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줌 세례’ 범저의 반전 인생…엇갈린 수고와 위제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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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 세례’ 범저의 반전 인생…엇갈린 수고와 위제의 운명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8.22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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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8강 계성편(戒性篇)…성품을 경계하라⑨
▲ 범저.

[명심보감 인문학] 제8강 계성편(戒性篇)…성품을 경계하라⑨

[한정주=역사평론가] 凡事(범사)에 留人情(유인정)이면 後來(후래)에 好相見(호상견)이니라.

(모든 일에 인정을 남겨두면 나중에 서로 좋은 얼굴로 만날 수 있다.)

앞서 진나라가 진시황 때에 이르러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한 축이 6대 임금에 걸쳐 추진한 ‘법치를 통한 상무정신’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와 함께 천하통일의 원동력이 된 또 다른 한 축은 ‘국적을 불문한 인재등용’이었다.

진나라는 인재등용에 있어 외국 출신들을 적극적으로 발탁해 정부 요직에 앉혔다. 외국 출신의 관리 중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재상에까지 오른 인물만 해도 6대 임금을 거치는 동안 예닐곱 명이나 되었다.

예를 들어 효공은 위(衛)나라 출신의 상앙을, 혜문왕은 위(魏)나라 출신의 장의를, 소양왕은 위(魏)나라 출신의 범저를, 장양왕은 조(趙)나라 출신의 여불위를 그리고 진시황은 초(楚)나라 출신의 이사를 재상으로 중용했다.

특히 이들 외국 출신의 재상 중 소양왕 시대의 범저는 진시황이 중국 대륙을 통일할 수 있는 실질적인 국가 전략과 외교 정책을 수립하여 진나라에 정착시킨 명재상이다. 그는 국가가 부국강병을 추구할 때 인재 등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진나라 조정 안팎에 각인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범저는 소양왕에게 “대부(大夫)의 가문을 크게 일으킬 인재는 나라 안에서 찾을 수 있지만 제후의 나라를 크게 일으킬 인재는 천하에서 찾아야 한다”는 유세(遊說)를 했다.

범저가 소양왕에게 말한 인재 등용론은 이후 진나라의 부국강병 전략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천하통일의 거대한 동력원으로 작용했다.

범저는 진나라의 재상이 되기 이전 자신의 고향인 위나라의 중대부(中大夫) 수고(須賈)를 섬겼다. 범저는 위나라 소왕의 사신으로 제(齊)나라에 가는 수고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이때 제나라 양왕은 변론에 뛰어난 범저를 눈여겨보고 금 열 근과 쇠고기 그리고 술을 선물로 보냈다. 범저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수고는 범저가 위나라의 비밀을 제나라에 알려주고 뇌물을 받았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위나라에 돌아온 후 수고는 결국 당시 위나라의 재상 위제(魏齊)에게 제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했다. 크게 분노한 위제는 범저를 반 죽도록 매질했다. 그리고 초죽음이 되다시피 한 범저를 대나무 발에 둘둘 말아서 변소에 내다 버렸다.

위제의 집에 드나드는 빈객들은 변소를 오가면서 범저의 몸에다 오줌을 누며 모욕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범저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 살려주면 훗날 반드시 보답을 하겠다면서 자신이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범저의 재능과 사람됨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위제에게 시체를 버리고 오겠다고 속인 다음 범저를 풀어주었다. 사지(死地)에서 간신히 몸을 피한 범저는 장록(張祿)으로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았다.

그 후 범저는 위나라에 사신으로 온 진나라의 왕계(王稽)에게 발탁되어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갔다. 진나라에 간 범저는 그의 능력과 식견을 알아본 소양왕에게 중용되어 일약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진나라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 크게 위협을 느낀 위나라 왕이 수고를 사신으로 보내 화의(和議)를 요청했다. 수고가 진나라에 왔다는 사실을 안 범저는 신분을 숨긴 채 초라한 행색을 하고 남몰래 사신의 숙소로 찾아갔다.

수고는 죽은 줄 알았던 범저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더욱이 범저가 날품을 팔아먹고 산다는 말을 듣고는 과거 일에 대한 미안함에다가 동정심이 일어나 자신의 두꺼운 명주 솜옷 한 벌을 선뜻 내주며 위로했다. 그러면서 눈앞에 있는 범저가 바로 진나라의 재상 장록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혹시 장록과 친한 사람을 알면 줄을 좀 대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범저가 자신이 식객 노릇을 하고 있는 집안의 주인이 장록을 잘 안다면서 다리를 놓아 줄 테니 약속한 시간에 재상의 관저로 오라고 했다. 약속한 날짜에 재상의 관저에 도착해 범저를 만나고 나서야 수고는 비로소 진나라의 재상 장록이 범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상 관저에서 수고를 만난 범저는 과거 그의 죄를 크게 꾸짖었다. 수고는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 죄를 빈다고 해도 부족하다면서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범저는 수고의 죄목 세 가지를 상세히 열거하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전날 다시 만났을 때 자신에게 두꺼운 명주 솜옷 한 벌을 주고 ‘옛 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보여준 점을 이유로 들어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모욕을 주고 목숨까지 거두려고 했던 위나라의 재상 위제만은 살려둘 수 없다면서 당장 위제의 목을 가져오지 않으면 위나라로 군대를 보내 멸망시켜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렇듯 수고와 위제의 엇갈린 운명을 보면 비록 잘못을 저지르고 허물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일에 인정을 남겨두면 나중에 서로 좋은 얼굴로 만날 수 있다”는 『명심보감』의 가르침을 되새겨볼 수 있다.

과거의 원한에도 불구하고 옛 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범저에게 명주 솜옷 한 벌을 건네준 수고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반면 범저의 목숨을 빼앗는 것으로도 모자라 변소에 버리고 오줌 세례를 받게 하는 모욕을 가했던 위제는 몸을 피해 위나라를 떠난 후에도 범저의 끈질긴 추격 때문에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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