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 있는 사람은 재주 없는 사람의 노예가 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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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 있는 사람은 재주 없는 사람의 노예가 되기 쉽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12.07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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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㉜
▲ 공자의 초상.

[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㉜

[한정주=역사평론가] 巧者(교자)는 拙之奴(졸지노)요 苦者(고자)는 樂之母(낙지모)니라.

(재주가 공교로운 사람은 재주가 졸렬한 사람의 노예이고, 괴로움은 즐거움의 어머니이다.)

재주가 공교로운 사람은 그 재주 때문에 많은 일을 하게 된다. 반면 재주가 졸렬한 사람은 그 졸렬한 재주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별달리 하는 일이 없게 된다.

만약 재주가 공교로운 사람과 재주가 졸렬한 사람이 함께 있다면 누가 더 많은 일을 하게 되고 누구의 심신이 더 수고롭게 될까? 당연히 재주가 공교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주가 공교로우면 재주가 졸렬한 사람의 부림을 받는 노예가 되기 쉽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본다면 ‘재주가 공교로운 사람보다는 차라리 재주가 졸렬한 사람이 낫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다르게 해석하면 곧 ‘쓸모 있음’보다는 오히려 ‘쓸모없음’이 더 낫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어떻게 ‘쓸모 있음’보다 ‘쓸모없음’이 더 낫다고 얘기할 수 있는가.

『장자』 <산목(山木)> 편에 실려 있는 공자와 태공임(太公任)이라는 사람의 대화를 통해 이 말에 담긴 뜻을 한번 살펴보자.

공자가 천하 주유 도중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국경에서 발이 묶이는 바람에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익힌 음식을 먹지 못하는 곤란을 겪고 있을 때 태공임이 공자를 위로하러 찾아갔다.

당시 공자가 초나라로 가면 자신들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진나라와 채나라가 공자를 들판에 억류한 채 굶주림의 고통과 죽음의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태공임은 공자에게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공자는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이에 태공임이 공자에게 죽기 싫으냐고 묻자 공자는 죽기 싫다고 했다. 그러자 태공임은 공자에게 죽지 않을 방법을 알려주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해(東海)에 사는 ‘의태(意怠)’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새이다. 그 새는 날려고 날갯짓도 하지 않다가 다른 새들이 날자고 하면 날아간다.

또한 다른 새들이 괴롭히면 괴로움을 즐거움 삼아 그냥 둥지에서 쉬곤 했다. 나아갈 때는 절대로 다른 새들보다 앞서 날지 않고, 물러설 때는 절대로 다른 새들보다 뒤에 있지 않았다. 먹이를 먹을 때에도 절대로 다른 새들보다 먼저 먹지 않고 반드시 차례를 지켜서 먹이를 취했다.

이러한 까닭에 ‘의태’는 새의 무리에서 배척당하지 않고 또한 사람들에게 잡혀 죽음을 맞는 해로움을 입지도 않았다. 이렇듯 쓸모없는 존재로 살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삼을 줄 알았기 때문에 ‘의태’는 어려움을 면하고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곧게 자라 좋은 재목감이 된 나무는 먼저 잘리게 되고, 반대로 굽어 자라 재목감으로 적당하지 않아 쓸모가 없는 나무는 오래 사는 법이다. 또한 맛있는 우물물은 먼저 마르게 되고, 반대로 맛없는 우물물은 오랫동안 마르지 않는 법이다.”

태공임의 말은 마치 곧게 자라 좋은 재목감이 된 나무가 먼저 잘리고, 맛있는 우물물이 먼저 마르게 되는 것처럼 사람 역시 ‘쓸모 있음’ 때문에 타고난 운명보다 먼저 비명횡사할 수 있다는 뜻을 담은 얘기였다.

다시 말해 지금 공자가 일주일 동안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는 이유가 초나라에서 공자가 ‘쓸모 있음’을 얻게 되면 자신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진나라와 채나라의 공포심이기 때문에 불행의 원인은 다른 무엇도 아닌 공자의 ‘쓸모 있음’, 곧 ‘공교로운 재주와 지혜’라는 암시였다. 따라서 태공임은 공자에게 ‘쓸모 있음’을 버리고 ‘쓸모없음’을 취해야 비로소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조언한 것이다.

‘쓸모 있음’ 때문에 목숨을 잃고 ‘쓸모없음’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마땅히 ‘쓸모 있음’보다 ‘쓸모없음’이 더 낫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명심보감』의 경구처럼 ‘재주가 공교로운 것’보다는 차라리 ‘재주가 졸렬한 것’이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유지하는데 훨씬 더 낫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태공임의 조언을 들은 공자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공자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물론 제자들조차 멀리한 채 큰 연못가에 숨어 살면서 가죽옷과 거친 베옷을 입고 도토리를 주워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자 짐승 속에 들어가 살아도 배척당하지 않고, 새 무리 속에 들어가 지내도 외면당하지 않았다.

『장자』에서는 이러한 ‘쓸모 있음’을 버리고 ‘쓸모없음’을 선택한 공자의 삶을 가리켜 “짐승과 새도 싫어하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들이 싫어하겠는가?”라고 논평했다. 물론 『장자』의 기록은 하나의 우화(寓話)일 뿐 실제 공자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장자』에서는 ‘재주가 공교로운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려고 하면 바로 그 공교로운 재주 때문에 쉽게 불행을 만날 수 있는 반면 ‘재주가 졸렬한 쓸모없는 사람’으로 살려고 하면 바로 그 졸렬한 재주 때문에 오히려 온전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목적으로 비록 허구일망정 우화의 형식을 빌려 공자의 이야기를 꾸며서 지어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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