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꾼들의 성지이자 로망’…제승당활터를 가다
상태바
‘활꾼들의 성지이자 로망’…제승당활터를 가다
  • 한정곤 기자
  • 승인 2018.12.10 10: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활터 가는 길]⑦ 충무공과 수군 활쏘기 훈련…바다 건너 과녁 압권

[활터 가는 길]⑦ 충무공과 수군 활쏘기 훈련…바다 건너 과녁 압권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화살은 한달음에 바다를 건넌다. 코앞으로 다가온 겨울을 재촉하는 늦가을 바닷바람이 살걸음을 방해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무언가 앞에선 한낱 미풍에 불과하다. 몸도 마음도 이미 오랜 기다림에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는데 더 이상 거칠 것이 무엇이겠는가.

미세먼지에 갇힌 잿빛 하늘에 한줄기 기다란 포물선이 그어진다. 먹잇감을 덮치는 포식자의 번득이는 눈처럼 금빛 화살촉은 아침 햇살에 반짝일 새도 없이 목표물을 향해 내리 꽂힌다.누군가의 화살이 초시(初矢)부터 ‘딱’ 소리를 내며 과녁 앞에서 공중제비를 넘는다. 또 누군가의 화살은 과녁이 아닌 적송(赤松) 숲에 묻혀 흔적도 없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관중(貫中)이 아니면 어떠랴. 말 그대로 습사(習射)가 아닌가.’

여느 때 같았으면 혼잣말로 중얼거렸을 위로 아닌 위로조차 이곳에서는 머릿속에 똬리를 틀지 못한다. 420여 년 전 같은 자리에 서서 습사를 했던 궁사(弓師)들에게 화살 하나는 곧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였으리라. 적군을 비껴간 화살은 여지없이 내 목을 향해 되돌아올 테니 말이다.

▲ 한산정(閑山亭)은 사대(射臺)에서 바다를 건너 반대편 산을 향해 살을 보내는, 국내에서 단 하나뿐인 지형의 활터다. <사진=한정곤 기자>

◇ “여인의 품에 안긴 느낌의 활터”

경남 통영 한산섬의 비탈진 언덕에 자리한 제승당활터 한산정(閑山亭)은 사대(射臺)에서 바다를 건너 반대편 산을 향해 살을 보내는, 국내에서 단 하나뿐인 지형의 활터다. 사대 밑은 낭떠러지로 만조 때는 물론 간조 때도 바닷물이 찰랑거린다.

자연경관의 훼손을 최소화하고 사대 건물과 과녁이 들어설 무겁만 조성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누정(樓亭) 건축의 특징이다. 물론 한산정이 서민과 동떨어진 양반네들의 고급문화를 대표하는 누정은 아니다. 다만 당시 누정이 들어선 지형적 특징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의미다.

한산정에서 바라본 풍광도 저절로 감탄사를 불러일으킨다. 완만한 능선의 반대편 산중턱에 설치된 과녁은 사대에서 서북 방향으로 20도 가량 기울어져 있다. 무겁이라고 할 것도 없이 소나무 숲에 뒤덮여 터를 잡은 홍심 3개가 온몸으로 받아낼 화살을 기다리고 있다.

사대에서 오른쪽으로는 드넓은 한산섬 앞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여기에 적송 한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바다에서 사대로 불어오는 해풍을 막아주는가 하면 철제 난간으로 가로막힌 사대 앞에는 길게 목을 뽑고 웃자란 대나무가 키재기를 하며 하늘하늘 궁사의 마음을 흔든다. 바로 밑은 낭떠러지로 작은 만(灣)이 밀물과 썰물을 번갈아가며 넘실넘실 푸른 바닷물을 받아들이고 뱉어낸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모래사장과 검은 바위를 드러낸 둥근 해안길이 형성돼 사대에서 과녁으로 가는 연전(揀箭)길 역할을 한다.

최문구 접장은 “살을 보낼 때는 여인의 오른쪽 허벅지를 탐하고 연전길에서는 여인의 은밀한 부분을 지나 왼쪽 허벅지를 탐하는 불경한 생각이 든다”며 “마치 여인의 품에 안긴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활터”라고 말한다.

▲ 소나무 숲에 뒤덮여 터를 잡은 홍심 3개가 온몸으로 받아낼 화살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전국적으로 400여개의 활터가 있지만 어느 누가 감히 이 같은 활터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인간이 창조한 예술품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에는 결코 비할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풍성한 잎을 다 털어내고 맨가지로 겨울을 이겨낸 산이 봄철 푸르름을 되찾는 것과 달리 인간의 삶이 다시 청춘을 되찾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그릇된 욕심 때문일 게다. 자연보다는 개발을 앞세우고 자연의 힘을 이기기 위해 온갖 문명의 이기들로 치장한 활터에서 시기와 질투, 경쟁과 다툼이 만연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활터 중에서 한산정과 비슷한 지형으로 경남 하동의 금오정과 제주 서귀포의 백록정을 꼽는다. 그러나 바다를 건넌다고 한산정과의 비교는 어불성설이다. 이들 활터는 한산정처럼 산에서 산이 아닌 해변과 해변 사이에 사대와 무겁을 설치하고 있다. 또한 간조 때는 갯벌과 갯바위가 드러나지만 한산정의 사대 앞은 간조 때도 물이 찰랑거리는 바다다.

◇ “간조·만조 때마다 달라지는 거리감각 훈련”

특히 한산정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직접 활쏘기를 했을 뿐만 아니라 휘하 수군들의 훈련과 함께 1594년 4월 과거시험장으로 사용돼 100여명이 급제한 역사성까지 갖추고 있다. 단순히 바다를 건너는 아름다운 풍광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활터다.

충무공이 이곳에 활터를 조성한 이유는 육지와 달리 바다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수군의 특성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즉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해 실제 해전에서 적선(敵船)과의 실전거리 적응훈련을 시키기 위해서다.

김상영 제승당관리사무소 소장은 “간조·만조 때마다 거리감각이 다르고 계절·날씨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달라지는 해전의 특수성을 감안해 수군의 활쏘기 훈련을 시킨 이순신 장군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라고 말한다.

▲ 한산정은 해전의 특수성을 감안해 수군의 활쏘기 훈련을 시킨 이순신 장군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다. <촬영=안한진>

충무공은 1593년(선조26년) 7월부터 1597년(선조30년) 2월까지 3년9개월 동안 군사들과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에서 활쏘기를 연마했다. 『난중일기』에는 “수하들과 내기를 해 진 편에서 떡과 술을 내 배불리 먹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충무공은 『난중일기』에 총 278번의 활쏘기 기록을 남겼다. 이 가운데 제승당활터에서의 활쏘기 기록은 237번으로 85%가 넘는다.

“맑다. 활 스무 순을 쏘았는데 많이 적중했다. 종사관 등이 영문에 이르렀다고 했다.” <1595년(을미년) 5월초10일(양력 6월17일 임오)>

“맑다. 늦게 나가 공무를 봤다. 오정 때 순찰사가 와서 활을 쏘고 같이 이야기했다. 순찰사가 나하고 활쏘기 내기를 하자고 하여 겨루다가 순찰사가 일곱 푼을 졌는데 섭섭한 빛이 없지 않았다. 혼자 웃었다. 군관 세 사람도 다 졌다.” <1596년(병신년) 1월28일(양력 2월25일 을미)>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야 개었다. 저녁나절에 삼도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위로하는 음식을 먹이고 겸해 활을 쏘고 풍악을 잡히다가 취해 헤어졌다.” <1596년(병신년) 2월초5일(양력 3월3일 임인)>

“맑다. 사도(四道)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여 활을 쏘고 술과 음식을 먹였다. 또 활쏘기 내기를 해 승부를 가리고서 헤어졌다.” <1596년(병신년) 6월6일(양력 7월1일 임인)>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는 개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서 공무를 본 뒤에 조방장, 충청우후, 나주통판과 함께 철전(鐵箭), 편전(片箭), 활(帿)을 아울러 열여덟 순을 쏘았다.” <1596년(병신년) 6월29일(양력 7월24일 을축)>

▲ 당초 이곳에는 39.32㎡(13평) 규모의 건물이 있었지만 규모가 작고 낡았다는 이유로 헐리고 새 건물을 지으면서 한산정이라는 현판도 걸었다. <촬영=안한진>

◇ 공식적 활쏘기는 한산대첩기 활쏘기대회 단체전 8강

한산정은 제승당 뒤편 사괴석(四塊石) 담장 밖에 위치해 있다. 협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화강석으로 된 계단을 내려가면 한산대첩 당시 적의 사체를 이장했던 매외치가 보이는 바닷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48.6㎡(14.7평)의 콘크리트조 건물이다. 기둥은 민흘림 원주로 내부에는 기둥이 없는 외진기둥으로만 조성됐다. 양측칸의 중도리와 종보 사이에는 우물천정 형태의 콘크리트 슬라브를 쳤으며 그 외의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지붕은 한식 토기와 중와를 사용한 팔작집으로 바닥은 박석을 깔았으며 단청은 미색가칠로, 연목과 부연 도리 등의 마구리는 백색가칠로 마감했다.

당초 이곳에는 39.32㎡(13평) 규모의 건물이 있었지만 규모가 작고 낡았다는 이유로 헐리고 새 건물을 지으면서 한산정이라는 현판도 걸었다. 그러나 정확한 구분은 정(亭)이 아닌 대(臺)라는 명칭이 적절하다. 바닥은 물론 기둥 중층에도 마루가 설치돼 있지 않아 정(亭)이나 누(樓)라는 명칭은 부적합하다.

▲ 산중턱에 걸친 까마득한 과녁의 모습은 비현실적인 상상 속의 활터를 연상시킨다. <사진=한정곤 기자>

『난중일기』에는 ‘사정(射亭)’ 혹은 ‘활터사정’으로만 표기된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는 현판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일부 궁사들은 한산정이라는 명칭 대신 차라리 제승당활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적 제113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로 지정된 제승당활터에서의 활쏘기는 극히 제한된 소수만이 가능하다. 김상영 소장은 “안전문제 같은 시설이 갖춰지지 않아 많은 인원이 이곳에서 활쏘기를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서 “연간 20만명에 달하는 관광객의 출입도 잦고 사적지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도 모든 궁사들에게 활쏘기를 허용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실제 낭떠러지 위에 걸쳐 있는 사대는 많은 인원이 몰려들 경우 붕괴 위험이 있을 만큼 위태롭게 보인다. 동행한 안한진 접장도 “사대가 워낙 높아 공중에 높이 부양된 상태에서 살을 보내는 기분이 든다”고 혀를 내두른다.

제승당활터에서의 공식적인 활쏘기는 매년 8월 통영 열무정에서 개최되는 ‘이충무공 한산대첩기 전국남녀궁도대회’의 단체전 8강 경기다. 단체전이 팀당 5명으로 구성되는 만큼 예선전을 통과한 총 40명의 궁사만 활쏘기 자격을 갖는 셈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을 경우 제승당관리사무소의 승인에 따라 비공식적인 습사가 일부 허용되기도 하지만 흔치는 않다.

궁력(弓歷)이 오래된 궁사일수록 한산정에서의 활쏘기를 성지(聖地)순례에 비유하고 로망으로 간직하고 있는 이유다.

▲ 궁력(弓歷)이 오래된 궁사일수록 제승당활터에서의 활쏘기를 성지(聖地)순례에 비유하고 로망으로 간직하고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 사진으로 처음 접한 몽환적 분위기

제승당활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6개월간의 황학정 국궁교실 과정을 수료하고 서울 상암국궁장에서 야외습사를 마친 후 점심식사를 하던 자리에서였다. 당시 사범에게 ‘지금까지 가본 활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어디였느냐’는 질문에 휴대폰 속 사진으로 보여준 제승당활터는 머릿속에 있던 활터의 개념을 바꾸어놓았다.

아스라이 솔숲에 안긴 과녁은 10여 년 전 일본 가고시마현 야쿠시마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몽환적 분위기의 센피로 폭포를 떠올리게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명작 『원령공주』의 배경이기도 한 센피로 폭포는 가까이에서는 보기 힘든,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수 있다.

센피로 폭포와 같이 꿈속의 무릉도원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산중턱에 걸친 까마득한 과녁의 모습은 비현실적인 상상 속의 활터를 연상시켰다. 어쩌면 올해 3월부터 시작한 <활터 가는 길> 연재기사는 제승당활터로 가는 축적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승당 방문은 당초 11월17일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안전관리 등의 문제로 습사 가능한 인원이 5~6명으로 제한되고 한산정의 기와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제승당관리사무소의 요청에 따라 보름이 늦어졌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고 싶었지만 지난 3월 첫 <활터 가는 길>의 목적지였던 고흥 봉황정까지 먼길을 동행해 주었던 황학정 장동열·박성준·최문구·안한진 접장과 국궁교실 동기인 나성택·황병춘 접장이 따라나서면서 모두 6명이 길동무로 동참했다.

특히 장동열 접장은 처음 제승당 방문 계획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장 접장은 “집궁 10여 년 동안 오매불망 간절하게 바랐던 제승당활터에서의 습사기회가 이렇게 찾아올 줄 몰랐다”며 겨울 한복에 두루마기까지 장만하는 등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안한진 접장은 직장문제로 휴궁상태였지만 고흥 봉황정·전주 천양정·논산 덕유정 등에 이어 기꺼이 드론 촬영을 자청해 주었다.

주말 고속도로 정체를 피하기 위해서는 전용차로 주행이 가능한 12인승 차량이 필요했지만 출발 3~4일을 앞두고 7인승 승합차로 교체돼 3명은 좁은 뒷좌석에 끼여 앉는 불편을 왕복2~3시간 더 감수해야 했다.

▲ 바다 한 가운데에 떠있는 거북등대와 뒤로 한산대첩기념비가 보인다. <사진=한정곤 기자>

오전 9시 통영여객선터미널과 한산섬 제승당을 오가는 파라다이스호가 물살을 가르며 뱃길을 열기 시작했다. 25분가량 소요되는 항해는 군데군데 떠있는 국립공원 한려수도의 여러 섬들을 스쳤다. 대부분 무인도지만 건물이 들어선 곳은 주변 양식장의 가공공장이라고 승선한 한산섬 주민이 설명한다.

멀리 바다 한 가운데에 떠있는 거북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봉오리에는 하얀 거탑이 우뚝 솟아 있다. 한산대첩기념비로 맞은 편 고동산과 함께 한산섬으로 들어오는 폭 400m의 좁은 길목을 양쪽에서 지키고 있는 형국이다.

그 앞으로는 상죽도·하죽도와 함께 충무공이 한산대첩 이후 갑옷을 벗고 땀을 씻었다는 해갑도 등 3개의 작은 무인도와 암초가 가로 놓여 있어 한산섬의 존재는 물론 만의 규모와 형태까지도 식별을 불가능하게 한다.

충무공이 한산섬에 둥지를 튼 이유를 어느 누구의 설명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이해할 수 있는 지형이다. 실제 이러한 지형 조건은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해전을 승리로 이끌게 했던 결정적인 요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12월로 접어들었지만 제승당은 초록으로 뒤덮여 있다. 뱃머리 2시 방향으로 ‘제승당’이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 활터의 과녁도 보인다. 어디선가 진군을 알리는 북이 울리는 듯 가슴이 두근거린다.

▲ 한산섬 앞 바다 상공에서 본 제승당 전경. <촬영=안한진>

◇ 若無湖南(약무호남) 是無國家(시무국가)…최초 삼도수군통제영

제승당(制勝堂)은 1592년(임진년) 전라좌수사였던 충무공이 여러 해전에서 승리한 뒤 한산도의 지리와 전략적인 필요성에 따라 1593년(계사년) 7월 수군진영으로 조성했다. 이후 8월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돼 1597년(정유년) 2월 파직될 때까지 3년9개월간 삼도수군을 지휘하던 최초의 통제영으로 군림했다. 제2대 통제사 원균이 정유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패사할 때까지 5개월간 집무했던 기간을 합하면 모두 4년2개월 동안 전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지휘본부였다.

충무공은 한산섬으로 진영을 옮긴 다음날인 7월16일 가까운 벗으로 지평(持平) 벼슬에 있던 현덕승에게 보낸 서신에서 “若無湖南是無國家 是以昨日進陣于閑山島以爲遮海路之計(약무호남시무국가 시이작일진진우한산도이위차알해로지계)”라고 썼다. 즉 “생각하면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로 만일 호남이 없어지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진(陣)을 한산도로 옮겼으며 해로(海路)를 가로 막을 계획입니다”라고 목적을 밝힌 것이다.

충무공의 이 같은 해로 차단 계획은 다음 달인 8월10일 조정에 올린 장계 ‘진왜정장(陳倭情狀)’에서 다시 확인된다.

“지난 6월14일 육지에서는 창원에 있는 왜적들이 곧바로 함안(咸安)으로 돌입하자 함안에 머물고 있던 각 도의 여러 장수들이 의령등지로 퇴각해 진을 쳤으며, 15일 바다에서는 적선 대·중·소 합쳐 무려 700~800여척이 부산, 양산, 김해로부터 웅천, 제포, 안골포 등지로 옮겨 정박하기 위해 연일 잇대어 오고 있었는데, 이는 수륙으로 갈라서 (서쪽 호남을) 침범하려는 계획임이 분명했습니다. 우리 수군들은 만약 거제도 안쪽 바다에 진을 친다면 바다 바깥쪽으로 침범해 오는 적들을 미쳐 달려가 막지 못할 것이고, 바깥쪽으로 진을 친다면 안쪽 바다의 적을 미쳐 맞아 치지 못할 것이므로 거제 땅 안팎 바다로 두 갈래 진 요충지와 작년에 크게 승첩한 견내량 한산도 등지에 진을 합해 왜적의 길을 끊어 막고 겸해 안팎의 사변에 대비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제승당은 창건 2년 만에 화재로 소실되는 불운을 겪는다. 『난중일기』 을미년 9월25일자에는 “녹도 하인이 불을 실수해 대청과 다락방이 연소돼 다 타버렸다. 군량과 화약, 군기 등 곳간에는 불이 미치지 않았지만 아래 두었던 장편전(長片箭) 200개가 다 타 버려 애석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통제사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주해 사망하고 경상우수사 배설 등이 남해 쪽으로 탈주하면서 왜군에 의해 두 번째 불에 타 완전 소실됐다.

▲ 한산정 상공에서 본 제승당 전경. <촬영=안한진>

전란 중 소실된 제승당은 1739년(영조15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중건할 때까지 142년 동안 사실상 폐허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조경 통제사는 제승당 옛터에 올라 “이곳을 이렇게 황폐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고 탄식하며 조정에 장계를 올려 중수에 나섰다.

그러나 이마저도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다. 조경 통제사의 중수 후 20년이 흐른 1760년 제121대 통제사로 부임한 충무공의 13대손 이태상은 “기왓장이 밀려 내리고 재목은 썩고 비석에는 이끼가 끼어 사람들이 지나다가 머뭇거리고 두루 살피면서 구름과 물만이 훤하게 보일 뿐임을 탄식”하며 1760년 2차 중수에 나섰다.

‘제승당중수기’에는 통제사 조경이 지었던 옛집을 그대로 중수하고 비각은 뒤로 옮겼다가 썩은 곳은 갈아내고 또 비석의 글자가 희미해진 것은 새롭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날 전해지는 제승당은 1976년 국가의 예산이 투입된 정화사업의 결과물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겉모습과 달리 대부분 목재보다는 시멘트로 기반공사를 한 콘크리트조 건물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수군사령부라는 본래의 창건목적을 뒷받침할 수 있는 건물이라고는 제승당과 수루(戍樓), 활터가 고작이다.

▲ 적송 숲을 따라 길게 이어진 제승당 진입로. <사진=한정곤 기자>

◇ “한민족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곳”

제승당 선착장에서 오른쪽으로 바다를 끼고 호젓한 산책길을 따라 걷는다. 왼쪽으로는 아름드리 적송(赤松)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은 거북선과 판옥선 등 군선을 건조할 때 한산섬의 이들 적송을 주요 자재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적송 앞에는 봄을 기다리는 동백이 울타리 역할을 하며 줄지어 늘어서 있다. 붉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할 때면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것만 같다.

매표소를 지나 왼쪽 두 개동의 흰색 외벽칠의, 주변환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제승당관리사무소에는 사전에 약속한 김상영 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승당관리사무소장으로 3년 전 부임해 올해 말 임기가 끝나는 김 소장은 이순신 리더십의 대가다. 1988년 해양수산부 공무원으로 시작해 2009년 경남도청 항만정책과와 하천관리과를 거쳐 제승당관리소장으로 부임해 지금까지의 업무와는 전혀 다른 충무공과 제승당의 매력이 빠져 이제는 전공(?)까지도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것이다.

▲ 김상영 제승당관리사무소 소장이 충무사 충무공 영정 앞에서 제승당과 충무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한민족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곳”이라고 말문을 연 뒤 제승당 이곳저곳을 동행하며 소개한 1시간30여분 동안 일행은 김 소장의 전문적이고 열정적인 해설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김 소장의 안내로 가장 위쪽에 자리한 충무사를 찾아 충무공 영정에 참배하는 것에서부터 본격적인 제승당 관람이 시작된다. 충무공 영정은 1978년 정형모 화백의 작품으로 서애(西厓)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서 표현하고 있는 이미지가 형상화돼 있다.

“舜臣爲人寡言笑容貌雅飭如修謹之士而有中膽氣亡身殉國, 乃其素所蓄積也(순신위인 과언소 용모아칙 여수근지사 이유중담기 망신순국 내기소소축적야)

이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정하여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니 안으로 담기(膽氣)가 있었다.”

충무공의 영정은 월전 장우성 화백의 아산 현충사본을 비롯해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갑주본(갑옷을 입고 칼을 든 채 서 있는 무장의 모습)도 있다. 원래 제승당 충무사에는 김은호 화백의 갑주본이 봉안돼 있었지만 1978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정형모 화백이 그린 영정으로 교체됐고 김은호 화백의 갑주본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옮겨갔다.

◇ 목적의식 분명한 해군사령부다운 작명

현재 제승당에는 충무사를 비롯해 유허비, 제승당, 한산정, 수루, 대첩문, 수호사, 한산문 등의 건축물들이 배치돼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고 중심이 되는 건축물은 단연 제승당(制勝堂)이다. 사적 제113호로 1593년 충무공이 창건한 후 소실돼 중건됐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소실돼 폐허가 된 것을 1739년 조경 통제사가 본래의 모습으로 중건해 현재의 현판을 걸었다. 이후 부분적인 보수를 거쳐 1933년 또 한 차례 중건을 거쳐 1976년 정화사업 때 규모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학계의 고증을 거쳐 현재의 위치로 옮겨 건립됐다.

▲ 제승당 정면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목조와가의 겹처마집으로 초익공 연등천정의 팔작지붕이다. 내부에 걸려있던 ‘제승당기(制勝堂記)’ 등 편액은 별도 보관하고 있으며 현판은 조경 통제사가 중수 당시 직접 써서 걸었다. 조경 통제사가 쓴 현판은 지금까지 제승당 처마 밑에 걸려 있다.

제승(制勝)은 『손자병법』 <허실> 제6편에서 유래한다. 즉 승리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을 파악하고 관찰해 최적의 조건들을 결합시키는 형세·형상을 가리킨 제승지형(制勝之形)이 그것이다.

夫兵形象水 水之形 避高而趨下 兵之形 避實而擊虛 水因地而制流 兵因敵而制勝.(부병형상수 수지형 피고이추하 병지형 피실이격허 수인지이제류 병인적이제승)
무릇 군대의 운용은 물과 같아야 한다. 물은 높은 곳을 피하고 낮은 곳으로 흐른다. 마찬가지로 군대의 운용도 적의 강한 곳을 피하고 적의 허점을 쳐야 하는 것이다. 물은 지형에 따라 흐름의 형태가 이루어지지만 군도 상황에 따라 즉 적의 허실강약에 따라 승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人皆知我所以勝之形 而莫知吾所以制勝之形 故其戰勝不復 而應形於無窮.(인개지아소이승지형 이막지오소이제승지형 고기전승불복 이응형어무궁)
사람들은 모두 내가 승리할 때의 군의 태세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든 태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싸움에 이긴 방법은 다시 쓰지 아니하고 적의 배치상황에 따라 무궁무진한 전략전술로써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 현재 제승당 처마에 걸려 있는 조경 통제사의 현판(위쪽)과 백범이 사진의 배경으로 촬영한 김영수 통제사의 현판. <사진=한정곤 기자>

조경 통제사는 임진왜란 당시 운주당(運籌堂)으로 불렸던 건물을 중건하면서 제승당으로 현판을 바꿔 달았다. 운주당은 ‘운주유악(運籌帷幄)’, 즉 장막 안에서 꾀를 낸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모든 작전계획을 세우고 또 여러 장령들과 의논하는 집이라는 의미다. 의미로 본다면 ‘운주’나 ‘제승’ 모두 적에 맞서 전략전술을 수립한다는 데에서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목적의식이 분명한 해군사령부다운 작명이 아닐 수 없다.

김상영 소장은 “운주당이라는 이름은 한산도만이 아닌 충무공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이라면 불렀던 명칭”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이 1946년 9월16일 통영을 방문했을 당시 한산섬을 찾아 땅에 떨어져 있는 현판을 보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만도 다행”이라면서 일행과 함께 현판을 배경으로 촬영한 사진이 전해지고 있어 더 유명하다.

백범 사진의 배경이 된 제승당 현판은 1786년(정조10년) 제141대 통제사 김영수가 쓴 것으로 그는 수안군사를 역임한 강은 김칠양의 후예로 백범과 같은 안동 김씨다. 이 현판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로 당시 제승당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현재는 제승당 내부 오른쪽 벽면에 세워져 있다.

▲ 제승당(왼쪽)과 수루. <사진=한정곤 기자>

◇ 충무공 친필 집자(集子)로 현판 교체…“물가의 누각 아니다”

제승당에서 일반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건축물은 수루(戍樓)다. 충무공이 남긴 유명한 시(詩) ‘한산도가(閑山島歌)’의 무대로 등장하는 곳이다.

閑山島月明夜
上戍樓撫大刀
深愁時何處
一聲羌笛更添愁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수루는 적의 동정을 살피는 망루다. 정화사업 이전에는 수루라는 건물이 없었지만 수루의 성격이 망루인 탓에 제승당 옆 한산만 앞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사학자들의 고증을 받아 신축됐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콘크리트조 건물이다. 굴도리 5량의 겹처마 집으로 연등천정으로 되어 있다. 정화사업 당시 경남도지사였던 강영수의 글씨였던 수루의 현판은 김상영 소장이 2017년 말 이순신 장군의 친필로 집자(集子)해 바꿔달았다. 수루 안의 ‘한산도가’ 편액도 이때 함께 충무공의 친필로 제작해 걸었다.

김 소장은 “『난중일기』 완역본의 저자 노승석 박사의 도움을 받았다”면서 “『난중일기』에도 여러 글씨체가 나오지만 우리가 가장 알아보기 쉬운 임진일기 7월에서 ‘수’ 자를 찾고 ‘루’ 자는 계사일기 5월4일자 ‘우수사·군관들과 함께 진해루에서 활을 쏘았다’라는 대목에서 찾았다”고 소개한다.

설명을 듣고 있던 황병춘 접장이 갑자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더니 “훌륭한 일을 하셨다”고 박수를 친다. 수루와 아무 연관 없는 도지사의 의미 없는 글씨보다는 충무공의 친필 현판이라는 것만으로도 값진 일을 했다는 것이다.

김 소장은 갑작스런 칭찬에 쑥스러워 하며 “제가 쓸 데 없는 짓을 한 것은 아니죠?”라고 반문하면서도 으쓱해 한다. 김 소장은 “노승석 박사에게 아무런 보상도 하지 못했다”며 “빚을 지고 있다”고 덧붙인다.

▲ 수루 상공에서 본 한산섬 앞바다. <촬영=안한진>

수루에 대한 오해가 있다. 흔히 수루의 ‘수’를 ‘물 수(水)’로 착각해 물가에 있는 누각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한자를 보면 지킨다는 의미를 갖는 ‘수(戍)’다. 김상영 소장은 “변방, 국경지방이라는 뜻의 한자로 지킨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면서 “전쟁 시에는 적군과 아군의 중간지점쯤 되는 곳을 일컫는다”고 말한다. 또한 한자가 ‘개 술(戌)’과 비슷해 혼동하는 이들도 있다.

수루 한쪽에서 조용히 한산섬 앞바다를 바라보던 박성준 접장은 “이곳에 올라와 보니 충무공의 깊은 한숨 섞인 고민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외로운 모습이 아련하면서도 가슴 아리게 떠오른다”고 말한다.

수루에서 바라본 한산섬 앞바다는 잔잔한 물결이 하늘을 비추고 있다. 멀리 거북등대 옆으로 왜선 대신 하얀 돛을 단 요트가 흐르고 어선인 듯 작업선인 듯 조그만 배 한 척이 빠르게 미끄러져 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