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을 물려주기보다 한 권의 경서·한 가지의 기술을 가르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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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을 물려주기보다 한 권의 경서·한 가지의 기술을 가르쳐라”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9.06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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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10강 훈자편(訓子篇)…자식을 가르쳐라③

[명심보감 인문학] 제10강 훈자편(訓子篇)…자식을 가르쳐라③

[한정주=역사평론가] 漢書云(한서운) 黃金滿籝(황금만영)이 不如敎子一經(불여교자일경)이요 賜子千金(사천금)이 不如敎子一藝(불여교자일예)니라.

(『한서』에서 말하였다. “황금이 상자에 가득하다고 해도 자식에게 한 권의 경서를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자식에게 천금의 돈을 물려준다고 해도 자식에게 한 가지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한서(漢書)』는 중국 역대 역사서 중에서 『사기』의 뒤를 이은 ‘두 번째 정사(正史)’로 불릴 만큼 중요한 책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기』는 오제(五帝: 황제(黃帝)·전욱(顓頊)·제곡(帝嚳)·요(堯)임금·순(舜)임금) 시대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통사(通史) 형식의 역사서인 반면 『한서』는 한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유방부터 ‘왕망의 난’으로 전한(前漢)이 멸망하기까지 12대 23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왕조사(王朝史)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서』를 저술한 사람은 반고(班固)이다. 그는 『사기』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한나라의 역사를 집필하고자 했던 아버지 반표(班彪)의 유지를 받들어 나이 23세 때부터 거의 30여 년 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12제기(帝紀)·8표(表)·10지(志)‧70열전(列傳) 전체 100권으로 이루어진 『한서』를 완성했다.

여기《명심보감》의 엮은이가 인용하고 있는 경구는 『한서』의 70열전 가운데 <위현전(韋賢傳)>에 나오는 구절이다.

<위현전>의 주인공 위현은 무제, 소제(昭帝), 선제(宣帝) 때 활동한 저명한 학자이자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승상(丞相)의 자리에까지 오른 정치가였다. 어렸을 때부터 오직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일에 전력을 쏟았던 위현은 일찍부터 유가의 경전 연구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특히 그는 ‘위씨(韋氏)의 학문’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독자적인 학술체계를 세워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노대유(鄒魯大儒: 추노 지방의 대 유학자)’라고 불리며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명성 덕분에 무제 때에는 조정에서 특별히 그를 초청해 오경박사(五經博士)로 삼았다. 또한 소제 때에는 황제의 스승이 되었고, 선제 때에는 이미 70세가 넘은 고령이었음에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승상의 관직에까지 올랐다.

더욱이 위현은 시쳇말로 ‘자식농사’를 잘 지은 사람으로도 크게 이름을 날렸다. 그의 아들 네 명 가운데 큰아들 위방산은 지방 현령, 둘째 위굉은 동해태수, 셋째 아들 위순은 유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넷째 아들 위현성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또 다시 승상의 지위에 올랐다. 이 덕분에 위현의 집안은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승상을 배출하는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위현 자신은 물론 네 아들이 학자로서는 물론이고 정치가로서도 최고의 명성과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위현이 스스로 황금과 같은 재물보다 한 권의 경서와 같은 지식과 지혜를 물려주는 것이 자식들을 위해 훨씬 더 낫다고 여기고 힘써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에 세상 사람들은 위현과 그 자손들을 통해 “遺子黃金滿贏(유자황금만영) 不如敎子一經(불여교자일경)”, 곧 “자식들에게 상자 가득 황금을 물려주는 것이 한 권의 경서를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는 가르침을 깨우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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