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징조…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정시(討逆庭試)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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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징조…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정시(討逆庭試) 사건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09.17 0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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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읽기>① 영조의 ‘콤플렉스’와 사도세자의 비극

◇ 글 싣는 순서
① 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이유는?
② 재앙의 징조…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정시(討逆庭試) 사건
③ 세자, 노론의 일당 독재에 맞서다!
④ 노론, 마지막 승부수를 걸다 - 나경언의 고변
⑤ 영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⑥ 영조와 노론이 빚은 최악의 참극 - “권력과 왕위(王位)는 천륜(天倫)보다 우선 한다!”

 
[한정주 역사평론가] 영조가 세자의 대리청정을 결정할 당시만 해도 재앙의 낌새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세자의 기품이 뛰어나다”는 영조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대리청정에 나선 세자의 업무 능력이나 정치적 행보 또한 크게 흠잡을 곳이 없었다.

영조와 세자 사이를 갈라놓을 대립과 충돌의 조짐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재앙의 징조가 싹트기 시작한 때는 언제부터였을까?

세자가 대리청정을 한 지 6년째 되는 1755년(영조 31년) 2월4일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은 한 장의 장계(狀啓)가 도착했다.

전라 감사 조운규가 올린 이 장계에는 나주 객사에 내걸린 ‘흉서(凶書)’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곳에는 영조와 노론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비난의 글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간신(奸臣)의 무리가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이려고 하니 백성들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

장계를 살펴본 영조는 즉시 좌포장 구선행과 우포장 이장오 그리고 전라 감사에게 기한을 정해 범인을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당시 영조가 이토록 신속하게 대처한 까닭은, 이 사건이 지난 무신년(1728년) ‘이인좌의 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노심초사했다. 탕평 세상을 열었다고 자부한 자신의 치세에 큰 흠집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전라 감사의 장계가 올라온 지 7일이 지난 2월11일 마침내 ‘흉서 사건’의 주모자가 체포되었다. 범인은 윤지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영조 즉위 초 소론 강경파로 처형당한 김일경과 함께 역적으로 몰려서 고문을 당하다 죽은 윤취상의 아들이었다.

당시 윤지 역시 연좌죄에 걸려 제주도와 나주를 전전하며 30여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인좌의 난 이후 잠잠하던 소론 강경파가 다시 한 번 영조에게 반격을 가한 셈이다.

영조는 큰 충격에 빠졌다. 당습과 당론을 조정해 탕평 정국을 열었다고 자부했던 지난 시절의 공력(功力)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가 싶은 마음에 괴로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이 영조가 그토록 감추고자 노력했던 ‘과거의 콤플렉스’를 다시 들추어냈다는 사실이다. 윤지와 사건 연루자들을 국문(鞠問)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영조가 경종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역적에 불과하다는 심경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영조는 30여년이 지난 그 순간까지 여전히 ‘이복형을 독살하고 왕위를 찬탈한 노론 당적의 천민(賤民) 출신 임금’이라는 비난과 의혹이 사그라들지 않았음을 확인하고서는 반미치광이처럼 행동했다.

이 사건이 불러일으킨 파장은 엄청났다. 사건에 연루된 소론계 인사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유배형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조와 노론은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소론 온건파의 조태구, 이광좌, 조태억 등에게도 역률을 적용하거나 삭탈관작에 처했다. 이미 사망한 이들 소론 온건파의 영수에게까지 형벌을 내린 까닭은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노론은 이 사건을 기회삼아 소론 세력 전체를 역적으로 몰아 조정에서 완전히 축출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영조는 당론을 조제해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탕평’의 의지를 사실상 포기하고 노론 일당 독재의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소론에 대한 처참한 살육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영조는 그해 5월2일 나주 벽서 사건의 역적 토벌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춘당대에서 ‘토역정시(討逆庭試)’를 개최했다. 그런데 이 과거시험장에 제출된 시권(試券 : 답안지) 가운데 영조와 노론의 패악(悖惡)한 행위를 비난한 글이 있었다. 영조는 시권의 작성자를 즉시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이때 잡혀온 사람은 지난 시절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심성연․심익연의 동생인 심정연이었다. 더욱이 그를 국문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건의 전모에 영조는 더욱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주 벽서 사건을 일으킨 윤지의 숙부인 윤혜와 소론 강경파를 이끌다 영조 즉위 초 처형당한 김일경의 종손 김도성이 함께 모의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한 윤혜가 춘천에서 군사를 모아 거병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나주 벽서 사건 이후 잇따른 옥사(獄事)를 간신히 피한 소론 강경파 세력이 전력(全力)을 정비해 다시 영조와 노론에게 반격을 가하려고 했던 것이다. 자칫 이인좌의 난이 재발할 수도 있었음을 확인한 영조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단적인 사례로 5월6일 윤혜를 처형할 때 영조가 보여준 행동을 살펴보자. 이날 영조는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토벌이라도 하는 듯 갑옷을 입고 숭례문의 누각에 올라가 대취타(大吹打 : 대규모 군악)하면서 윤혜를 처형했다. 더욱이 처형당한 윤혜의 수급을 깃대 끝에다 매달도록 한 다음 그 자리에 있는 백관(百官)에게 여러 차례 조리 돌리도록 하는 끔찍한 행위까지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이 참혹한 광경을 『영조실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때 임금이 이미 크게 노한 데다가 또 아주 취해서 윤혜의 수급을 깃대 끝에다 매달도록 명한 다음 백관에게 여러 차례 조리 돌리게 하고 이렇게 말했다.
‘김일경과 목효룡의 생각을 품은 자는 나와서 엎드리라.’
이에 승지 채제공과 교리 홍명한 등이 간하니 중지하였다. 임금이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가 취해 드러누웠는데, 밤이 어두워지도록 취타는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날이 샐 무렵에야 임금이 비로소 소차를 나와 취타를 그치게 하고, 갑옷을 입은 채 환궁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31년(1755) 5월6일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주 벽서 사건이나 토역정시(討逆庭試)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소론 온건파들 역시 죽음의 공포 앞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영조의 분노와 노론의 정치 공세에 자칫 소론은 씨가 말라 버릴 수도 있었다.

이제 소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동안 소론이 지켜온 모든 당론(黨論)과 당습(黨習)을 버리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 다음 영조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 일에 앞장선 사람은 효장세자빈의 오빠 조재호였다. 그는 영조에게 대처분(大處分)을 행하도록 권한 다음 여러 소론에게는 스스로 과거의 잘못과 앞날의 일을 변명하도록 했다. 조재호는 훗날 노론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도세자가 마지막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던 소론의 거두다.

여하튼 영조의 분노와 노론의 공세 앞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내몰린 소론의 인사들은 앞 다투어 참회와 반성과 충성맹서를 했다. 이때의 우스꽝스러운(?) 광경은 이건창이 지은 『당의통략』에 잘 묘사되어 있다.

“서로 이어 혹은 연명으로 혹은 단독으로 상소를 올렸다. 혹은 조태구와 유봉휘 등에게 형벌을 더해야 한다고 청하고, 혹은 이광좌와 조태억 등을 추탈하자고 청했다. 혹은 일찍이 전날 당습(黨習)에 가리워졌다고 스스로 꾸짖고, 혹은 밖에 있었고 늙고 병들어서 곧바로 징토(懲討)하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혹은 ‘꿈에서 비로소 깬 것과 같다.’고 이르고, 혹은 ‘술 취한 것이 방금 깬 것과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영조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미 당론을 포기하고 자신에게 굴복한 소론의 행동이 기꺼웠던지 영조는 “해동(海東)에 하늘과 땅이 다시 밝아졌다. 모든 신하들이 이와 같다면 내가 다시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소론은 더 이상 소론일 수 없었다.

영조는 그해 11월 『천의소감(闡義昭鑑)』을 편찬해 그동안 자신의 과거사, 곧 경종 시절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둘러싼 소론의 당론(黨論)을 혁파하고 노론과 자신의 행동이 충심(忠心)에서 우러난 것이었음을 최종 확인했다.

이것은 경종 이후 수 십 년간 이어져 온 노론과 소론의 당쟁(黨爭)에 대해, 영조가 노론의 ‘완승’과 소론의 ‘완패’를 판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온갖 의혹과 비난 때문에 오히려 소론까지 끌어안는 ‘탕평 정국’을 유지했던 영조는 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정시 사건을 계기로 그러한 비난과 의혹을 ‘피의 숙청’으로 단숨에 제압해버렸다. 그런 다음 노골적으로 노론의 당론(黨論)과 행동만이 정당하다는 입장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노론과 소론의 당습과 당론을 조정해 온 ‘탕평의 군주’에서 노론과 생사(生死)를 함께 해온 ‘노론 당적의 임금’임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밝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노론의 당론과 당습이 아닌 말과 행동은 조정에서 발을 붙일 수 없었다. “모든 신하들이 이와 같다면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는 영조의 칭찬은 곧 노론처럼 말하고 노론처럼 행동하라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영조는 이제 노론만을 ‘국정의 파트너’로 삼았고, 노론은 이제 그토록 소망해온 ‘일당 독재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스스로 원했든 혹은 원하지 않았던 간에 ‘모든 신하’들이 인정한 이러한 정치 상황을 결코 수긍할 수 없었던 단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다름 아닌 당시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세자였다는 것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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