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花潭) 서경덕③ “소강절(邵康節)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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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花潭) 서경덕③ “소강절(邵康節)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09.19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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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⑯

 

▲ 황해도 개성시 용흥동 오관산 남쪽에 자리한 화담 서경덕 묘.

[한정주=역사평론가] 서경덕이 세상을 떠난 후 황폐해져 쓸쓸한 기운마저 감도는 화담의 옛 터를 찾은 또 다른 명사 오음(梧陰) 윤두수는 서글픈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화담(花潭)을 지나다가 감회가 있어서’라는 시 한 편을 남기기도 했다.

“봄은 가고 꽃조차 흔적 없고 / 토사는 무너져 못 또한 묻혔네 / 아름다운 이름이란 참으로 어떤 물건인가 / 세상사는 과연 누가 진실인가 / 옛집에는 주인 잃은 신발만 흩어져 있네 / 앞들에는 물만 저절로 새로 나고 / 이리저리 서성이며 떠나지를 못하는데 / 산에 내리는 비가 윤건(輪巾)을 적시네.” 『오음유고(梧陰遺稿)』, ‘화담(花潭)을 지나다가 감회가 있어서(過花潭有感)’

서경덕의 덕망과 행적을 사모해 화담을 찾아갔던 성혼과 윤두수는 쓸쓸하게 버려진 집터와 이리저리 흩어진 삶의 옛적 흔적만 보고 서러운 마음을 달래다 돌아왔다.

그렇지만 1601년(광해군 1년) 이후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잘 가꾸어진 정자와 누대, 연못의 섬, 언덕 등 전혀 다른 모습의 화담을 볼 수 있었다. 1601년 홍이상이 지방의 선비들과 발의(發議)하여 화담의 옛터에 ‘화곡서원(花谷書院)’을 세우고 서경덕과 그의 제자인 박순, 허엽, 민순 등을 함께 배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라고 일컬어지는 월사(月沙) 이정구가 지은 ‘화담기(花潭記)’에서는 성혼의 글과 윤두수의 시와는 전혀 다른 흥겹고 생동감이 넘치는 화담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신숭(神崧)에서 내려와 자하동(紫霞洞)을 들렀다가 잠깐 쉬었다. 홍이상이 서찰을 보냈는데 ‘화담(花潭)은 물과 바위가 매우 맑고 빼어납니다. 산의 꽃이 바야흐로 한창입니다. 강인경 또한 오관산으로부터 온다고 약조했습니다. 속히 오셔서 함께 구경하고 한바탕 승경(勝景)을 유람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미 먼저 와서 화담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아직 여흥(餘興)이 다 하지 않아서 이 서찰을 읽고 즐거워 견여(肩輿) 행렬을 재촉했다. 산기슭을 돌아 고성(古城)을 벗어나 탄현(炭峴)을 넘었다. 두 개의 산이 갈라져서 동문(洞門)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럭바위가 1리 가량 이어져 있고, 큰 개울이 급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치 위로 삼베를 하얗게 펼친 듯해 맑고 고운 광경에 눈이 번쩍 뜨였다.

가마를 멈추고 바라보고 있자니 한 유생(儒生)이 앞으로 다가와 절을 하면서 ‘마침 술이 있어서 계곡 가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께서 잠깐 머물러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사냥하는 자가 호령을 하니 매가 날아갔다. 잠시 후 매가 앞 숲에서 꿩을 낚아챘다. 이윽고 사냥하는 자가 꿩을 우리에게 바쳤다.

내가 가마에서 내려 바위 위에 앉자 경력(經歷) 윤후가 따라서 앉았다. 내가 ‘여기가 어디인가? 송도의 기이한 경치가 여기에 다 있구나. 아까 유생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이와 같이 맑고 고운 산과 계곡을 놓치고 지나쳐 평생 한(恨)을 짊어질 뻔 했네’라고 하였다.

이에 윤후가 ‘이곳은 귀법사(歸法寺)가 있던 옛터입니다. 계곡 가에 돌기둥이 물 위에 걸터앉은 채 아직도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 ‘여기가 최충이 더위를 피한 곳이고, 이규보가 ‘옛 서울을 떠올리며(憶舊京)’라는 시에서 ‘옛적 나라가 황량하니 어찌 차마 생각할까 / 차라리 모두 잊고 짐짓 바보가 되는 편이 낫겠네 / 오로지 한 가지 남아 정(情)이 가는 곳이 있으니 / 귀법사 개울가에 웅크리고 앉아 술잔을 보내네’라고 읊은 그곳인가?’라고 하였다.

 

▲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 월사(月沙) 이정구의 문집 『월사집』. 흥겹고 생동감 넘치는 화담의 풍경을 묘사한 ‘화담기(花潭記)’가 실려있다.

옛사람도 이미 정(情)이 끌렸다니, 참으로 그 명성이 헛되이 얻어진 곳이 아니었다. 이에 옷을 벗고 맑게 흐르는 물에 발을 씻었다. 유생이 술과 안주를 벌여놓고 사냥하는 자가 꿩고기로 회를 쳤다. 흥취가 일어나 술잔 가득 술을 붓고 마시다보니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흠뻑 취해버렸다. 화담에 있던 홍이상이 여러 사람을 보내 빨리 오라고 재촉했지만 오히려 그곳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해질 무렵에야 비로소 화담에 다다랐다. 화담은 서경덕선생의 옛 거처가 있는 곳이다. 홍이상이 많은 선비들과 뜻을 도모해 그 땅에다가 서원(書院)을 세우고 향사(享祀)하였다. 정자와 누대, 연못의 섬과 언덕 등은 모두 인공으로 예쁘게 꾸며 단장한 것이라고 하였다. 산에는 두견화(杜鵑花 : 철쭉)가 많아서 못의 물에 붉게 비치니, 화담(花潭)이라는 이름은 이로 인해 얻게 된 것이라고 한다.

두 개의 산이 담벼락처럼 서 있고, 물은 원통사(圓通寺)에서부터 여러 골짜기로 나뉘어 흐르다가 큰 개울을 이루어 화담으로 떨어지는데 그 물소리가 우렁찼다. 못 위로는 바위들이 쭉 늘어서 있다. 그 가운데 우뚝 솟아 가장 높고 큰 것은 백 명의 사람이 앉아 있을 만 했다.

화담의 서쪽에는 우묵한 구역이 있는데 땅이 그윽하고 맑았다. 여기에 흙을 쌓고 누대를 만들어 사람들이 연회를 열 수 있도록 했다. 앞의 좌우 절벽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숲을 이루며 자라고 가느다란 샘물이 떨어져 내렸다. 누대의 아래로는 물이 또한 띠처럼 빙 둘러 있고, 겹겹의 모래톱을 만들어 얕은 여울을 이루고 굴곡진 물굽이를 이루었다. 어느 것 하나 기이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주인이 자리를 설치해 여러 악기를 번갈아 연주하자 그 소리가 온 숲을 진동하였다. 나는 몹시 즐거워서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서로 주고받으면서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술을 마셨다. 취한 후 돌을 베개 삼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고인(古人)과 더불어 노닐었다. 이 고인(古人)이 어쩌면 서경덕 선생이 아닐까? 이러한 이야기를 글로 써서 기록한다.” 『월사집(月沙集)』, ‘유화담기(遊花潭記)’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연간에 ‘풍웅고화(豊雄高華)’한 시풍(詩風)으로 일세를 풍미한 오산(五山) 차천로는 송도십이경(松都十二景)의 하나로 ‘화담(花潭)의 송월(松月)’을 꼽으면서 화담에 아로새겨져 있는 서경덕의 혼과 얼을 한 점 티 없이 맑게 비추는 ‘빙호(氷壺)’에 비유해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백석암(白石巖) 사립문 푸른 이끼 길게 자라 / 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고 새들은 빙빙 날아도네 / 문 앞의 늙은 나무 선생의 버드나무요 / 울타리 아래 떨어진 꽃 처사(處士)의 매화이네 / 신선은 학을 타고 어느 곳으로 가버렸나 / 지금도 송월(松月)은 사람 찾아와서 비추는데 / 밝게 드러난 마음은 오직 맑은 못의 물에 있네 / 그 모습 보고 한 조각의 빙호(氷壺)를 상상하네.” 『오산집(五山集)』, ‘화담의 송월’

이렇듯 서경덕이 거처한 후 ‘사상의 본향’ 중 하나로 변모했던 화담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사림의 이름 높은 학자와 문사(文士)들이 즐겨 찾는 ‘사상과 시문학의 순례지’로 명성을 떨쳤다. 화담이라는 자연과 서경덕이라는 대학자가 결합되면서 화담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넘어서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과 문학의 산실 가운데 하나로 거듭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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