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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잃은 궁궐의 현존 유일 활터…창경궁 관덕정[활터 가는 길]⑨ 역사가 감춘 오직 임금 한 사람만을 위한 사정(射亭)
한정곤 기자  |  jkhan@iheadlin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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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22  09:5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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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동북쪽 언덕의 관덕정. <사진=한정곤 기자>

[활터 가는 길]⑨ 역사가 감춘 오직 임금 한 사람만을 위한 사정(射亭)

북상하는 봄꽃들의 아우성이 지천이다. 날선 봄바람은 겨울옷에 대한 미련을 붙들지만 도처에 흐드러진 꽃들은 다투어 제철을 맞이한다. 심술궂은 봄비가 훑고 간 궁궐은 구름 낀 하늘이 무색하리만치 말끔하게 단장이라도 한 듯 선명한 자태를 드러낸다.

봄의 경치를 만끽할 수 있는 상춘(賞春)의 장소로 궁궐만큼 호사스런 곳이 또 있을까. 수백 년 전 궁궐의 주인이었던 조선의 왕들이 그랬듯 느릿느릿 재촉하지 않은 소걸음으로 울퉁불퉁 박석(薄石) 하나하나 밟아가며 주변 수목에 매달린 꽃들을 탐미하는 여유는 봄날 궁궐 산책에서만 누릴 수 있는 묘미다.

전각과 전각을 잇는 소로(小路)에는 듬성듬성 진달래꽃이 활짝 웃고 연못가에 축 늘어진 능수버들은 봄날 오후 햇살을 받아 춘곤증을 감추지 못한다. 몇 그루 남은 벚나무가 얼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 역시 지나간 역사의 한 페이지일 뿐이다.

누군가 동행이 있으면 있는 대로, 또 없으면 없는 대로 나름의 맛도 다르다. 그러나 홀로 궁궐의 봄을 걷기에는 가을 단풍구경과 달리 어쩐지 처량하다. 봄은 떠들썩해야 맛이고, 가을은 호젓해야 맛이 아닌가.

   
▲ 춘당지에서 본 관덕정은 숲속에 가려있다 . <사진=한정곤 기자>

햇살 좋은 4월 초순의 오후 창경궁 꽃놀이에 동행한 신선미·이지후 여무사의 들뜬 표정은 영락없는 봄처녀다. 뒤따라오는 최문구·김종민 접장도 봄을 단단히 희롱하겠다는 기대와 각오를 다진다. 학창시절의 창경원을 기억한 신선미 여무사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궁궐의 달라진 풍광이 오히려 낯선 모양이다. 초등학교 시절 봄소풍 이후 처음이라는 최문구 접장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창경궁의 봄을 있는 그대로 만끽하기엔 어딘가 가슴 한 구석에서부터 아련함이 밀려온다. 아마도 창경궁의 비극적인 지난 상처 탓일 게다. 조선의 궁궐은 모두 다섯 개였다. 경복궁과 그 옆의 창덕궁·창경궁 그리고 덕수궁과 경희궁이다. 이 가운데 창경궁은 가장 파괴가 심했던 궁궐이다.

창건 174년 후인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불타버렸고 광해군8년(1616년) 정궁(正宮)인 경복궁 대신 창덕궁과 창경궁을 먼저 재건했지만 인조2년(1624년)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년) 대화재로 내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이 또 다시 소실됐다. 이후 복원과 중수를 거듭해 조선후기까지는 궁궐로서의 체면은 유지했지만 1909년 일제강점기 직전 창경궁 남쪽 마랑(馬廊) 터 일원의 건물 모두를 철거하고 동물원과 대온실이 들어선 뒤에는 급기야 창경원(昌慶園)이라는 놀이공간으로 바뀌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1922년 화창한 봄날이었던 4월26일 자행됐던 만행이다.

원래 창경궁은 고려시대 남경(南京) 건물이 있던 자리로 조선 태조 때는 별궁(別宮)으로 불렸다. 이후 세종은 1418년 즉위한 그 해 태종을 위해 수강궁을 지었고 1483년(성종14년) 성종이 다시 건물을 증축하면서 창경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경복궁·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궁궐이었지만 왕이 정사(政事)를 보기 위한 궁궐은 아니었다. 성종이 증축할 당시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를 비롯해 어머니인 덕종 비 소혜왕후, 작은어머니인 예종 계비 안순왕후 등 권력에서 물러난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좁아진 생활공간을 넓힐 목적이 더 강했다. 따라서 창경궁은 궁중 여인들을 위한 공간이었고 동시에 창덕궁의 보조궁궐로 모자라는 주거공간을 보완해 주는 기능을 담당했다.

◇ 인조가 세운 왕의 사정(射亭)
창덕궁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지나 우측 담장을 끼고 대온실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10여분 걸었을까. 어울리지 않은 거대한 유리온실이 정면에 나타나고 왼쪽에는 푸른 싹이 돋아나는 느티나무·회화나무·능수버들 등 각종 수목들이 에워싼 연못 춘당지(春塘池)가 누워있다. 1984년 창경궁 복원 이후 아직까지 지워지고 있지 않은 창경원의 흔적 두 곳이다.

   
▲ 관덕정 사대에서 본 남쪽. 과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춘당지 앞까지 수목에 시야가 가로막혀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여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균관으로 통하는 오른쪽 집춘문(集春門) 쪽을 외면하고 창덕궁을 잇는 영춘문(永春門) 방향으로 직행한다. 그러나 대온실 동쪽, 춘당지 동북쪽 언덕을 바라보면 수목들 사이로 얼핏 정자의 윤곽이 드러난다. 현재 조선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왕의 사정(射亭)인 관덕정(觀德亭)이다.

이곳에 처음 정자가 들어선 것은 인조20년(1642년)이었다. 병자호란(1636년)의 수모를 경험한 임금이 절치부심한 탓인지 북벌론(北伐論)이 비등했던 당시 공혜왕후 한씨가 잠례(蠶禮)를 거행하던 장소에 취미정(翠微亭)이란 이름의 활터를 세우고 활쏘기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현종이 1664년 정자를 수리하고 이름도 관덕정(觀德亭)으로 바꾸었다.

취미정은 산의 중턱에 있는 정자라는 의미다. 춘당지 동북쪽 야산 언덕이라는 지형적 작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종이 바꾼 관덕정은 『예기(禮記)』 <사의(射義)> 편에 “활쏘기는 진퇴와 주선(周旋)이 반드시 예에 맞아야 한다. 마음이 바르고 자세가 곧아야 활과 화살을 잡을 때 바르고 안정되고, 활과 화살을 잡을 때 바르고 안정되어야 적중을 말할 수 있다. 활쏘기는 덕행을 살필 수 있다.(射者 進退周旋必中禮 內志正外體直 然後持弓矢審固 持弓矢審固 然後可以言中 此可以觀德行矣)는 말에서 유래한다.

관덕정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겹처마 구조이며 화강석 기단을 깔고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웠다. 돌로 마감된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마감했다. 벽과 문을 달지 않아 사방이 트여 있는 대(臺) 형태의 정자로 곱게 단청까지 돼 있지만 현판은 없다. 왕의 사정(射亭)이라기엔 의외로 초라하고 왜소하다. 아니면 소박하다고 해야 할까.

주변에는 단풍나무·참나무·소나무·느티나무 등 수목이 둘러쳐 숲을 이루고 있어 사방이 막혀 답답하다. 이곳이 정말 활을 냈던 사정(射亭)이 맞나 하는 의구심까지 들게 하는 지형이다.

   
▲ 순조 때 작성된 국보 제249호 『동궐도』. 오른쪽 언덕의 붉은색 원 안이 관덕정이다. 왼쪽 원 안은 창덕궁 영화당과 춘당대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273㎝, 가로 576㎝.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러나 1830년 이전 순조 때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를 보면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진다. 언덕 중턱 즈음 서 있는 사정(射亭) 주변으로는 수목이 전혀 없고 연못이 조성된 정면 멀리까지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시원하게 탁 트여 있다.

다만 정자의 구조는 다르다. 사면이 트여 있는 대(臺) 형태가 아니라 문을 달아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전형적인 정자 형태이며 뒤로는 보조행각도 배치돼 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창경궁이 과거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할 수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증보판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卷2) 경도(京都) 궁궐(宮闕) 창경궁(昌慶宮)>에는 관덕정을 가리켜 “창경궁에 있는 일종의 사정(射亭)이다”고 활쏘기를 하는 정자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 활 쏘고 술잔 기울이며 가을 단풍 구경한 정조의 풍류
『조선왕조실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조선 임금의 활쏘기 기록도 조선 후기의 문신 윤기(尹愭)가 1824년(순조24년) 84세 때 쓴 ‘형조참판 황공 행장(刑曹參判黃公行狀)’에 나타난다. 이 글에서 윤기는 숙종이 매일 같이 활쏘기를 했다고 적었다. 형조참판 황공은 조선시대 무관 벼슬을 했던 황징(黃徵: 1635~1713년)으로, 윤기는 그의 5세손인 황윤석(黃倫錫)의 부탁을 받고 이 글을 썼다.

“병진년(1676년·숙종2년)에 부호군 겸 내금위장(副護軍兼內禁衛將)에 제수되었다. 태복시 내승(太僕寺內乘)으로 있을 때 참판공이 연로한 나이로 고향에 있으니 공이 본도(本道: 충청도)의 벼슬자리를 하나 얻어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였다. 전관(銓官: 병조판서)이 공을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 후보자 명단에 올렸으나 임금의 낙점은 받지 못하였다. 당시 상(임금)은 매일같이 금원(禁苑: 후원)의 관덕정(觀德亭)에 납시었는데, 공이 내승으로서 활 쏘는 법이 전아하고 활 솜씨가 화살이 같은 자리에 적중할 정도로 뛰어나자 상이 특히 사랑하여 멀리 내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명자집(無名子集)』 제14책>

   
▲ 왕의 사정(射亭)이라기엔 의외로 초라하고 왜소하다. <사진=한정곤 기자>

정조도 관덕정에 자주 발걸음을 하며 활쏘기를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글이 남아 있다. 정조의 어제(御製)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권 춘저록(春邸錄)과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정조가 창덕궁 후원에서 느낀 아름다운 경치 열 곳을 정해 ‘상림십경(上林十景)’이라 하고 직접 지은 시가 수록돼 있다. 이 가운데에는 관덕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가을 단풍을 구경하는 ‘관덕풍림(觀德楓林)’이 포함돼 있다.

畫鵠鳴時箭中心 화살이 과녁에 맞혀 적중소리 울릴 때
雲霞步障擁仙林 구름 노을이 병풍처럼 선경 숲 에워쌌네
三淸物色元如許 삼청 경물 빛 이와 같이 뛰어나서
樂與諸君醉不禁 여러 군(君)과 함께 즐겨 취하길 마다하지 않네

관덕정 앞 사대에 서서 춘당지 앞에 설치됐을 과녁을 향해 활쏘기를 하고 있는 정조의 모습이 그려진다. 정조는 이곳에서 습사를 하며 어떤 덕을 키우고자 했을까.

창경궁 관덕정을 가자고 했을 때 이지후 여무사는 활가방도 챙겨야 하느냐고 물었다. 아마도 궁궐에서의 활쏘기가 가능하리라는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이 아닌 신하인 걸 어떡하겠는가. 그런데 김종민 접장은 정말 활가방을 들고 왔다. 이왕 가져왔으니 빈활이라도 당겨본다며 관덕정 앞에서 거궁과 만작을 하는 모습이 어쩐지 처량하다.

관덕정을 돌아 나오면서 최문구 접장은 “문화재청과 같은 정부기관에서 1년에 한번쯤이라도 무과시험을 재현하는 행사를 마련해 실제 활쏘기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한다면 전국의 활꾼들과 관광객들에게 그보다 더 멋진 경험은 없을 것”이라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주인 잃은 관덕정도 조선의 왕들이 활쏘기를 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비록 옛 주인의 직계 후손은 아니더라도 활터 본연의 기능을 되찾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이 될 것이다.

   
▲ ‘대사례도(大射禮圖) 중 어사례도(御射禮圖)’, 1743년(영조19년) 윤 4월7일 거행된 ‘대사례(大射禮)’ 중 임금이 활 쏘는 모습을 담고 있는 ‘어사도(御射圖)’다. 비단에 채색, 60.0×282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사실 관덕정은 아니었지만 지난 2006년 문화재청은 경복궁 홍례문 광장에서 조선시대 대사례의(大射禮儀)를 재현한 바 있다. 대사례는 조선왕조 통치 질서의 근간인 오례의(五禮儀) 중 군례(軍禮)에 속하는 것으로 왕과 신하가 활쏘기를 통해 군신(君臣)간의 예와 화합을 유지하고 군왕의 무예적 소양을 갖추기 위해 조선 초부터 거행된 의식이다.

당시 재현한 대사례는 1743년 음력 윤달 4월7일 영조가 성균관에 행차해 행한 문묘작헌례(文廟酌獻禮), 알성 문·무과시험과 합격자 발표 등 일련의 행사 중 대사례 부분만 재구성했다. 국왕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의인 진하의(進賀儀), 국왕이 활을 쏘는 예인 어사례(御射禮), 문무백관이 활을 쏘는 예인 시사례(侍射禮), 상벌과 축하공연 등의 부대행사 등이 3일간 계속됐다.

◇ 임금의 대표적 활쏘기 장소였던 춘당대
조선시대 궁궐의 사정(射亭)은 관덕정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경복궁에 오운정(五雲亭)이라는 사정을 만들어 누구나 활쏘기를 할 수 있도록 민간에까지 개방했으며 효종은 창경궁 내사복(內司僕)에 사정을 특설해 내승(內乘)과 별군직(別軍職) 등의 관리가 습사하도록 했다. 고종도 1868년 경복궁 내에 경무대(景武臺)를 설치해 문무(文武) 과시(科試)와 열무를 행하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희궁(慶熙宮) 회상전 동쪽 내원(內苑)의 별실로 융무당이 있었다”며 “남쪽의 대를 관사대(觀射臺)라 하고 북쪽의 정자를 봉황정(鳳凰亭)이라 하는데 모두 활쏘기를 익히고 무예를 연습하는 곳”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조선 왕들에게 이들 사정(射亭)은 별반 의미가 없었다. 궁궐 어디라도 과녁만 설치하면 그곳이 무겁이었고 왕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사대였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의 여러 왕들도 궐내 곳곳에서 활쏘기를 했고 대표적인 연회 장소였던 경복궁 경회루에서까지 활쏘기를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등장한다.

『세종실록』 52권(세종13년 6월1일)에는 세종이 “경회루 아래에 나아가 활쏘기를 구경했다(御慶會樓下 觀宗親射侯)”고 기록돼 있다. 세종은 경회루를 가장 많이 찾고 활용한 임금이었다. 사신맞이는 물론 종친과 신하들을 위한 연회도 자주 베풀었고 가뭄 때는 기우제도 경회루에서 올렸다. 또한 무과시험을 주재해 활쏘기 시범을 관람한 곳도 경회루였다.

중중 역시 “경회루에서 활쏘기를 관람한 후 1등을 한 내금위 허광필을 승진시켜 주었다(御慶會樓觀射 內禁衛許光弼居首 命加一級)”고 『중종실록』은 전한다. 세조는 경회루 연못 너머에 과녁을 설치하고 자주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연못에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 창덕궁 영화당 마루에 앉아 바라본 춘당대. 멀리 보이는 담장 너머가 창경궁 춘당지다. <사진=한정곤 기자>

궁궐에서 특히 임금의 활쏘기 장소로 가장 대표적인 곳은 창경궁 관덕정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창덕궁의 춘당대(春塘臺)다. 일제가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에 담을 쌓아 완전 분리시켜 버리기 전까지 관덕정에서 창덕궁 영화당까지는 시원하게 뚫린 시야가 확보됐다. 창경궁 동북쪽 언덕에 자리한 관덕정은 창경궁의 경치를 아무런 장애물 없이 바라볼 수 있는 훌륭한 전망대였던 셈이다.

『동궐도』에는 관덕정 앞 연못인 백련지와 그 물로 임금이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內農圃)를 건너면 낭떠러지 위에 광활하게 펼쳐진 춘당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백련지는 오늘날 소춘당지라 불리는 곳이며 창경궁 시절 보트놀이를 했던 연못은 당시 내농포였다. 일제가 내농포를 파헤치고 백련지의 물을 끌어들여 지금의 춘당지로 만든 것이다. 즉 오늘날 창경궁 춘당지를 메우고 창덕궁 영화당 앞마당을 가로막고 있는 담장을 허물면 넓은 개활지가 되는데 이곳이 바로 춘당대다.

◇ ‘춘당춘색 고금동(春塘春色 古今同)’
춘당대는 국가의 여러 행사가 열렸던 야외 공간 중 하나다. 과거시험을 비롯해 날이 가물 때에는 경복궁 경회루와 함께 기우제를 지낸 곳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춘당대에서 거행됐던 과거시험을 춘당대시(春塘臺試)라고 불렀다. 왕실에 경사가 있거나 유생을 시험하기 위해 비정기적으로 실시하던 문·무과로 1572년(선조3년) 선조가 춘당대에 친림해 치르게 한 데서 비롯됐다. 특히 이 시험만으로 대과(大科) 3단계 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전시(殿試)를 보는 것과 같은 혜택을 주었다.

시험은 제술과(製述科)만으로 하고 합격자 수는 일정한 정원이 없었다. 그래서 과거시험 중 운이 가장 많이 따르는 시험으로 알려져 유생과 하급관리 등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유생들이 새벽녘부터 춘당대 뜰에 좌정하고 있으면 동이 틀 무렵 내걸리는 시험제목에 따라 글을 지었고 시험이 끝나면 바로 채점에 들어가 급제한 유생들에게는 임금이 직접 격려하면서 어사화를 내렸다.

   
▲ 영화당 앞마당은 춘당대이며 뒷마당은 부용지로 툇마루가 앞뒤로 설치된 특이한 구조다. <사진=한정곤 기자>

춘당대 과거시험 장면을 가장 잘 묘사한 글은 『춘향전』이다. 남자 주인공 이몽룡이 장원급제한 장면으로 당시 과거시험의 시제(詩題)는 ‘춘당춘색 고금동(春塘春色 古今同)’이었고 춘당은 춘당대를 가리킨다. 즉 ‘춘당대의 봄빛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글제가 제시된 것이다. 이몽룡이 시제를 받아든 이후의 모습을 『춘향전』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시제(詩題)를 펼쳐 놓고 해제(解題)를 생각하여 용지연(龍池硯)에 먹을 갈아 당황모(唐黃毛) 무심필(無心筆)을 반중둥 덤뻑 풀어 왕희지 필법으로 조맹부체를 받아 일필휘지(一筆揮之) 선장(先場)하니 상시관(上試官)이 글을 보고 자자(字字)이 비점(批點)이요, 구구(句句)이 관주(貫珠)로다. 용사비등(龍蛇飛騰)하고 평사낙인(平沙落雁)아라. 금세(今世)의 대재(大才)로다. 금방(金榜)에 이름을 불러 어주 삼배(御酒三杯) 권하신 후 장원급제(壯元及第) 휘장(揮場)이라. 신래(新來) 진퇴(進退) 나올 적에 머리에는 어사화(御賜化)요, 몸에는 앵삼(鶯衫)이요. 허리에는 학대(鶴帶)로다. 삼일유가(三日遊街)한 연후에 산소에 소분(掃墳)하고 전하(殿下)께 숙배하니 전하께옵서 친히 불러 보신 후에 ‘경(卿)의 재주 조정(朝廷)에 으뜸이라’ 하시고 도승지 입시(入侍) 전라도어사(全羅道御使)를 제수(除授)하시니 평생의 소원이라. 수의(繡衣), 마패(馬牌), 유척(鍮尺)을 내주시니 전하께 하직하고 본댁(本宅)으로 나아갈 제 철관 풍체(鐵冠風采)는 심산맹호(深山猛虎) 같은 지라.”

◇ 정조와 효종의 활쏘기 철학
춘당대는 임금이 친사(親射)하는 활터로도 유명하다. 또한 신하들을 모아 시문(詩文)을 나누는가 하면 임금이 주재하는 활쏘기 대회를 연 곳도 춘당대였다. 영조는 이곳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며 문신들의 실력이 형편없다며 화살이 많이 떨어질 백련지에 군사를 많이 배치하라는 농담을 건네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춘당대에서 친사한 임금 중에서 정조가 빠질 수 없다. 정조는 1792년 10~12월 사이 매일 출근하다시피 발걸음을 하며 춘당대에서 활쏘기 행사를 벌였다. 이때 정조의 시수(矢數)는 10순(巡: 1순은 5시(矢)다) 중 10월17일 32중, 26일 47중, 30일 49중이었다. 정조는 “활쏘기는 군자의 경쟁이니 남보다 앞서려고도 하지 않으며 사물을 모두 차지하려 기를 쓰지도 않는다”고 강조했다. 또한 “활 쏘는 사람들의 예법은 본래 1시는 빼고 49시를 쏘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명궁(名弓)이었지만 관중(貫中)보다는 덕(德)을 기르고 쌓는 활쏘기를 즐겼던 것이다.

정조의 춘당대 사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춘당대 옆에 단풍정(丹楓亭)이라는 활터까지 만들어 활쏘기 등 여러 행사를 연 것으로 『일성록(日省錄)』은 전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단풍정의 위치가 춘당대 곁이라면서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서 가을이 되면 난만하게 붉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었으나 정자는 없다”고 적혀 있다. 단풍나무가 무성했던 춘당대 일대에는 오늘날 단풍나무 대신 참나무, 느티나무, 음나무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영화당 마루에서 바라본 부용지. <사진=한정곤 기자>

정조가 가장 총애했던 신하 중 한 명이었던 정약용의 활쏘기 일화를 담고 있는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의 <북영벌사기(北營罰射記>는 언제 읽어도 흥미롭다. 정약용은 적어도 활쏘기에서만큼은 정조의 총애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던 모양이다. 또한 총애하던 신하에게 혹독한 벌로 애정을 표현한 군주 정조의 리더십도 함께 읽혀진다.

“신해년(1791년·정조15년) 9월에 주상께서 춘당대에 납시어 규장각(奎章閣)의 여러 신하들에게 웅후(熊帿: 곰가죽으로 만든 과녁의 표적)를 10순(巡)씩 쏘라고 명하셨다. 신(臣) 용(鏞)·수만(秀晩)·명연(明淵)·반(鎜)·동만(東萬)·지렴(知濂) 등은 모두 네 발(四矢)도 맞히지 못했다. 활 쏘는 법에 따르면 벌주 한 잔에 해당되었지만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에게 술을 준다면 상(賞)을 주는 것이다. 문장은 아름답게 꾸밀 줄 알면서 활을 쏠 줄을 모르는 것은 문무를 갖춘 재목이 아니니 의당 북영(北營)에 잡아놓고 하루에 20순(100矢)씩 쏘아서 매 순마다 한 발씩은 맞힌 뒤에야 풀어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우리들은 북영(北營)으로 갔다. 처음에는 활이 망가지고 화살은 굽었으며 깍지는 떨어져 나가고 팔찌(습(拾): 활을 쏠 때 왼팔 소매를 걷어 매는 띠)는 질질 끌렸으며 손가락은 부르트고 팔뚝은 부었으며 말 타는 솜씨도 서툴러서 보는 사람이 크게 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활시위를 당기는 솜씨가 점점 능란해져서 1순을 쏘면 세 발을 맞히는 때가 많았다. 주상께서 그 맞히는 숫자를 보시고 하루에 10순씩만 쏘고, 그 여가에 경의(經義)를 연구하라고 하시면서 『시경(詩經)』에 관한 문제 800여 조목을 내리시며 조목별로 답을 써서 올리라고 하였다. 열흘쯤 지나자 사예(射藝)가 더욱 늘었고 마침내 풀려나게 되었다.

나는 삼가 생각하건대 옛날은 육예(六藝)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유자(儒者)라고 이름붙일 수 없기 때문에 연회 때는 반드시 활쏘기를 하였으니 삼련(參連)과 백시(白矢) 같은 것도 그들이 대부분 익혔던 것이다. 후세에는 문무의 도가 나뉘어졌으며 우리나라 풍속 또한 문(文)을 귀히 여기고 무(武)를 천하게 여기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지필(紙筆)을 익혀 먹을 다루고 편지글이나 쓰는 말기(末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평생 동안 활을 잡아 보지도 못하고 늙는 자가 있다. 지금 우리 몇 사람들은 다행히 성인(聖人)의 세상에 났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인데 성인의 문하(門下)에서 노닐며 궁시(弓矢)에 종사하게 되어 거칠게나마 활의 좌우와 당기고 놓음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으니 이른바 천고(千古)에 한 번 만나는 행운이 아닌가. 그런데 그 활쏘기 연습은 열흘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360일 가운데 36분의 1을 할애하여 스스로 활쏘는 기예(技藝)를 익히지 못하고 임금의 가르침을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힘써서 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우리의 죄인 것이다.”

   
▲ 창덕궁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글씨다. <사진=한정곤 기자>

이처럼 정조의 활쏘기가 군자의 덕을 기르는 행위였다면 효종의 활쏘기는 전혀 달랐다. 효종은 활쏘기를 통해 덕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단지 활쏘기의 기예만이 필요했다. 쉽게 말하면 무조건 관중하는 활쏘기만을 고집했다. 관무재(觀武才)를 부활시키고 군율을 어기는 자는 엄벌에 처하는가 하면 관무재에서 성적이 우수한 자는 관직으로 포상을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특히 직접 활쏘기를 가르치는 모습을 통해 무인적인 모습을 과시함으로써 입지를 강화하려고도 했다. 대외적으로 청나라가 간섭을 하고 있었던 시기에 드러내놓고 국방을 강화하지는 못했지만 침입에 대비하는 군주의 활쏘기가 아닐 수 없다.

영화당(暎花堂)에 앉아 널찍한 춘당대를 바라본다. 관덕정을 마주 보았을 일제 강점기 이전과 달리 빽빽하게 들어선 소나무 숲과 높은 담장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뒤로 돌아앉으니 한 송이 연꽃이 활짝 피어 있는 형상의 부용지(芙蓉池)가 답답했던 마음을 대신 어루만져준다. 부용지 너머로는 부용정(芙蓉亭)이 자리하고 북쪽 언덕 위로는 어제(御製)·어필(御筆)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한 주합루(宙合樓)가 높은 곳에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영화당의 영화(暎花)는 ‘꽃과 어울리다’는 뜻으로 광해군 때 처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건물은 숙종18년(1692년) 재건한 건물이며 왕과 왕실가족들이 휴식공간으로 이용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 팔작지붕 구조로 앞마당의 춘당대와 뒷마당의 부용지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도록 앞뒤에 툇마루를 설치한 특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현판은 영조의 글씨다.

   
▲ 창덕궁 북서쪽 끝부분에 숨어있는 괘궁정. <사진=한정곤 기자>

◇ 신선원전에 숨은 괘궁정
창덕궁에는 왕의 활터는 아니지만 사정(射亭)으로 기록된 정자가 한 곳 더 있다. 기억하는 이도 없고 찾는 이는 더더욱 없어 사실상 잊혀지고 있다. 창덕궁 후원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괘궁정(掛弓亭)이다.

특히 괘궁정으로 가기 위해서는 신선원전(新璿源殿)을 거쳐야 하는데 비공개지역으로 일반인들의 접근을 철저하게 금하고 있다. 궁궐 근무만 10년을 했다는 창덕궁관리사무소 박신제 씨는 “지금까지 공개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공개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안다”면서 “공개할 이유가 없는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신선원전은 1921년 건립된 근대시기의 건물로 태조부터 순종에 이르는 조선 임금 12분의 초상화를 모신 진전(眞展)이다. 진전은 조선 임금들의 영정을 봉안했던 곳을 통칭한 말이다. 이전에 건립된 옛 선원전과 구분하기 위해 신(新)자를 접두어로 붙여 부르고 있을 뿐 고유의 명칭은 선원전(璿源殿)이다.

창덕궁관리사무소의 촬영 허가를 받았지만 괘궁정으로 가는 길에는 직원이 동행했다.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에서 서쪽 담장을 따라 북쪽으로 약 20여분을 걸었다. 후원(後苑)의 서쪽 끝 지점 부근에 도착했을 때 좌측으로 굳게 문이 닫힌 커다란 외측문이 보였다. 신선원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 우물천장 형식의 괘궁정 천장에는 네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펴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동궐도』에는 이곳에 대보단(大報壇)이 그려져 있다. 대보단은 임진왜란 때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던 명나라 신종(神宗)의 은의(恩義)를 추모하기 위해 쌓은 제단(祭壇)이다. 그러나 1908년 일제에 의해 폐지되고 일제 강점기의 ‘향사이정(享祀釐正)’ 정책에 의해 창덕궁과 경복궁, 영희전 등지에 설치됐던 진전을 하나로 통합시킨 과정에서 신선원전이 건립됐다. 『순종실록부록』 1921년3월22일자에는 옛 북일영(北一營) 터에 신선원전을 세웠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대보단 자리에 훈련도감의 분영이었던 북영(北營) 일부가 포함돼 신선원전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 북영의 ‘활을 걸어놓는 정자’
외측문을 열고 신선원전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괴목과 고목들이 곳곳에 버티고 서있다. 아직까지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비공개지역인 탓인지 을씨년스러우리만치 적막한 분위기가 팔등에 소름을 돋게 한다. 새소리는 물론 바람소리조차 쉬어가는 듯 고요한 정적이 오히려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어쩌면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이라는 선입견 탓인지도 모른다.

괜히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의효전 앞으로 난 길을 따라 재실 옆에 이르러 몽답정(夢踏亭)과 마주한다. 이어 재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언덕 위 담장에 기대어 나 홀로 우뚝 버티고 선 채 신선원전을 내려다보고 있는 괘궁정을 만나게 된다.

곱게 단청을 채색한 괘궁정은 돌로 된 석축을 쌓아올린 후 두 개의 사각 기둥 받침돌 위에 올라선 누(樓)의 형태다.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인 사각형 모양으로 입구를 제외한 삼면에는 난간을 둘렀고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트여있다. 겹처마 지붕에 절병통을 얹었고 천장은 우물천장 형식으로 천장에는 네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펴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마루로 올라섰다. 비록 수목에 가리긴 했지만 신선원전은 물론 재실과 의효전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서쪽은 궁궐 담장이고 북쪽은 중앙고등학교 운동장이다.

   
▲ 괘궁정 마루에 오르니 신선원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한정곤 기자>

괘궁정은 ‘활을 걸어 놓는 정자’라는 의미로 북영 군사들이 활쏘기를 했던 사정(射亭)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괘궁정이 활을 쏘는 사정(射亭)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활을 걸어놓고 북영 안의 활터를 내려다보는 정자라고 좁게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북한 양강도 혜산시 북쪽 압록강변 절벽에 북방 방어를 위한 초소인 동일한 이름인 괘궁정을 염두에 둔 해석이다. 병사들이 정자에 활을 걸어놓고 적군의 동태를 감시할 초소의 목적으로 세운 정자라는 의미다.

그러나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몽답정(夢踏亭)은 훈국북영(訓局北營) 안에 있는데 천석(泉石)의 승경(勝景)이 있다. 숙종이 일찍이 꿈에 이 정자에 행차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또 사정(射亭)이 있는데 괘궁정(掛弓亭)이라 하며 연꽃 구경하는 정자를 군자정(君子亭)이라 한다”고 기록돼 있다.

북한의 괘궁정과 이름이 같다고 초소라고 좁게 해석하기보다는 넓은 의미로 활을 쏘았던 사정(射亭)으로 이해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초소였든 사정(射亭)이었든 지금은 조선 임금 12분의 영정이 모셔진 신선원전을 지키는 호위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기유년은 1849년 아닌 1729년…당시엔 현판도 존재
괘궁정을 언제 누가 세웠는지 기록은 없다. 다만 기단석 옆 바위에 ‘괘궁암(卦弓岩)’이라는 글자와 함께 ‘기유년(己酉年)’이라는 음각이 보인다. 순조 때 그려진 『동궐도』와 헌종 초 편찬된 『궁궐지』에 괘궁정이 표기되지 않은 것을 근거로 전문가들은 기유년을 헌종15년(1849년)으로 판독하고 있다.

   
▲ 기단석 옆 바위에 ‘괘궁암(卦弓岩)’이라는 글자와 함께 ‘기유년(己酉年)’이라는 음각이 보인다. <사진=한정곤 기자>

그러나 조선 후기 문인 윤기(尹愭)가 29세였던 1769년(영조45년) 쓴 ‘봄날 북영을 둘러보고 몽답정에 올라 남의 시에 차운하여(春日遊北營 登夢踏亭 次人韻 己丑)’라는 시에 괘궁정이 등장하고 있어 기유년은 1729년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지금은 사라진 현판도 당시엔 존재했던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暇日聊登夢踏亭 모처럼 한가한 날 몽답정(夢踏亭)에 잠시 올라
百年幽抱倚風欞 한평생의 회포 품고 바람 부는 난간에 기대네
名傳緩帶留閑幕 이름이 전해오는 완대(緩帶)가 한가로운 군막(軍幕)에 남아있고
字宛挂弓立翠屛 현판 글자 완연한 괘궁정(卦弓亭)이 푸른 벼랑에 섰구나
中壘鼓旗多氣象 보루의 북소리와 깃발은 장한 기상 넘치고
上林花柳自丹靑 궁원(宮苑)의 꽃과 버들은 울긋불긋 그림이로세
最憐㶁㶁循除響 좋구나 섬돌 따라 졸졸대는 물소리
使我忘歸側耳聽 돌아갈 줄 모르고 귀 기울여 듣게 하네 <『무명자집』 시고 제1책>

훈련도감이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3년 임시군영으로 설치됐고 분영인 북영은 1679년(숙종5년) 경기 속오군 가운데 건장한 군사를 뽑아 장초보(壯抄保)를 편성해 겨울철 3개월간을 경비근무하게 한 것이 시초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유년은 1729년이 더욱 확실하다.

괘궁정이 『동궐도』에서 보이지 않은 이유도 분명하다. 신선원전이 조성되기 이전인 대보단 시절 북영의 동쪽 끝에 세운 활터로 궁궐 건물이 아니었기에 굳이 그려 넣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정면에서 본 괘궁정. <사진=한정곤 기자>

신선원전 외측문을 나와 돈화문 방향으로 되돌아 나오는데 시끌벅적 관람객들이 떼를 지어 언덕을 내려온다. 후원 관람을 마친 외국인들이 후원 북쪽 옥류천 일원을 마지막으로 옛 선원전 방향으로 가로질러 오는 것이다.

창덕궁 홍보관에 앉아 차 한 잔 마시고 나오면서 입구에 걸린 『동궐도』에서 영화당과 앞마당 춘당대를 다시 짚어본다. 오늘날 무과시험과 같은 활쏘기를 재현하는 행사가 열린다면 이곳이 최적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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