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한양 도성 활터의 흔적들…웃대 오터·아랫대 네터(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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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한양 도성 활터의 흔적들…웃대 오터·아랫대 네터(上)
  • 한정곤 기자
  • 승인 2019.01.1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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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⑧ 왕 호위 좌청룡 우백호…암벽글씨로만 일부 남아
▲ 1830년 한양 도성을 그린 조선성시도.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활터 가는 길]⑧ 왕 호위 좌청룡 우백호…암벽글씨로만 일부 남아

스스로 ‘무명자(無名子)’라고 불렀던 조선 후기의 문신 윤기(尹愭)의 시문집인 『무명자집(無名子集)』에는 그의 나이 51세 때인 1791년(정조15년) 동대문에 올라 도성을 돌아본 경치와 정취를 읊은 시(詩)가 수록돼 있다. 낙산에서 백악산(북악산)을 거쳐 인왕산에 이르기까지 도성을 휘감은 여정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펼쳐놓은 듯하고 봄날 활터의 풍경도 등장한다.

麗景深春好 햇살 고운 늦봄의 경치가 아름다워
閑居幽興多 한가로운 생활 중에 흥취가 깊어지니
迨玆白日永 하루해가 길어난 오늘 이때에
陟彼靑門峨 우뚝한 동대문에 올라보노라

…(중략)…

傍瞻三角岫 옆으로 보이는 건 삼각산이요
遙帶五江波 저 멀리 두른 건 한강 물줄기
草樹紛蒙蔽 여기저기 더부룩한 풀숲 나무숲
雲煙相刮劘 맞닿아 넘나드는 구름과 안개

北巖穹棧磴 백악산(白嶽山)은 벼랑에 잔도(棧道)가 높고
西嶽攢矛戈 인왕산(仁王山)은 창을 모아 세운 듯하니
足慄危藤越 높은 덩굴 넘을 때면 발이 떨리고
魂招絶壁過 낭떠러지 지날 때면 혼이 나누나

…(중략)…

白闉纔暢豁 성곽의 흰 문이 시원스레 열리자
紫閣又巖阿 산굽이에 붉은 전각(殿閣)이 또 섰는데
粉鵠懸蒼樾 푸른 나무 그늘에 흰 과녁이 걸리고
紅蛾間綠蘿 초록 넝쿨 사이에 붉게 단장한 여인이 있네

…(하략)

시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붉은 전각(殿閣)’은 바로 ‘활터의 사정(射亭)’을 가리키는 말이다. 산굽이에 붉은색 사정의 활터가 있고 푸른 나무 아래에는 과녁이 걸려 있으며 초록으로 물든 주변의 각종 수풀 속에서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봄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비단 윤기(尹愭)의 시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다산시문집』·『목민심서』 등을 비롯해 홍대용의 『담헌서(湛軒書)』,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이수광의 『지봉집(芝峯集)』 등 여러 선비들의 시문(詩文) 곳곳에서는 활터가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주변에 활터가 많았고 활쏘기 구경이 일상이었다는 반증이다.

1929년 발간된 『조선의 궁술』에도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는 27개의 민간 활터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민간 활터의 유래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임진왜란 후에 선조대왕이 상무정신을 진흥하고자 하여 화재가 있었던 경복궁 동쪽 담장 안에 오운정(五雲亭)을 설치하고, 이것을 개방하여 백성들이 활쏘기를 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이 민간 활터의 시초라고 한다.

그런 가운데 민간 활터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일시에 생겼는데 그 원인은 선조의 장려라기보다는 인조, 효종, 헌종, 숙종대의 각 시기별 무과시험이 열렸던 것이 큰 자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운정의 뒤를 이어 새로이 생긴 도성 내외의 모든 활터 가운데에서 오래된 활터를 보면 상촌(上村)의 백호정(白虎亭)과 하촌(下村)의 석호정(石虎亭), 서대문 밖의 노지사터(盧知事亭)와 강교(江郊)의 풍벽정(楓碧亭)이라 한다.

이 네 활터 외에 한성(漢城)의 민속적 구분에 따른 활터는 남촌(南村)의 상선대(上仙臺), 삼문교(三門橋)의 세송정(細松亭)·왜장대(倭將臺)·청룡정(靑龍亭)·읍배당(揖拜堂)이며, 북촌(北村)의 일가정(一可亭)·흥무정(興武亭)·취운정(翠雲亭)이고, 우대의 백호정의 뒤를 이은 풍소정(風嘯亭)·등룡정(登龍亭)·등과정(登科亭)·운룡정(雲龍亭)·쌍벽정(雙碧亭)·대송정(大松亭)·동락정(同樂亭)이다.

쌍벽정과 동락정을 제하고 5정(亭)을 ‘우대오터’라 하였으며, 아래대의 석호정(石虎亭)·좌룡정(左龍亭)·화룡정(華龍亭)·이화정(梨花亭)은 ‘아래대 네터’라 하였다. 서촌(西村) 서소문 부근의 이화정(梨花亭)과 동촌(東村) 동소문내의 율목정(栗木亭)·사반정(思泮亭)과 경희궁 안에 있는 경운정(慶雲亭)은 모두 도성 안의 활터이다.” <『새롭게 읽는 조선의 궁술』, 국립민속박물관>

흥미롭게도 『조선의 궁술』에 등장하는 활터 대부분이 윤기(尹愭)가 유람했던 길을 따라 도열해 있다. 조선 왕조는 태조3년(1403년) 한양 천도 당시 삼봉 정도전이 북악산(백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 낙산, 우백호 인왕산, 안산 남산의 지형을 갖춘 풍수적 명당자리에 경복궁을 설계했다. 즉 조선 왕조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좌우에서 호위하는 좌청룡·우백호 지형의 산세를 끼고 활터들이 들어선 것이다.

풍수학자 김두규는 저서 『논두렁 밭두렁에도 명당이 있다』에서 풍수에서 청룡은 남자·명예·벼슬·장남 등을 주관하는 기운이, 백호는 여자·재물·예술·차남 등을 주관하는 기운이 강한 것으로 해석한다고 말했다. 조선 왕실의 경우 ‘전통적으로 왕비가 더 오래 살거나 드센 반면 왕이나 왕자 가운데 장남·장손이 단명했다’는 야사의 내용도 같은 맥락으로 지적한다. 백호인 인왕산이 청룡인 낙산보다 더 크고 웅장하다는 점에서 비롯된 풍수적 관념이다.

어쨌든 이들 활터는 석호정을 제외하면 오늘날 모두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거나 일부 바위글씨만 남아 그곳이 활터였음을 후세에 알리고 있다. 그 많던 활터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 갑오경장 이후 활터 폐쇄…활쏘기도 금지
한양 도성에서 활터가 사라진 것은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다. 조선시대 활쏘기는 유학이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무인은 물론 글을 읽는 선비들에게도 적극 권장됐다. 특히 태종(太宗) 2년(1402년) 처음 무과가 시행되면서 완성된 과거제도는 식년시에서 경서에 관한 시험과 함께 무술시험을 치렀다.

▲ 화원화가 한시각(韓時覺)이 1664년(현종5년) 함경도 길주목에서 실시된 문무과 과거 시험 장면을 그린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식년시의 예비단계에서 응시자들은 240보 목전(木箭), 80보 철전(鐵箭), 130보 편전(片箭), 기사(騎射), 기창(騎槍), 격구(擊毬) 등 총 여섯 가지 무술 실력을 평가받았다. 즉 여섯 과목 중 기창과 격구를 제외한 나머지 네 과목이 모두 활쏘기였던 것이다. 결국 무과시험의 합격여부는 활쏘기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무과시험 합격은 곧 신분상승의 기회이기도 했다. 때문에 무과시험 응시자격을 갖춘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활쏘기에 매달렸고, 이는 민간사정이 발달하게 된 배경이 됐다.

그러나 1894년 정부 주도로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변혁을 불러온 갑오경장을 계기로 활쏘기는 구습타파의 대상이 돼 급격한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더구나 과거제도 폐지와 군제 개편으로 활이 군대의 무기체계에서 제외되면서 활쏘기를 통해 신분상승을 도모했던 이들이 활터를 떠나게 되고 활터마저 그 기능을 잃게 되면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특히 갑오경장 이후 활쏘기가 단순히 백성들의 외면에서가 아니라 정부의 공권력이 동원된 강제적 금지라는 기록은 갑오경장 2년 후인 1896년(고종33년) 5월28일자 『독립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달 15일 동소문 안 율목정에서 활을 쏘기로 경무 동서 심총순이 순검을 데리고 간즉 다 도망하고 새다리 최동환과 성균관 홍종혁을 잡아다 회유하여 보내고, 버리고 간 활 셋과 전통 세 개를 주워다가 그 임자 김석철 김재흥 김복림을 찾아 회유하고 내어 주었다더라.”

◇ 낙산 정상 부근 성곽 외벽의 바위글씨…좌청룡 역할 활터
2019년 새해 첫 달 미루고 미루었던 조선시대 활터의 흔적을 따라 서울 성곽길을 밟아나갔다. 욕심 같아서는 사라진 27개의 사정이 있던 자리를 모두 확인하고 싶었지만 연구를 직업으로 하는 이들조차 그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하고 있어 애초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각종 문헌과 최근 자료를 뒤져 확인 가능한 우대 오터와 아랫대 네터를 중심으로 길을 잡았다.

▲ 낙산 정상 부근 성곽 외벽에 박혀있는 ‘좌룡정’ 바위글씨. <사진=한정곤 기자>

연초부터 서슬 퍼런 날을 세우고 옷 틈을 파고들었던 겨울바람은 지친 기색을 드러내며 잠깐 동안 쉬어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오르다 길모퉁이 바위에 걸터앉아 버거운 발걸음을 잠시 달래듯 잦아든 추위는 두툼한 겉옷을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했다.

윤기(尹愭)의 시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동대문에서 낙산(駱山)을 오르는데 도시는 이미 칙칙한 잿빛으로 덮여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대기가 정체되면 으레 미세먼지를 걱정해야 하고 화창하게 열린 파란하늘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니 삼한사온(三寒四溫)이 삼한사미(三寒四微), 다시 말해 ‘사흘 춥고 나흘 미세먼지’로 바뀌어 겨울날씨를 일컫는 새로운 공식으로 굳어지고 있다.

낙산은 풍수지리적으로 경복궁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이를 염두에 두었을까. 동대문에서 20여분 성곽을 따라 오르자 마을버스 종점이 있는 정상 약 50여 미터 직전에 ‘左龍亭’이라는 해서체(楷書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성벽에 박혀있다. 아랫대 네터 가운데 한 곳인 좌룡정이 있던 자리다. ‘좌(左)’는 좌(佐)와 뜻이 통하고 용(龍)은 왕(王)을 상징해 좌룡은 바로 왕을 도와준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좌청룡 의미와 같은 맥락이다.

한양도성박물관이 수집한 일제 강점기 제작된 사진엽서에는 3명의 궁사가 같은 위치에서 활쏘기를 하고 있는 모습도 확인된다. 사진엽서에서 만작하고 있는 궁사들은 성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과녁이 설치된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사대 우측은 남산으로 현재는 두타 건물과 DDP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만 도성 안의 활터로 알려진 좌룡정의 사대와 무겁이 도성 밖에 설치돼 있다는 점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당시엔 성벽 안과 밖이 천지차이 아니었던가. 또한 좌룡정이 사정(射亭) 없는 노지(露地)활터라는 인식도 주고 있다.

일부에서 좌룡정 위치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이유다. 현재 바위글씨와 사진엽서 촬영 이전에는 도성 안쪽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도 있다.

▲ 일제 강점기 발행된 좌룡정 활쏘기 사진엽서. <사진=한양도성박물관>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서울의 누정』에서는 “정자는 이미 1907년 이전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1907년 5월10일자 『황성신문』에는 ‘의친왕 전하께서 동문 안 좌룡정 부근에 정자를 방금 세운신다더라’는 기사가 실려 있고 같은 신문 7월10일자에는 내각 서기관 이원용이 자신의 집 후원을 넓히는 과정에서 좌룡정 터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점을 들어 경무청에 경계를 정확하게 해줄 것을 청원하고 있다”는 기록이 근거다.

신문기사만 보더라도 의친왕과 이원용이 도성 밖에 정자와 후원을 만들 가능성은 없어 현재 바위글씨가 남아있는 좌룡정의 위치에 대한 문제제기는 설득력을 얻는다.

좌룡정에서 바라본 서울의 풍광은 고층 빌딩으로 시야가 가로막히긴 했지만 윤기의 시와 같은 조망이 가능했다. 북쪽의 삼각산(북한산)과 남쪽 저 멀리의 한강 물줄기, 서북쪽의 백악산(북악산)과 동쪽의 창을 모아 세운 듯한 인왕산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 이화장이 집어삼킨 이화정…의친왕도 습사
좌룡정 글씨 넘어 성벽 안쪽은 이화동이다. 좌룡정에서 서남쪽 산록에 형성된 이화동 벽화마을은 최근 유명세를 타면서 각종 갤러리와 공방들이 둥지를 틀고 젊은 사람들을 꾸준히 불러들이고 있다.

이곳에는 아랫대 네터 중 또 다른 활터인 이화정(梨花亭)이 있었다. 이화동이라는 명칭도 이화동 2번지에 있었던 이화정에서 유래됐다. 정확한 위치는 광복 직후 귀국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 부부가 거주했던 이화동 1번지 이화장(梨花莊)에 편입된 동쪽 낙산 기슭으로 추정되고 있다.

▲ 1969년 이화장의 모습. <출처=국가기록원>

원래 배밭이었던 이곳은 봄이면 주변이 하얀 배꽃으로 물들 만큼 배나무가 많아 정자의 이름도 이화정이라 했다고 한다.

『서울의 누정』에 따르면 이화정은 세조 때 정승을 역임한 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이 살던 집이었다. 이후 1490년(성종21년) 3월 성종은 이 정자를 사들여 당시 홍문관 응교(應敎)였던 김일손(金馹孫)에게 주었다. 부모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정자를 내려주고 부모를 모시면서도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때 김일손은 바위샘 위에 있는 작은 한 칸짜리 정자에 이화정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정자는 이엉을 얹은 작은 집으로 소박한 규모였으며 정자 이름을 짓고 현판 글씨를 새긴 사람은 당대 시문과 글씨·그림에 탁원한 재능을 보인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이었다. 이화정의 이러한 역사는 김일손의 시문집 『탁영선생문집(濯纓先生文集)』이 전하고 있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사형에 처해졌던 김일손 사후 이화정은 중종 때의 문신인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으로 주인이 바뀐다. 또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박세채(朴世采)의 시문집 『남계집(南溪集)』에 수록된 ‘동호 이화정에 올라 시를 짓다(登東湖梨花亭有作)’라는 시의 자주(自註)에 의하면 이화정은 효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잠저(潛邸) 시절 옛 정자라고 기록돼 있다.

조선 후기의 문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시문집 『문곡집』에 수록돼 있는 ‘동호에서 옛날 감회를 읊다(東湖感舊)’라는 시에도 이화정이 등장한다.

梨花亭下泛仙舟 이화정 아래 신선 타는 배를 띄우고
每憶蓬山五子遊 봉래산 다섯 벗과 노닒을 늘 추억했지
陳跡十年渾似夢 옛 자취가 십 년 만에 온통 꿈결 같아
獨來惆悵倚江樓 홀로 와서 서글퍼 강가 누각에 기대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도 이화정에 머물면서 경치에 매료돼 이화정에서 즐길 수 있는 10가지 경치를 ‘십경시(十景詩)’로 남기기도 했다.

▲ 의친왕의 이화정 습사를 기사화한 1908년 5월31일자 『대한매일신보』.

이화정은 일제 강점기 직전까지만 해도 활터로서의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31일자에는 “의친왕이 영선군 이준용과 승령부 총관 조민희를 대동하고 동대문 안 이화정에서 활을 쏘았다”고 전한다.

또한 1908년 7월4일자 『황성신문』에 따르면 이화정에서 활쏘기 행사가 벌어졌는데 이를 구경하던 공업전습소 학생 한 명이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李埈鎔)이 쏜 화살에 맞아 대한의원에서 치료했지만 끝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준용은 대한의원에 치료비 500환만 냈을 뿐 학생 가족에게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사라져 버린 이화장은 현재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내부로 들어가 흔적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했지만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 1935년 『조선일보』에 사라져 버린 이화정에 대한 아쉬움을 절절하게 적은 문일평의 ‘근교산악사화(近郊山岳史話) 낙타산-이화정과 일옹정’ 기사.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은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근교산악사화(近郊山岳史話)’에서 사라져 버린 이화정에 대한 아쉬움을 절절하게 적었다.

“…신대(申岱) 우물의 남쪽으로 낙산을 끼고 내려가다가 이화동 2번지에 다닥치면 수장(數丈)의 거암(巨岩)이 우뚝 서서 있고 그 거암 밑에는 한줄기 청천(淸泉)이 솟아나는데 여기가 곧 노래로 시(詩)로 많이 읊던 명소인 이화정 터이란다. 이 이화정은 본디 그 주인이 누구인 것과 또는 그 창건이 언제된 것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지마는 그것이 오랜 것만은 추찰할 수 있다.
…(중략)…
이화정 터가 황량하게 된 오늘날도 오히려 암석의 미와 천수(泉水)의 청(淸)이 사람을 족히 끌만큼 되어 있거늘 하물며 이수(梨樹)를 많이 심어 꽃의 염려(艶麗)한 것까지 아울러 있던 옛날 이화정은 얼마나 훌륭한 명소가 되었겠는가. 지금 앉아 그 시를 보고 그 경(景)을 생각만 해도 이화정이 화취(畵趣)에 부(富)한 명소임을 수긍하게 한다. 그러나 현재에는 웬심인지 정사(亭榭) 있던 자취조차 남아 있지 아니하며 그 인근의 고로(故老)에게 물어야 아는 이 드물고 그 암석 위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고용운당대선사(故龍雲堂大禪師) 병인이월십팔일 입적 도제 기선 등(丙寅二月十八日入寂 徒弟 基瑄 等)’ 문자를 새긴 것이 있을 뿐이더라.” <조선일보 1935년 10월29일자>

◇ 도성 안 27개 활터 중 유일하게 현존
아랫대 네터 중 좌룡정·이화정과 함께 낙산 줄기에 있었다는 화룡정(華龍亭)은 어디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마지막 활터인 석호정(石虎亭)은 도성 안 27개 활터 가운데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현존하는 활터다.

국립극장에서 남산나들길을 따라 10여분을 걷다보면 왼쪽으로 무겁에 내걸린 풍기가 시야에 들어오고 곧이어 석호정 사정(射亭)에 이른다. 국립극장을 대각선으로 횡단해 공연예술박물관 뒤쪽에 설치된 계단을 이용하면 걷는 거리를 줄일 수 있다.

평일이지만 나흘 연속 발령됐던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가 해제된 영향인지 사대에는 몇몇 사원들이 습사를 하고 있었다. 평소 안면이 있던 연세대 국궁부 학생들도 방학을 맞아 무리를 지어 습사를 나왔다고 아는 체를 한다. 최종식 사범은 “평일에는 30~40명 정도 습사를 하지만 주말에는 100여명 안팎이 몰려 사대에 다 올라가지 못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 석호정에서는 2개월 과정으로 일반인들에게 국궁을 가르치고 있다. 교육수료생은 연간 120~150명 정도라는 게 최 사범의 말이다. 교육수료 후에는 사원(射員)으로 입사(入射)하지 않더라도 일일 이용권을 구입해 활을 낼 수 있다. 골프장으로 치면 회원제인 타정과 달리 석호정은 퍼블릭인 셈이다.

석호정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 전 즈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6년 제작된 <석호정중수기(石虎亭重修記)>에는 “처음 창간한 기록은 알 수 없으니 장충단 뒤 산기슭에 십팔기옛터가 있어서 1897년 광무원년(고종32년) 정유(丁酉) 7월15일에 뜻있는 여러분들이 협력하여 이 정을 창건하였다”고 중건 기록만 전하고 있다.

▲ 1956년 제작된 <석호정중수기(石虎亭重修記)>. <사진=한정곤 기자>

석호정 사원들은 지난 2000년 총회에서 1929년 발간된 『조선의 궁술』에 임란 이후 민간사정의 시초가 만들어지고 인조조에 번창해 지금까지 남은 오랜 사정(古亭) 중 하나가 아랫대 석호정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1630년 창건된 것으로 결의했지만 역사적인 고증이 불가능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현존하는 민간 사정 가운데 가장 오래된 활터 중 하나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확인 가능한 석호정의 기원은 <석호정중수기>에 기록된 1897년 장충단 뒤 산기슭에서부터 시작된다. 지난 2012년 출간된 나영일 서울대 교수의 『우리 활터 석호정』에서는 『조선의 궁술』에 기록된 아랫대(下村)를 지금의 남산골로 해석하며 석호정이 조선시대부터 남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아랫대 네터 중 석호정을 제외한 좌룡정, 화룡정, 이화정은 모두 낙산에 둥지를 틀고 있던 활터라는 점에서 아랫대의 영역을 좀 더 넓게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36년 간행된 『경성부사』 제2권에서도 아랫대가 오늘날 훈련원 공원에서부터 동남쪽이라고 적고 있다.

“고래(古來)로 상대(上臺:웃대), 하대(下臺:아랫대)라는 말이 있는데 전자는 서리(胥吏)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야마노테(山の手)에 비견되며 주로 현 청운동(靑雲洞)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가리키며, 후자는 하급무관(下級武官)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현 훈련원(訓練院)부터 동남방면을 가리키며 시타마치(하정(下町)에도 비견될 만하다.”

당시 훈련원은 오늘날 국립의료원 서쪽에 설치돼 있었다. 따라서 넓게 해석하면 낙산에서 남산 동쪽 산기슭에 이르는 성곽 안쪽이 아랫대로 추정되고 있다. 다시 말해 1897년 중건 이전에는 석호정의 위치가 남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고증되지 않은 추측일 뿐이다.

▲ 석호정 사정(射亭)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현재로선 중수기에 기록된 장충단 뒤 남소영(南小營) 소속 십팔기군(十八技軍)이 훈련하던 십팔기옛터를 석호정의 최초 위치로 삼을 수밖에 없다. 남소영은 조선시대 어영청(御營廳) 소속 수도방위 5군영 중의 하나였으며 194칸의 대규모 청사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1894년 갑오경장과 함께 폐지되고 수많은 전각들도 모두 사라진 채 고종 당시에는 남쪽 기슭에 백운루(白雲樓)만 남아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석호정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십팔기옛터에 중건한 사정이 소실되자 1956년 배운루를 고쳐 명맥을 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1969년 남산3호터널 공사로 헐리자 1970년 현재 국립극장 뒤편으로 옮겨왔다.

석호정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2008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내건 남산르네상스의 희생양이 될 뻔한 것이다. 다행히 무상급식 찬반투표로 오 전 시장이 중도 사퇴하면서 석호정은 현재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바위호랑이’라는 뜻이 담긴 석호정 현판은 『사기(史記)』 <이장군전(李將軍傳)>에 나오는 말로 중국 한나라 때 장수 이광(李廣)과 관련이 있다.

키가 크고 팔이 길어 활을 매우 잘 쏘았던 이광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가 풀 속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온 힘을 다해 명중시켰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바위덩이였다. 그런데 화살촉은 바위 속까지 깊이 박혀 있었다. 이광은 활을 쏘았던 자리로 돌아가 다시 활을 쏘았지만 이번에는 화살이 바위에 꽂히지 않고 튕겨 나왔다.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고 성심으로 행동하면 생각 밖의 힘이 발휘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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