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 독하기가 마치 독사와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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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 독하기가 마치 독사와 같구나”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9.01.31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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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㊾

[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㊾

[한정주=역사평론가] 堪歎人心毒似蛇(감탄인심독사사)니 誰知天眼轉如車(수지천안전여거)요 去年妄取東隣物(거년망취동린물)하더니 今日還歸北舍家(금일환귀북사가)라 無義錢財湯潑雪(무의전재탕발설)이요 儻來田地水推沙(당래전지수추사)니라 若將狡譎爲生計(약장교휼위생계)면 恰似朝開暮落花(흡사조개모락화)라.

(한탄스럽다. 사람의 마음 독하기가 마치 독사와 같구나. 누가 알겠는가. 하늘의 눈이 마치 수레처럼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작년에는 망령되게 동쪽에 사는 이웃집의 물건을 빼앗아 오더니 올해에는 다시 북쪽에 사는 이웃집으로 돌아가는구나. 의롭지 않은 금전과 재물은 끓는 물에 눈을 뿌리는 것이나 다름없고, 뜻밖에 얻은 논밭은 물에 밀려온 모래나 다름없다. 만약 교활한 속임수로 생계를 삼으려고 한다면 흡사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과 같을 것이다.)

옛말에 ‘가혹한 관리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사마천은 『사기』에 가혹함과 포악함으로 악명을 떨친 관리 열두 명에 관해 기록한 <혹리열전(酷吏列傳)>을 남겼다.

필자가 볼 때 이 열두 명의 관리 중 가혹함과 포악함으로 평가하자면 한나라 무제 때 사람인 왕온서가 단연 으뜸이다. 그는 자신의 관직을 이용해 독사나 사나운 매처럼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핍박·수탈했고, 의롭지 않은 더럽고 부정한 방법으로 천금의 재물을 모아 마음껏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렇다면 그의 말로(末路)는 과연 『명심보감』의 말처럼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처럼 허망하고 비참했을까. 아니면 악행과 악명에도 죽을 때까지 권세를 부리며 호사스럽게 살았을까.

왕온서는 젊었을 때 다른 사람의 무덤을 도굴하는 간악한 도적이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고향인 양릉현(陽陵縣)의 관리가 되었다.

그는 도적을 잘 잡아들여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광평군(廣平郡)의 도위가 되었다. 특히 10여명에 이르는 자신의 심복을 잘 부려 잡고 싶은 도적을 마음대로 부렸다.

그런데 도적을 잡아들인 다음 자신을 만족시켜주면 백 가지 죄를 지었다고 해도 처벌하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과거의 죄까지 찾아내 죽이고 심지어 그 일족까지 몰살시키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천하의 도적들이 광평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고, 그곳의 백성들은 길에 떨어진 물건도 함부로 줍지 않았다.

이렇게 왕온서에 대한 소문이 천하에 가득 퍼지자 결국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황제는 왕온서의 유능함을 크게 칭찬하고 하내군의 태수로 승진시켰다.

하내군에 부임한 왕온서는 그곳의 부와 권세를 거머쥐고 있던 호족과 그들과 연좌되어 있는 1000여 가구를 체포해 처벌했다. 한나라 때는 법령에 따라 대개 입추(立秋)가 지난 후부터 입춘(立春)이 오기 전까지만 사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로 자신의 권세와 위엄을 부리는 것을 좋아했던 왕온서는 겨울을 한 달만 더 늦춰 입춘이 더 늦게 오게 한다면 더 많은 사형을 집행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하는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왕온서가 가혹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면 다스릴수록 유능한 관리라는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갔다. 백성들에게는 ‘혹리(酷吏)’였지만 황제와 관리들에게는 ‘능리(能吏)’였던 셈이다.

왕온서의 유능함(?)에 반한 황제는 결국 그에게 수도 치안을 담당하는 중위(中尉)라는 중책을 맡겼다. 중위가 된 후 왕온서의 포악함과 잔혹함은 극도에 이르렀다. 그는 권세가 있는 사람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모른 척하고, 권세가 없는 사람은 신분과 지위를 가리지 않고 욕을 보이고 재물을 갈취했다.

왕온서의 행실이 이렇다 보니 그 밑에서 일하는 관리들 역시 마치 사람의 탈을 쓴 호랑이나 늑대처럼 포학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핍박하고 갈취해 모두 엄청난 부를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의 눈에 들었을 때는 승승장구하던 왕온서도 황제의 눈 밖에 나자 관직과 권세를 잃고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지난날 왕온서의 악행에 마음속에 원망과 보복할 마음을 가득 품고 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그가 뇌물을 받았다느니, 간사하고 탐욕스러운 일을 했다느니,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느니 하는 등의 고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이 고발한 그의 죄목은 멸족에 이르는 죄였기 때문에 왕온서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이때 그의 집안사람들 역시 죄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결국 멸족의 형벌을 받았다.

당시 왕온서가 쌓은 악업과 지은 죄목이 얼마나 많았던지 삼족(三族)을 멸하는 형벌로도 모자라 오족(五族)을 동시에 멸하는 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왕온서가 죽고 난 후 그의 집을 수색해보니 그 재산이 무려 천금이나 쌓여 있었다고 한다.

왕온서는 『명심보감』의 구절처럼 작년에는 이 집의 재물을 갈취하고 올해는 저 집을 재물을 갈취하며 의롭지 않은 방법과 수단으로 금전을 쌓고, 교활한 속임수 등의 악행과 악업으로 생계를 삼아 엄청난 권세와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권세와 부귀는 결국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이나 다름없는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에 불과했다. 악행과 악업으로 쌓은 권세와 부귀 때문에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왕온서와 연루된 오족(五族)이 모두 멸문에 이르는 재앙을 맞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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