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花潭) 서경덕② 소박하고 깨끗한 삶만큼 고요하고 담백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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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花潭) 서경덕② 소박하고 깨끗한 삶만큼 고요하고 담백한 죽음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09.18 0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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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⑯

 

▲ 화담은 개성의 오관산(사진) 기슭으로 서경덕이 화담 가에 집을 짓고 평생을 거처한 까닭은 그만큼 화담의 자연 풍경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한정주=역사평론가] 서경덕은 독특한 학풍(學風)과 여러 기행(奇行)으로 이황·조식·이이와는 또 다른 학문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정통 성리학과는 다소 거리를 둔 유학 해석과 학문 방법으로 명성을 떨쳤다.

먼저 서경덕은 성리학의 정통 학설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는 다른 기(氣)를 중시하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학설을 주장하였다. 하나의 원기(元氣)를 철학의 근본 주제로 삼아 “기(氣)는 우주공간에 충만해 있으며, 태허(太虛)란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것(空無)이 아닌 기(氣)의 본체(本體)를 말한다”는 독특한 주장을 내놓았다.

또한 기(氣)로 충만한 우주공간에서 양기(陽氣)와 음기(陰氣)의 움직임을 주재(主宰)하는 것은 리(理)이고, 리(理)는 기(氣)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제시했다.

좀 더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성리학의 정통 학설인 ‘이기이원론’은 만물의 변화하지 않는 본질을 리(理)와 변화하는 현상태를 기(氣)로 나누어 보는 반면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은 기(氣)가 만물의 본체(本體)이고 리(理)는 기(氣)와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좀 무리는 있지만 서양철학의 관점에 따라 리(理)를 관념, 기(氣)를 물질로 개념지운다면 성리학의 ‘이기이원론’은 관념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서 관념인 리(理)가 물질인 기(氣)의 주재자(主宰者)라고 보기 때문에 물질을 관념보다 중시하는 ‘관념론’ 철학이라고 한다면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은 물질인 기(氣)를 만물의 본체로 보고 이기(理氣)를 일체(一體)로 본다는 점에서 ‘유물론’ 철학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 때문에 서경덕의 철학에 유물론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이황과 이이는 일찍부터 “그는 유학의 정통이 아니다”거나 “서경덕의 학문은 (정자(程子)나 주자(朱子)가 아닌) 장횡거(張橫渠)에게서 나왔다”고 하면서 경계했다.

어쨌든 서경덕은 조선의 철학사에서 유물론적 성향을 지녔던 아주 희귀한 유학자였다.

또한 서경덕은 학문하는 방법에서도 정통 성리학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성리학의 태두인 주자의 학문 방법은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면 앎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독서(讀書)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하면 마침내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서경덕은 18세 때에 이미 독서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방법을 부정하고, 먼저 궁리와 사색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직접 탐구한 후 독서를 통해 확인하는 방법으로 학문을 했다.

이러한 서경덕의 독특한 학문 방법은 훗날 국가 차원에서 역대 임금의 업적 중 선정(善政)만을 모아 편찬한 편년체 사서인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자세하게 실릴 만큼 ‘서경덕 식 공부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시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화담(花潭) 가에 집을 짓고 도의(道義) 공부에 온 마음을 쏟았다. 그 학문은 오직 궁리(窮理)와 격물(格物)로 하고 더러 묵묵히 여러 날 앉아 있곤 했다. 그가 궁리를 일삼아 하늘의 이치를 궁구할 때에는 벽에 ‘천(天)’자를 써놓고 연구에 몰두했다. 이미 궁구한 다음에는 다시 다른 글자를 적어놓고 정성껏 생각하고 힘써 연구했는데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 여러 해 동안 이렇게 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하게 밝히고 꿰뚫은 후에야 독서하여 스스로 터득한 것을 증명했다. 항상 ‘나는 스승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공력(功力)을 소모해 지극히 깊은 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나의 말에 의거(依據)한다면 나와 같은 수고로움을 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국조보감』, ‘선조조 3’ 8년(을해 1575년)

서경덕이 화담 가에 집을 짓고 살게 된 이유는 그의 부모님의 무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젊은 시절 삼남(三南) 지방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고 다녔을 만큼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했다. 서경덕의 제자였던 초당(草堂) 허엽은 “화담선생은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문득 일어나서 춤을 추곤 하셨다”고까지 말했다.

아마도 서경덕이 화담 가에 집을 짓고 평생을 거처한 까닭 역시 그만큼 화담의 자연 풍경이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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