반 활터에서 각기 다르게 부르는 접장이라는 호칭의 맞고 그름을 분간하기는 힘들어진다. 그러나 굳이 맞고 그름을 가려야 하는가. 꼭 가려야 한다면 그것은 호칭 연구자들의 몫이다.

정작 궁금한 것은 부사두를 접장이라 부르는 덕유정에서는 다른 활터에서 접장이라고 부르는 일반 사원들을 어떻게 부르냐는 것에 관심이 쏠린다. 설마 동년배들끼리 모인 활터가 아닌데 이름을 막 부를 리 없고 ‘김 아무개씨’ 하고 어정쩡한 호칭을 붙일 리도 만무하지 않은가.

▲ 덕유정의 부속누각인 관해루. <사진=한정곤 기자>

글머리를 호(號)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덕유정 사원들은 입사(入射)와 함께 호를 갖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사백이 입사 당시 사원 개개인들에게 호를 지어주지만 스스로 짓기도 한다. 그리고 이름 대신 서로 호를 부른다.

덕유정 사원들이 호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라는 증언이 있다.

온깍지궁사회 홈페이지 ‘강경 덕유정의 역사와 풍속’에서는 ”다른 정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씨를 붙여서 김무사, 이무사라고 부르거나 그냥 접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무호를 부르는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 생긴 풍속이라고 이준구 원로 사백이 고증한다. 그 전에는 활터에 올라온 사람들이 일정한 벼슬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벼슬에 해당하는 관직명을 불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에 그런 직함이 사라지면서 호칭에 대한 문제가 불거진 것이고, 그것을 무호로 해결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덕유정 『사계좌목(射稧座目)』을 보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덕유정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인 1828년 『사계좌목』에서부터 1905년 『사계좌목』까지는 이름과 함께 자가 표기돼 있다. 다만 여기서의 자는 호를 일컫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는 조선시대에도 엄격한 성리학 이념을 따랐던 가문을 중심으로 지어져 호처럼 일반화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1920년 『사계좌목 9곤』부터는 이름과 본관 그리고 임원에 피선된 이들의 직책 등만 기록돼 있다. 즉 상호간 호로 불리었던 문화가 1920년을 전후로 사라지고 다시 1970년대 들어 부활한 것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어쨌든 사원간 호칭을 호로 대신하고 있는 덕유정의 풍습은 여느 활터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고유한 문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관덕(觀德)을 지향하는 활쏘기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이름인 호를 통해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활터마다 다른 활터와는 차별화되는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활터 여행의 또 다른 재미다.

▲ 관해루기(위쪽)와 관해루 중수기 편액. <사진=한정곤 기자>

◇ 도로가 갈라놓은 사대와 무겁
짧은 장마 뒤의 무더위와 함께 찾은 덕유정은 강경읍 동흥리 마을 입구 평지에 남동쪽 방향으로 조성돼 있었다. 얼핏 활터라기보다는 과거 강경지역 세도가의 고택(古宅)으로 여겨질 만큼 정자와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됐다.

동행한 황학정의 박성준·라성택·최문구·황병춘·안한진·강민충 접장의 입이 떡 벌어진다. 특히 황병춘 접장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정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목재 한옥이다. 왼쪽에는 부속누각 관해루(觀海樓)가 버티고 있다. 관해루는 ‘바다를 본다’는 뜻으로 원래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옥녀봉 봉수대 자리에 있던 퇴락한 수운정(垂雲亭)을 제13대 이은국 사백이 1883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그리고 1960년 관해루를 중수했다.

관해루 안쪽에는 1948년 이은국 사백이 작성한 관해루기가 걸려있다.

덕유정은 강경의 사정이요, 관해루는 덕유정의 누각이다. 노소 사원들과 일반 내빈의 쉼터로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 번에 걸쳐 중수했다. 왜구의 침략 이래로 나라는 부서지고 임금은 죽었으니 가위 부서지는 둥지의 새알처럼 세상인심은 흩어져 어지럽고 선비의 기개는 그 기운을 잃어 빈번히도 흥미로운 일(활을 즐기는 여가)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이에 폐하지 않고 근근이 이어온 것이 벌써 삼십여 성상이라. 이런 까닭으로 정의 사정은 기와를 이어 붙이고 흔들리며 늘 물이 스며 흙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전후의 형편이 이러한 데도 전복될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니 이것만도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하늘의 별은 순환해 넘침이 없고 반드시 되돌아오는 것이 정해진 일이어서 나라는 다시 흥하고 자주독립을 이루었으니 이제야 하늘과 땅은 그 자리를 정하고 해와 달은 그 밝음을 되찾으며 만물은 다시 생육하게 되었도다. 오호라 창성하도다.

이에 관해루를 중수하니 지난날 폐한 것들을 다시 거두어 새로이 경영하매 밭을 저울질하는 정심으로 하여 이 역시 경세제민의 영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선현을 닮지 못함을 외로이 여기며 스스로 정성을 다해 정을 짓고 옛것을 계승하려 하노니 선현의 말씀과 빛나는 유지를 받들어 뒷날로 나아감에 발전을 도모할 것이라. 상량문은 이미 먼저 지은 것이 있고 환경 또한 수려해 장대하고 뛰어나며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해 가히 보기에 좋도다. 활(궁술)에 대하여는 선현들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가 적지 않으니 다시 기록함은 필요치 않음이라.

▲ 사대 위를 등나무로 장식했던 시절의 덕유정. <사진=덕유정 홈페이지>

널찍한 뒷마당에는 아름드리 팽나무 한 그루와 느티나무 두 그루가 키재기를 하고 있다. 그중 논산시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200년 이상의 팽나무 거목은 정자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우산 역할을 한다.

정자 앞 사대 위에는 원래 등나무가 있었지만 10여 년 전 도민체전을 앞두고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모했다.

지난해까지 덕유정 부사두였다는 나병국 전 접장은 “등나무는 꽃이 피는 5월부터 여름철까지는 멋진 풍광과 향기로 운치가 있지만 떨어지는 꽃과 잎사귀 때문에 바닥이 지저분해져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불편하다는 목소리가 나와 철거했다”고 말한다.

특이한 점은 사대 앞 30여m 지점에 담을 쌓아 사대와 무겁이 완전 분리된 두 개의 공간이다. 사대가 있는 정자가 더더욱 단독주택과 같은 느낌을 준다. 담 뒤는 동흥리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가 나 있다. 사대와 무겁 사이를 도로가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나병국 전 접장은 “마을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도보 통행이 가능한 길을 내주고 지금은 자동차까지 다닐 수 있도록 개설을 허용한 도로”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로를 이용하는 주민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활터 이전을 요구하는 민원까지 제기하는 민심에 나병국 전 접장은 쓴웃음을 짓는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내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다.

그런데 왠지 불안하다. 이 같은 민원이 하나씩 둘씩 쌓이다보면 덕유정의 부지 소유권을 떠나 활터로서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닐까

▲ 하늘에서 본 덕유정 전경. 사대와 무겁를 갈라놓은 도로가 선명하다. <드론촬영=안한진>

앞뒤 문을 활짝 열어놓은 덕유정 정자에는 수많은 현판과 편액, 주련 등이 걸려 있다. 그러나 누구의 글씨인지는 하나하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논산문화원이 2008년 발행한 『논산 지역의 현판』(정경일)에서도 향교, 서원, 사찰, 사우, 기타 문화재 등이 망라돼 있지만 덕유정은 쏙 빠졌다.

먼저 현판에는 “癸酉季夏下浣 松嵓書(계유계하하완 송암서)라는 글씨가 씌어져 있다. 계유년 늦여름(음력 8월) 하순에 송암이 썼다는 뜻이다.

덕유정 창건 이후 계유년은 1873년, 1933년, 1993년 세 번이었다. 이 시기 송암(松嵓)이라는 호를 가진 인물은 독립운동가로 교육가인 고(故) 서병호(徐丙浩) 새문안교회 장로다. 만약 그가 현판 글씨의 주인공이라면 1933년에 썼을 것이다. 그러나 서병호의 행적에서 논산 일대를 다녀간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덕유정의 편액 일부가 그보다 앞선 1926년 씌여져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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